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어른의 조건
어른의 조건에 대한 재밌는 영상을 봤다.
1. 메시지보다 전화가 편해진다.
2. 말에 리듬을 붙인다.
3. 꽃 사진을 찍는다.
4. 가지를 먹는다.
꽃 사진을 찍는다는 부분에서는 마침 아침에 찍은, 꽃망울을 틔우기 시작한 벚꽃이 생각나서 웃음이 터졌는데, 어른만 가지를 먹는다는 부분에서는 빼도 박도 못해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젠장.
어렸을 때 나는 주는 대로 넙죽넙죽 잘 먹는, 건강하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운, 먹성 좋은 아이였다. 그리고 엄마는 손끝이 야무져 어떤 음식을 하더라도 맛을 내는 사람이었다. 엄마는 네 식구의 식사와 간식을 책임지는 자기의 역할에 큰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가지볶음이 식탁에 올라온 날. 그녀석은 나에게 철저히 외면당했다. 물렁해 보이는데 어딘가 모르게 찌글찌글한 행색과 거무튀튀한 색깔을 보고 입에 넣을 초등학생은 없다. 엄마의 자부심에는 흠집이 났다. 가지볶음 쪽으로는 고개도 돌리지 않는 나를 눈치챈 엄마는 "이게 얼마나 달고 향긋한데!" 하며 내 입에 억지로 한 조각을 밀어 넣었다. 최악이었다. 이빨이 닿자마자 힘없이 무너지는 물컹한 식감, 그 틈새로 배어 나오는 미지근하고 들척지근한 즙. 나는 그 '기분 나쁜 오묘함'을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입맛을 버렸다.
으엑 퉤퉤. 나는 절대! 앞으로도 이렇게 말랑말랑, 찌글찌글, 거무튀튀한 가지 같은 건 절대로 먹지 않겠다고 힘주어 다짐했다.
35세가 되었다. 가지는 못 먹는다. 없어서 못 먹는다.
가지는 볶아도, 튀겨도 맛있다. 특히 어향가지는 술안주로 제격이다. 바삭한 튀김옷을 베어 물면, 촉촉한 속살이 혀 위에서 녹아내리며 매콤 달콤한 소스와 섞인다. 눌어붙는 식감과 풍미가 길다.
하지만 가지 좀 먹는다고 다 어른일까. 35세가 되면 무조건 어른이 되는 걸까. 그런데 나는 왜 여전히, 아직도, 충분히 ‘어른’이 되지 못한 것 같을까. 웃자란 몸으로 어설프게 어른을 연기하고 있는 것 같은 낭패감은 어디에서 기인했을까. 스스로를 미성숙한 존재로 유예하면서 사회의 책임을 회피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사회인으로서 먹고사는 문제를 그럭저럭 해낼 수 있어도, 타인과 매끄럽게 어울릴 수 있어도, '나는 어른인가'라는 물음 앞에서는 여전히 머뭇거리게 된다.
2. 어른의 품격
내게는 ‘품격’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생물학적으로 노화가 되었을 때, 법적인 의사표시를 다른 이의 허락 없이도 혼자 할 수 있을 때, 기능적으로 어른의 역할을 할 수 있을 때 어른이 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런 것은 ‘어른’이 아니라, ‘성인’이 되었다고 해도 족하다. 사회의 ‘어른’으로서 뭇 사람들의 인정과 존경을 받는 존재가 되기 위해서는 ‘품격’이 필요하다.
품격(品格)에서 품(品)은 입 구(口)가 세 개 모인 모양이고, 격(格)은 나무 목(木)과 각각 각(各)의 결합이다. '품'은 말이 쌓여 한 사람의 됨됨이를 이루는 과정이고, '격'은 각각의 나무가 자신만의 법도를 세워 서 있는 모양새다. 그러니까 품격이란 살아온 시간만큼 쌓인 언어들이 비겁하지 않고, 나무처럼 꼿꼿하게 지켜낸 원칙이 남부끄럽지 않을 때 비로소 갖출 수 있는 것이다. 즉, 어른의 품격이란 ‘원칙의 언어’를 통해서 드러나는 것이다. 자신이 소중하게 지켜온 옳고 곧은 가치와 원칙을 드러낼 수 있는 말솜씨, 글솜씨가 동시에 갖춰져야 하는 것이다. 그러니 나는 아직 멀어도 한참은 먼 게 맞다.
어른도 아니고 애도 아닌 상태로 쭈뼛쭈뼛 인생의 길목에서 주춤거릴 때, 나는 박주영 판사의 글을 만났다. 그는 냉혹한 법전의 문장을 다루면서, 팽팽한 저울에 추를 올려 끊임없이 정의를 재단해야 하는 고통 속에 있으면서, 타인의 우주를 헤아릴 줄 아는 이였다. 자신의 고통을 감내하면서 다정한 언어를 잃지 않은, 그가 보여주는 ‘원칙’과 ‘언어’를 소개하고 싶다.
필즈상 수상자로 알려진 허준이 수학자는 아름답게 직조된 언어 속에, 단단한 인생의 지혜를 살풋 담아낼 줄 아는 사람이었다. 새로운 여정을 시작하는 사람들에게 건네는 가만한 인사는 어렵지도, 무겁지도 않아서 더더욱 오래 남았다. 타인의 내일을 구할 수 있는 단 하나의 ‘원칙’을 떨리는 ‘언어’로 전달하는 그의 진심은 여운이 길다. 역시 소개하고 싶다.
3. 두 어른의 품격 : 시스템 속의 서정, 타인에 대한 다정, 관성을 경계하는 작정
[1. 시스템 속의 서정]
박주영 판사와 허준이 수학자의 글에는 공통점이 있다. 첫 번째는 인생이라는 비정하고 차가운 시스템 속에 숨은 서정을 읽어낼 수 있는 감수성이다. 법학과 수학이 둘 다 기본적으로 기준과 원칙에 의거한 엄밀한 논증,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필요한 모든 과정을 임의로 배제하거나 추가할 수 없는 다소 경직적인 학문이라는 점을 떠올리면 조금 놀랍다. 감수성이란 심상한 것을 심상치 않게 보는 능력이고, 그러기 위해서는 기준과 원칙보다는 변칙적인 사고의 흐름을 따라가야만 하기 때문이다.
주어인 국가는 드러나지 않는다. 그리움, 후회, 사랑 따위 감정언어의 자리는 물론 정의, 도덕, 선, 악 따위 형이상학적 언어의 자리 역시 없다. 이런 단어는 판결문이라는 성안에 거주할 자격이 없다. 선혈이 낭자하는 판결문에서, 중요하지 않은 모든 단어는 축출의 대상이다. 상징과 은유는 상상할 수도 없다.
문제는 판결을 작성하는 인간이 글의 형식과 일치할 수 없다는 데 있다. 아니, 그 냉혹한 형식과 일치해서는 안 된다. 이 모순적 상황이 판사를 괴롭힌다. 판사는 결코 법이라는 인식의 틀을 닮으면 안 된다. 인식의 틀이 강퍅할수록 인식하는 주체는 다정다감해야 한다. 그것이 기계가 아닌 인간에게 재판을 맡기는 이유다. 판결과 재판이라는 비정한 형식을 빌리고 있지만, 결코 서정을 잃어서는 안 되는 모순적 상황을 이해해야 한다.
박주영 판사, 《어떤 양형이유》 270p
이제 본격적으로 어른입니다.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고 도전하라. 편안하고 안전한 길을 거부하라. 타협하지 말고 자신의 진짜 꿈을 좇아라. 모두 좋은 조언이고 사회의 입장에서는 특히나 유용한 말입니다만, 개인의 입장은 다를 수 있음을 여러분은 이미 고민해 봤습니다. 제로섬 상대평가의 몇 가지 퉁명스러운 기준을 따른다면, 일부만이 예외적으로 성공할 것입니다. 여러 변덕스러운 우연이, 지쳐버린 타인이, 그리고 누구보다 자신이 자신에게 모질게 굴 수 있으니 마음 단단히 먹기 바랍니다. 나는 커서 어떻게 살까, 오래된 질문을 오늘부터의 매일이 대답해줍니다.
허준이 수학자, 《졸업 축사》
박주영 판사는 ‘법’이라는 시스템 안에서 다정다감한 인식을 결코 잃어서는 안 된다고 힘주어 말한다. 허준이 수학자는 ‘사회’라는 시스템 속에서도 자기 자신을 잃지 않기를, 온전한 하루를 잃지 않기를 당부한다. 두 사람은 시스템이 인간을 얼마나 쉽게 파괴할 수 있는지 알고 있지만, 동시에 인간이 얼마나 올곧은지도 알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그들의 목소리는 새되지 않고 힘 있다.
[2. 타인에 대한 다정]
좋은 어른의 두 번째 조건은 타인에 대한 다정이다. 자신의 빛나는 업적을 자랑하면서, 권위가 주는 무게감에 심취하면서 자기 존재에게만 다정한 것이 아니라, 타인이 겪은 어제와 현재의 고통에 깊게 앓으며 내일의 안녕을 힘껏 빌면서 타인에게 다정하기 위해 애쓰는 것이다.
아이들의 고통을 다시 한번 천천히 읽어봤다. 그 참담한 처지에 압도되어 간과한 것이 있었다. 바로 세월이었다. 고통의 강도와 슬픔의 크기에만 시선을 뺏겨 켜켜이 쌓인 시간을 보지 못했다는 생각에 정신이 퍼뜩 들었다. 자신의 존재 자체가 모든 사람의 불행이라 여기는 아이들을 무슨 재주로 고작 10분 재판을 통해, 두어 달에 한 번만 남을 통해 변화시킬 수 있단 말인가? 순진하거나 무지하거나, 무책임하거나 교만했다는 생각이 부끄러움과 함께 밀려들었다. 헛바늘 하나 아물고, 서운한 말 한마디조차 잊는 데 시간이 걸리고, 부부 싸움을 화해하기까지에도 며칠은 걸리는 법인데, 시간이 많이 지나도 아픈 기억은 불시에 떠올라 이유 없이 가슴이 막 콩닥거리는데, 그 무수한 상처 때문에 그냥 되는대로 막 살아버리고 싶은 충동이 불쑥불쑥 드는데, 그게 사람인데, 나도 그런데,
이 아이들의 환경은 그때나 지금이나 아무것도 달라진 게 없는데, 재범을 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이상한 일인데... 도대체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지, 하는 자책감
박주영 판사, 《어떤 양형이유》 132p
먼 옛날의 나와, 지금 여기의 나와, 먼 훗날의 나라는 세 명의 완벽히 낯선 사람들을 이런 날들이 엉성하게 이어주고 있습니다. 마무리 짓고 새롭게 시작하는 오늘 졸업식이 그런 날 중 하나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 하루를 여러분과 공유할 수 있어서 무척 기쁩니다.
졸업생 여러분, 오래 준비한 완성을 축하하고, 오늘의 새로운 시작을 축하합니다. 서로에게, 그리고 자신에게 친절하시길, 그리고 그 친절을 먼 미래의 우리에게 잘 전달해 주길 바랍니다. 응원합니다. 축하합니다. 감사합니다.
허준이 수학자, 《졸업 축사》
박주영 판사는 기록 뒤에 숨겨진 '사람의 고통'을 놓치지 않으려 애쓴다. 자신의 '무지함과 교만함'을 고백한다. 고작 10분의 재판으로 누군가의 삶을 바꿀 수 있다고 믿었던 오만을 버리고, 그들의 고통 뒤에 켜켜이 쌓인 '세월'의 무게를 읽어내기 시작한 것이다. 나도 아파봤기에, 나도 서운한 말 한마디 잊는 데 며칠이 걸리는 '사람'이기에 타인의 상처 앞에서 함부로 속도를 강요하지 않는 것. 그것이 그가 보여주는 다정의 실체다.
허준이 수학자 역시 다정의 화살표를 시공간 너머로 확장한다. 그는 과거의 나, 현재의 나, 그리고 먼 미래의 나를 '완벽히 낯선 세 사람'으로 정의하면서도, 그들을 엉성하게 이어주는 유일한 끈이 '친절'임을 강조한다. 타인에게 건네는 친절이 결국 미래의 나에게 전달될 선물임을 알기에, 그는 졸업생들에게 서로와 자신에게 친절할 것을 당부한다. 두 어른에게 다정함이란 단순히 '착하게 구는 것'이 아니다. 나와 타인이 모두 연약한 존재임을 인정하고, 그 결핍의 시간을 기꺼이 함께 견뎌주겠다는 단단한 약속이다.
[3. 관성을 경계하는 작정]
마지막으로, 진짜 어른은 '작정'한 사람들이다. 삶은 끊임없이 우리를 지리멸렬한 관성 속으로 밀어 넣는다. 관성은 그럴듯한 안정을 보장하고, 안전한 인생의 궤도를 이탈하지 않도록 돕는다. 그러나 두 사람은 그 지점을 정확히 지적한다.
굴러떨어질 줄 알면서도 끊임없이 바위를 굴려야 하는 숙명은 가혹하지만, 바위 굴리기를 멈추면 시시포스는 바위에 깔려버릴 것이다. 그 순간 그의 실존적 상징적 존재는 사라진다. 시시포스는 바위를 굴릴 때라야만 시시포스다.
김수영 시인은 1968년 부산에서 열린 문학세미나에서 "시작은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고 심장으로 하는 것도 아니고 몸으로 하는 것이다. 온몸으로 하는 것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온몸으로 동시에 밀고 나가는 것이다"라고 했다.
나는 인생도 온몸으로 밀고 나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살아 있는 인간이라면 흙바닥에 널브러져 누워 있지는 않을 것이다. 살아 있는 모든 것이 사멸하듯 우리도 한 줌 흙으로 돌아가겠지만, 그걸 알면서도 바위를 굴리고, 흙바닥을 온몸으로 밀고 나가는 것, 그것이 인생 아닐까.
흙바닥을 뒹굴지라도, 부정과 불의, 협잡과 편견, 전관예우와 유전무죄의 선동이 판치는 아수라 같은 진창에 머물더라도, 결코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정의를 회의하거나 냉소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공동선과 미덕과 하나의 정답이 있다는 사실을 믿어야 한다. 가치의 충돌로 절대가치와 정답이 잘 보이지 않더라도, 섣불리 상대주의나 회의주의의 유혹에 빠져서는 안 된다. 정답으로 채택되지 않은 가치가 정의가 아니라거나 무시해도 좋다는 말이 아니다. 모두 다 소중한 가치이므로 고민할 만한 것이지만, 상대주의나 회의주의에 빠지면 최선의 정의를 찾는 여정을 쉽게 그만둘 가능성이 높다. 그것이 불의의 노림수다.
박주영 판사, 《어떤 양형이유》 259p
취업 준비, 결혼 준비, 육아 교육 승진 은퇴 노후 준비를 거쳐 어디 병원 그럴듯한 일인실에서 사망하기 위한 준비에 산만해지지 않기를 바랍니다. 무례와 혐오와 경쟁과 분열과 비교와 나태와 허무의 달콤함에 길들지 말길, 의미와 무의미의 온갖 폭력을 이겨내고 하루하루를 온전히 경험하길, 그 끝에서 오래 기다리고 있는 낯선 나를 아무 아쉬움 없이 맞이하길 바랍니다.
허준이 수학자, 《졸업 축사》
박주영 판사는 굴러떨어질 것을 알면서도 바위를 밀어 올리는 시시포스의 숙명을 긍정한다. 온몸으로 삶을 밀고 나가는 그 치열한 투쟁이야말로 인간의 실존임을 믿기 때문이다. 그는 진창 같은 현실 속에서도 정의를 회의하거나 냉소하는 것이야말로 '불의의 노림수'라고 경고한다. 정답이 보이지 않더라도 최선의 정의를 찾는 여정을 멈추지 않는 것, 그것이 그가 바위를 굴리는 이유다.
허준이 수학자는 우리가 빠지기 쉬운 '준비하는 삶'의 함정을 지적한다. 취업, 결혼, 육아, 승진을 거쳐 그럴듯한 일인실에서 사망하기 위해 준비하는 과정에 삶을 저당 잡히지 말라고 당부한다. 혐오와 비교, 나태와 허무는 우리를 쉽게 안주하게 만들지만, 어른의 품격은 그 '달콤한 독'을 이겨내고 하루하루를 온전히 경험하는 데서 나온다.
관성대로 살면 처량해지지만, 작정하고 살면 존엄해진다. 두 어른은 우리에게 흙바닥을 뒹굴지라도 결코 냉소의 손을 잡지 말자고, 대신 온몸으로 생의 파동을 밀고 나가자고 제안하고 있다.
어렵다. 품격 있는 어른의 길은 참 어렵다.
그러나 이렇게나마 ‘어른의 품격’을 좇는다면, 어향가지나 먹을 줄 아는 내 입(口)도 언젠가는 품격의 언어, 원칙의 언어를 건넬 수 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