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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키 17>(2025)은 <기생충>(2019) 이후 봉준호 감독의 6년 만의 신작이다.


6년 전 <기생충> 개봉 첫날 밤, 혼자 극장에 가서 영화를 관람했었다. 블랙 코미디를 전면에 내세우던 영화는 순식간에 스릴러를 넘어 호러로 장르를 탈바꿈했다. 끊임없이 고조되는 서스펜스는 극도의 공포감을 자아냈다. 하마터면 압박감을 이기지 못하고, 극장을 뛰쳐나갈 뻔했던 기억이 또렷하다. 그날 밤 집에 돌아와 단 한숨도 자지 못했다. 머릿속이 <기생충>으로 온통 가득 차 도저히 잠들 수가 없었다.


6년 전과 마찬가지로 개봉 첫날 극장에서 관람한 <미키 17>은 날 충격에 빠뜨리지 않았다. 불쾌함과 공포에 몸서리치게 만들지도 않았다. "나도 이제 행복해도 괜찮아"라는 미키의 마지막 말은, 오히려 나를 당황케 했다. 이거 내가 생각한 거랑 너무 다른데?


['봉준호는 자신의 영화가 목적지를 거짓으로 알려주는 버스와 같다고 비유한 적이 있다. 청량리에 간다고 승객을 태워놓고 왕십리에 데려다놓는다.'] (김영진, [신 전영객잔] 품었던 생각을 끊어버리다, 씨네21, 13.09.12)

 

곰곰히 생각해 보면 <기생충> 때도 그랬다. 철저하게 근세의 정체를 숨긴 영화는 갑자기 핸들을 돌려 풀악셀을 밟았다.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 주위를 둘러본 내 앞에 펼쳐진 건, 도저히 마주하고 싶지 않은 참혹한 비극이었다. 6년 만에 나는 봉준호 감독의 버스에 올라탔다. 그는 언제나 목적지를 거짓으로 알려준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은 상태였다. 어리둥절한 채로 버스에서 내린 내 앞에 나타난 건, 있는 힘을 다해 울부짖고 있는 크리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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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키 17>에 등장하는 크리퍼는 봉준호 감독이 19년 전에 만든 괴수 영화 <괴물>(2006)을 떠올리게 한다. <괴물>이 괴물에게 납치된 딸 현서를 아빠 강두를 비롯한 가족들이 구하러 가는 이야기였다면, <미키 17>은 마샬에게 납치된 베이비 크리퍼 조코를 마마 크리퍼가 구하려 하는 이야기다.


19년 전 '괴물'에게는 이름도, 서사도 부여되지 않았다. 인간들을 공포에 떨게 하는 하나의 재앙으로써 존재할 뿐이었다. 한강에 버려진 화학 폐기물 때문에 생겨난 괴물은 무분별하게 사람들을 공격했다. 기다란 꼬리로 현서의 몸을 칭칭 감아 깊은 굴속으로 데려갔다.

 

하지만 <미키 17>에 등장하는 '크리퍼'는 개별 이름을 가진 하나의 종족으로 존재한다. 괴물과 달리 먼저 공격하지 않는 한 사람들에게 해를 끼치지도 않는다. 크리퍼는 자신의 긴 꼬리로 미키 17의 몸을 칭칭 감아 깊은 굴속에서 구해준다.


봉준호의 영화에는 목소리를 내도 사람들이 듣지 않는 약자들이 항상 존재했다. <괴물>의 강두가 자신의 딸이 살아있다고 아무리 외쳐도, 사람들은 그 말을 믿지 않는다. <마더>의 엄마는 자신의 아들이 범인이 아니라고 말하지만, 사람들은 그런 엄마를 외면한다. <미키 17>의 미키 17이 크리퍼가 자신을 구해줬다고 말해도, 마샬과 일파는 그 말에 코웃음을 치기만 한다.

 

크리퍼 역시 미키와 마찬가지로 영화 속에서 약자로 그려진다. 처음에는 무슨 말인지 이해하기 어려운 크리퍼들의 목소리는 과학 기술에 의해 통역된다. 봉준호 영화 속에서 사람들에게 닿지 않았던 약자들의 목소리가 제대로 전달되기 시작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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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퍼들에 의해 구출되는 미키 17의 이미지는 기계 속에서 프린트되는 미키의 모습과 겹쳐진다. 미키 17은 크리퍼 덕분에 죽지 않고도 두 번째 인생을 살게 된다. 그런 미키 17의 앞에 등장한 건 자신과 똑같은 얼굴, 똑같은 기억을 가진 미키 18이다. 미키 18은 미키 17에게 죽음 그 자체와도 같은 존재다.


미키 17은 미키 18의 탄생으로 인해 영구삭제의 위기에 처한다. 그리고 미키 18은 끊임없이 누군가의 죽음을 원한다. 미키 17은 미키 18을 마주함으로써 익스펜더블이 되고 난 후에 미처 자각하지 못했던 진정한 죽음, 끝에 직면하게 된다.


미키는 어릴 적 어머니의 죽음에 대한 트라우마를 가지고 있다. 조수석에 앉은 미키는 아무 생각 없이 빨간 버튼을 눌렀고, 그 타이밍에 차가 폭발했다. 미키 역시 우연이라는 사실을 알지만, 자신이 버튼을 눌러 차가 폭발했다는 죄책감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한다. 아무리 죽어도 삶이 끝나지 않는 자신의 처지도 어머니에 대한 죄책감에 무게를 실어줬을 것이다.

 

영화의 마지막, 미키 17은 다시 빨간 버튼을 누른다. 첫 번째 빨간 버튼을 누른 이후 멈춰있던 미키의 시간이 다시 흐르기 시작한다. 자신의 의지로 택한 그 폭발은 미키 17을 '미키 반스'로 되돌려 놓는다.

 

"나도 이제 행복해도 괜찮아"라는 미키 반스의 마지막 말이 새삼 뭉클하게 다가온다. 역시 이번에도 봉준호가 운전하는 버스에 올라타길 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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