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일상적으로 빛을 접한다. 아침에 눈을 뜨면 햇살이 느껴지고, 거리는 낮이나 밤이나 조명으로 가득하다. 고개를 들어 올리면 해가, 또 달이, 운이 좋으면 반짝이는 별들도 볼 수 있다. 이렇게 빛은 다양한 방식으로 우리 곁에 존재하지만, 이상하게도 빛이 없는 곳에서 빛을 상상해 보기란 어렵다.
햇살이 내리쬐는 공원, 밝게 빛나는 전구는 머릿속에서 쉽게 그려볼 수 있다. 하지만 '빛' 그 자체를 떠올리려는 시도는 되려 우리가 아무것도 떠올리지 못하게 만든다. 이럴 때면 빛이라는 게 그저 그 자리를 밝게 비추는 허상 같게도 느껴진다.
영화 <우리가 빛이라 상상하는 모든 것>은 허상과도 같은 '빛', 하지만 어둠 속에서 우리에게 곁을 내어주고, 삶을 살아가게 만드는 '빛과 같은 존재'에 대해 이야기한다.
영화의 주인공은 두 여성, 프라바와 아누다. 그들은 뭄바이의 같은 병원에서 근무하는 간호사이고, 현재 함께 살고 있다. 극 중에서 프라바와 아누는 대척점에 서 있는 인물로 묘사된다.
영화 초반 아누가 호기심 가득한 아이처럼 여러 사물에 청진기를 갖다 대는 장면이 등장한다. 아누의 손길이 어떤 물체에 닿으면, 그 물체 내부의 소리는 영화 전체의 사운드로 확장된다. 이곳저곳을 부유하던 그의 손길은 마지막에 자신의 심장으로 가닿는다. 아누는 세상의 작은 소리, 무엇보다도 본인 내면의 소리를 궁금해하고, 들여다볼 줄 아는 인물이란 걸 알 수 있다.
아누에게 '빛과 같은 존재'는 이슬람교도 애인 시아즈다. 그들의 사랑은 말 그대로 불타오르는 젊은이들의 사랑 같다. 시도 때도 없이 서로가 보고 싶고, 끊임없이 서로를 매만지며 깊은 사랑을 나누고 싶어 한다. 하지만 인도 내에 만연하게 존재하는 이슬람 혐오 때문에 그들은 사람들의 시선을 신경 써야만 한다.
때로는 두렵고, 때로는 미래가 보이지 않지만, 그들은 남들의 시선이 닿지 않는 어둠 속에서라도 행복할 수 있을 것만 같다. 그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빛이 되어줄 수 있는 존재니 말이다.
아누와 상반되게 프라바는 사랑의 감정을 절제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는 부모님의 중매로 처음 보는 남성과 결혼했다. 하지만 그 남편은 독일로 떠났고, 지금은 연락이 끊긴 지 1년 가까이 된 상태다. 이 정도면 남편의 존재가 큰 의미가 없을 것 같지만, 프라바는 자신에게 마음을 표현하는 새로운 남성에게 거리를 둔다.
프라바가 혼자여도 충분해서 그 마음을 거절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는 지금 빛을 상상하기 어려운 어둠 속에서 홀로 외로움을 느끼고 있다.
프라바와 아누가 사는 집에 도착한 붉은 밥솥이 그런 프라바의 외로움을 보여준다. 누가 보냈는지 명확히 알 수는 없지만, 프라바의 남편이 있는 독일에서 만들어진 물건. 어두운 밤, 잠을 이루지 못하는 프라바는 핸드폰 불빛으로 밥솥을 비춘다. 그 불빛은 이내 꺼지고, 그 다음 쇼트에 프라바는 자신에게 마음이 있는 남성이 준 시에 불빛을 비춘다.
그때 프라바의 마음을 잠시 밝혀준 '빛과 같은 존재'는 언젠가 남편이 돌아올 것이라는 믿음(밥솥)과 인생을 다시 시작할 수 있을 것만 같은 새로운 사랑(시)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두 가지 불빛은 잠시동안 그 자리를 밝히다 금세 꺼져버린다.
아누와 시아즈가 서로를 어루만지는 쇼트 다음에 등장하는 건 여전히 어두운 밤, 붉은 밥솥을 어루만지고 깊이 껴안는 프라바의 모습이다. 아누와 프라바의 상반되면서도 비슷한 이미지의 반복은, 프라바의 인생을 밝혀줄 '빛과 같은 존재'는 진정 무엇일지 그 스스로에게 되묻게 한다.
우리 삶은 언제나 어둠과 빛으로 뒤섞여 있다. 하지만 유독 어둠이 오래 지속될 때, 우리는 빛을 상상하는 걸 힘겨워한다. 그때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빛과 같은 존재가 되어 그 시간을 버텨내게 도와줄 수 있다.
우리가 어두운 극장 속에서 목격한 이 빛과 같은 영화를, 아누와 시아즈가 목격한 동굴 속 낙서처럼 마음속에 새겨본다. 내 인생에 '빛과 같은 존재'는 무엇인지. 그 존재가 머릿속에 선명해지는 순간, 마음속이 환해지는 게 느껴졌다. 어둠 속에서 빛을 떠올리는 방법을 이제는 알게 된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