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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햄릿>은 무엇인가
햄릿은 왜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라고 말했을까?
<햄릿>의 저자이자 배우, 극단의 경영주이기도 했던 셰익스피어. 그의 유명한 인물 햄릿. 그는 왜 유명한가? 그는 왜 내가 읽은 여러 소설에서 빈번히 나타났을까?
그 이유를 알아보고자 이 공연, <플레이위드 햄릿>을 보기로 했다. 햄릿이 분명 한 사람인 걸로 알고 있는데 극중인물-네 명이다-모두 이름이 햄릿인 게 심상치 않았지만. 그리고 짬을 내어 극을 보기 전에 햄릿 희곡을 읽어보기로 했다.
햄릿은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라고 말하긴 했으나 그것이 햄릿이 말하고자 한 전부는 아니었다. 5막으로 구성된 희곡 <햄릿>은 복수의 이야기임과 동시에 문학이 점철된 한 편의 시였다. 배반, 분노, 복수, 역사 등 모든 요소가 한바탕하면서 비극으로 뭉쳐지는, 감정이 끓어오르는 극이었다.
이게 어떻게 한정된 공간-무대에서 상연될 수 있을까? 어떻게 이 극의 긴장감을 살리며 독자가 아닌 관객들을 집중하게 할 수 있을까? 물론 긴장감과 집중은 희곡을 ‘읽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느껴지지만, 그것이 어떻게 눈앞에서 ‘살아 움직이는지’ 나는 그 생명 불어넣기의 과정을 꼭 봐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오로지 햄릿을 위한 연극
<햄릿>을 재해석한 <플레이위드 햄릿>은 오로지 햄릿한테 치중한 극이다.
애초에 원작 제목이 <햄릿>이고 주인공도 햄릿인데, 오로지 햄릿한테 치중한다는 게 무슨 말이냐고 할 수 있겠다. 솔직히 말해, 나는 <햄릿>을 읽으면서 햄릿이 내면을 알 수 없는 인물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선왕 햄릿 유령의 말을 듣고 광기를 연기하기로 결심한 뒤, 그가 스스럼없이 왕가를 신랄하게 풍자하는 모습이 워낙 강렬해 그가 주인공인 게 여실히 느껴지긴 하되, 너무나 용감하고 뛰어난 나머지 우리 주변의 평범한 사람으로 보이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플레이위드 햄릿>은 햄릿이 스니커즈와 청바지를 입고서 무려 넷(색깔 명칭으로 배역이 구분되어 있긴 하나, 분장이나 옷차림이 모두 같고, 모두 서로를 햄릿이라 부른다. 내가 본 회차의 경우 다크, 엠버, 그린, 핑크)으로 분해서 나온다. 그래서 햄릿은 더더욱 청년 같다. 그 네 명의 햄릿이 각자 여러 인물의 역할(오필리어, 왕 클로디어스, 왕비 거트루드, 대신 폴로니어스, 레어트스 등)을 맡아 이야기를 진행한다는 점에서 <플레이위드 햄릿>은 햄릿 시점의, 햄릿이 하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은 여러 고난 앞에서 어떻게 행동할지 신중하게 의논하는데, 그 모습은 햄릿의 혼란을 가감 없이 드러낸다. 토론이 끝을 맺지 못할 경우-관객을 햄릿이 유일하게 믿는 친구 호레이쇼로 여기고-네 명의 햄릿이 저마다 관객석에 다가가 고뇌를 끊임없이 중얼거린다. 이런 식의 연출은 관객을 햄릿의 고뇌로 초대하여 극에 몰입하게 만든다.
이뿐만 아니라 기존 서사에 있었던 역사적 배경이라든지 종교적인 측면이라든지 복잡한 암시를 줄임으로써 햄릿이 미쳐가는 과정이 극에서 진하게 드러난다. 오로지 햄릿을 위한 플레이가 여기서 펼쳐지는 것이다.
원작과의 차이
원작을 전날 읽고 갔다 보니 신기한 점이 있었는데 바로 대사였다. 원작의 시적인 대사들을 실제 인물들이 내뱉을 때 나도 모르게 소름이 돋았다. 활자가 살아 숨 쉬는 그 생생함도 있었지만, 원작에서 나오는 낡은 어휘를 현대식 어휘로 바꿔서 그것도 자연스럽게 연출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렇게 바뀌어도 대사들은 힘을 발휘했다. 셰익스피어의 저력이 400년이라는 시간을 건너뛰어 관객들에게 말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렇게 원작과의 차이를 음미하면서 보는 맛이 있었다. 가장 달랐던 점은, 햄릿의 광기를 보여주는 대사들이 원작에서는 장난스럽고 풍자적인 반면에, <플레이위드 햄릿>에서는 햄릿의 고뇌로 비치며, 햄릿이 연기가 아니라 실제로 미쳐가는 것으로 잘 드러났다는 점이었다.
특히 극중극 <쥐덫>을 왕과 왕비에게 보여준 뒤(원작에서는 왕이 극을 중단시키는 데 반해, 여기서는 극을 끝까지 본다는 것도 차이라고 할 수 있다), 햄릿이 왕비를 찾아간 장면, 그리고 어쩌다가 대신 폴로니어스를 죽이는 장면은 압권이었다. 이상한 극을 선보였다며 꾸짖는 왕비로부터 햄릿(햄릿 핑크)이 심리적으로 말려들다가, 아버지의 전화가 울리고서부터(원작에서는 유령이 나타나지만, 이 극에서는 아버지에게 전화가 오는 걸로 대체된다) 마치 광기를 장착했다는 듯이 왕비의 불륜과 배반을 몰아세우는 태도로 변한 게 소름 끼치고 놀라웠다(배우에게 압도되는 느낌을 받았다). 햄릿이 광기를 연기하기로 마음먹었지만, 이젠 정말로 미쳐가고 있다는 걸 보여주어서 인상 깊었다. 그래서 햄릿이 실수로 그 방에 숨어 있던 폴로니어스를 죽이고선 시체를 끌고 나가는 부분, 원작에서는 황당무계한 느낌으로 비친 부분이 극에서는 현실적으로 다가왔다.
연출력
그 밖에도 연출의 재미가 컸다.
네 명의 햄릿이 여러 인물의 역할을 돌아가면서 맡는데, 폭탄 돌리기 놀이하듯 그 인물의 장신구(왕은 지팡이, 오필리어는 하얀 모자)를 가지고 무대 위를 뛰어다니다가 마지막에 잡은 한 명이 그 역할을 한다는 게 재밌었다(그 역할을 또 멋지게 해낸다. 특히 햄릿 다크는 여성의 목소리, 햄릿의 목소리, 왕의 목소리를 분명히 구별해서 낼 줄 아는 연기의 베테랑이었다).
또한 원작에서의 햄릿은 연기에 관심을 보일 만큼 문화적인 재능이 다분한데, 그걸 살려 이번 극에는 햄릿이 피아노와 멜로디언, 기타를 연주하고 팝페라를 부르거나(햄릿 그린) 젬베를 치는 모습(햄릿 엠버)을 보여주어 즐기면서 볼 수 있었다. 빨간 소파를 뒤로 돌리고 검은 천을 덮어씌워 인물의 죽음을 암시하는 장면이나, 여러 인물이 앉곤 하던 흔들의자가 왕 클로디어스를 통해 권위를 상징하는 왕좌와 회개를 상징하는 고해소(무릎을 꿇어)로 기능한다는 점도 놀라웠다. 한 장치가 두 개 이상의 의미를 가질 수 있다는 걸 배웠다.
복수의 끝, 사라진 나
원작에서 가장 아쉬웠던 장면을 꼽자면 마지막 장면, 레어티즈와 햄릿이 칼싸움을 하는 장면이라고 할 수 있다. 원작 자체가 워낙 지문이 적다 보니 행동이 주가 되는 칼싸움 장면이 원작에서는 금세 지나간다. 그런데 극이 그 점을 완전히 보완했다. 젬베를 가지고 칼싸움을 묘사하여 정말 신선하게 긴장감을 끌어올렸다.
그렇게 맞이한 복수의 끝은 결국 파멸이었다. 햄릿은 행동했으나, 실은 행동 당한 게 아닐까? 그가 전화를 받은 건 사실이었을까? 그런 의문은 나 자신이 정말로 내 의지대로 행동하며 살아가고 있는지 질문하게 한다. 죽은 네 햄릿이 자조하듯이 노래하는 에필로그 부분은 그래서 복수가 지나간 뒤의 아무것도 없는 공허함을, 복수에 사용된 인물의 공허한 죽음을 관객들에게, 호레이쇼들에게 보여주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고전이 왜 고전인지 궁금한 사람들에게, <햄릿>이 궁금한 사람에게 <플레이위드 햄릿>을 꼭 추천하고 싶다. 고전이 고전인 이유는 그것이 지금도 살아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마음속에 들어오는 순간, 한 번도 죽은 적이 없다는 듯 살아 움직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