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insight

아트인사이트에게
문화예술은 '소통'입니다.

칼럼·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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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예술은 사치다?


 

주저하지 않고 예술은 사치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말한다. 여유가 없는데 예술을 감상하고 앉아 있을 시간이나 있겠냐고. 그게 밥 먹여주냐고. 그러면서 예술 애호가들을 경멸하고 폄하하기도 한다.


나는 그 말이 지나친 허영과 자기만족, 과대평가와 배척, 우상화를 지적하는 게 아닌 상황에서도 예술이 사치라는 말을 부정하고 싶지 않다. 사치가 없을 때 삶이 더 가혹해진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애초에 아무 사치도 누리지 않고 사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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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사치를 생각할 때마다 전고운 감독의 영화 <소공녀>의 주인공 ‘미소(이솜 배우)’를 떠올리곤 한다. 위스키, 담배, 그리고 남자친구만 있으면 된다며 캐리어를 끌고 가사도우미 일을 하러 다니는, 머리가 하얗게 센 미소가. 미소는 사치란 사치를 죄다 누리고 산다. 영화 속 타인들은 그녀를 한심하게 보고 깔보기까지 하지만, 관객은 미소의 삶을 들여다보며 문득 부럽다는 생각을 하기도 하고, 마지막에 가서는 미소를 응원하게 된다.


만일 사치를 누리지 않는 듯 사는 사람이 있다고 해도, 그 사람에겐 남들 모르게 감추고 있는 자신만의 사치가 분명히 있을 것이다. 그것이 그를 근면성실 하고 인내심 강하고 뚝심 있는 사람, 그러면서도 헌신적인 사람으로 만들어주고 있을 것이다. 저 먼 곳에서 반짝이는 별이 지금 내가 가야 할 길이 되어주는 것처럼, 삶은 삶과 거리가 먼 것들이 모두 있어서 참인 명제다. 사치란 거리가 먼 것들을 일컫는 말이다.


좀 더 길게 말해보자면 사치는 삶의 수위가 낮아질 때 가장 먼저 세상에 드러나 휘발돼 버리기 쉬운 개개인의 높은 것들이다. 물질일 수도 감정일 수도 있다. 삶이 밑바닥을 드러낼 때 제일 먼저 버려질지도 모를, 그 사람에게 숭고한 것들. 예술이 사치라는 말은 예술이야말로 높고 숭고한 영역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삶이 바닥에 내팽개쳐지면, 예술은 잠시 자취를 감추기 쉽다. 탈진해 가는 중에는 저 먼 별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 것처럼.


하지만 고달픈 사람들은 삶이 격변할 때 사력을 다해 사치를 놓아주지 않는다. 그들은 고달파서 사치를, 예술을 더더욱 추구한다. 미소가 삶이 고달파 그 세 가지 사치를 더더욱 놓지 않으려 했던 것처럼. 그래서 더욱 미소다울 수 있었던 것처럼. 그들은 그들 답기 위해 예술이란 사치를 놓지 않는다. 그런 사람들을 예술가라고 부른다.


내가 최근에 본 세 편의 영화는 예술이 사치인가 아닌가에 대한 논쟁보다 더 근본적인 질문 ‘예술이 삶을 구원할 수 있을까’에 대한 문제를 다루고 있었다. 사치든 아니든, 그 모든 것은 ‘내 삶을 위한 거’라는 전제가 깔려 있다. 그런데 정말 내 삶을 ‘위해’줄까? 영화 속 인물들은 예술가의 길을 가면서 그 문제를 정면으로 마주한다.

 

 

 

센티멘탈 밸류 – ‘너’의 이야기와 ‘나’의 이야기가 ‘우리’의 이야기가 되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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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의 감독 ‘요아킴 트리에’의 신작 <센티멘탈 밸류>는 가족 간의 갈등을 예술로 화해, 봉합하는 작품이다. 영화의 오프닝에는 주인공 가족이 사는 집을 비추며 ‘노라’가 학생 시절 쓴 에세이를 토대로 집의 역사를 읊는 노년 여성의 내레이션이 깔린다. 6대가 살았던 그 집은 그 시간만큼의 ‘상처’가 벤 공간이기도 하다. 그 상처를 비춰주기라도 하듯, 평화롭던 집에 부부 싸움 소리가 깔린다.


현재 노라(레나테 레인스베 배우)는 연극배우로 활동 중이다. 하지만 무대공포증이 심해 무대로 나가길 몇 번이고 망설인다. 스태프가 도와 막상 무대로 나가게 되면 연기를 훌륭하게 해내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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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노라가 가정을 이룬 여동생 ‘아그네스(잉가 입스도테르 릴레오스 배우)’와 함께 집에서 어머니 ‘세실’의 추도식을 하던 날, 오래전에 집을 떠났던 아버지 ‘구스타브(스텔란 스카스가드 배우)’가 갑자기 돌아오면서 그들 가족의 묵은 갈등을 서서히 드러내기 시작한다.


거장 영화감독인 구스타브는 그 긴 시간 떠난 것에 대한 일언반구 없이, 딸 노라에게 너를 위해 썼다며 신작 영화의 주연을 제안한다. 어린 시절 가족들을 두고 떠나버린 아버지를 이해할 수가 없었던 노라는 그 제안을 단칼에 거절한다(노라가 연극계에서만 활동했던 사실도 그 거절의 이유로 담겨져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고는 왜 자기 연극을 보러 오지 않느냐 묻자 구스타브는 연극이 배우의 눈빛도 볼 수 없고 클로즈업도 볼 수 없기 때문에 싫어한다고 대답한다. 오래 묵어 잠잠해진 듯했던 갈등은 그들이 종사하는 예술이 서로 대치하는 것처럼 깊어져 간다.


구스타브는 파리에서 열린 자신의 회고전에서 오래전 아그네스와 함께 찍은 영화를 감명 깊게 봤다는 할리우드 배우 ‘레이첼(앨 패닝 배우)’을 만난다. 그날 밤 해안가에서 레이첼과 긴 대화를 나눈 구스타브는 그녀에게 신작 주연을 제안하고 레이첼은 이를 기쁘게 수락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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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영화는 바로 구스타브가 오래전 떠났으나 여전히 그의 명의인 그 집에서 일어나는 이야기다. 구스타브는 레이첼과 관계자들을 데리고 그 집에 자주 들르게 되는데, 그 집을 정리하던 노라는 그를 보지 않으려고 피한다. 아버지와 대화를 나누곤 했던 아그네스는 이 모든 상황을 살피면서 그들 갈등의 전모를 더듬는다.


그렇게 갈라지는 부녀 사이지만 예술에 인생을 내건 그 두 사람은 상당히 닮았다.


노라는 아버지가 떠난 것에 대한 배신감 때문에 왜 그들을 떠났는지 깊게 생각해 본 적이 없는 듯하다. 심리상담가였던 어머니 세실한테서 그에 관한 이야기를 들은 적도 없는 듯하다. 아그네스 집에서의 저녁 식사 자리에서는 구스타브 앞에서 그를 비난해서 분위기를 어색하게 만들기도 한다. 구스타브는 자기만의 생각에 빠져 있다. 노라나 아그네스에게 자신이 돌연 떠났던 것에 대한 변명도 사과도 하지 않는다. 아그네스의 아홉 살 아들인 ‘에리크’에게 사랑을 알 수 있을 거라며 선물로 준 영화 DVD는 아이가 이해할 수 없는 고전 영화다.


배우자가 있는 동료와 바람을 피우면서 사랑을 찾아 헤매던 노라는 그에게 배신당하며 점점 망가져 간다. 무대에 오르는 것조차 힘겨워해 나중에는 공연을 취소하고 잠적해 버린다. 구스타브는 오랜만에 영화를 찍기로 하고 일을 추진하지만, 거대 자본인 넷플릭스와의 마찰을 겪고 오래전부터 함께하던 동료들이 노쇠했음을 알아차리며 자신이 원하는 촬영 환경을 만들기가 어렵다는 사실을, 그걸 넘어 자신의 전성기가 끝났고 이제 꼼짝없이 늙어가고 있음을 깨닫는다. 한밤중에 노라에게 전화를 걸어 이야기를 하려 하지만 노라는 끊어버린다. 각자 삶에 찾아온 고난이, 그동안 자신만의 예술로 도피해 있던 그들에게, 그래서 그 분야의 경지에 오른 그들에게 이제 그것도 한계에 봉착했음을 알려준다. 그 사치가, 그 예술이 삶을 도외시하고 있었던 사실이 드러나 버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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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둘의 균열은 다른 사람에게도 퍼져나간다. 어린 시절 아버지의 영화에 출연했지만 아버지에게 버림받아 노라와 마찬가지로 상처를 안고 있었던 아그네스는 구스타브가 신작의 아들 역할로 에리크를 캐스팅하려고 하자 과거의 기억을 떠올리며 거절해 버린다. 구스타브의 신작 영화 주연을 맡은 레이첼은 그의 집에 앉아 구스타브 앞에서 젊은 엄마의 대사를 연습하고 또 연습하지만 감정에 몰입할 수가 없다. 학교 가는 아이를 배웅해 주고 집에서 목을 매는, 자신이 연기해야 하는 그 엄마를 이해할 수가 없는 것이다. 부담감을 느끼던 레이첼은 급기야 노라를 찾아가 그 이야기를 전하며 자신은 이 역할을 할 수가 없다고 고백하고, 구스타브에게도 이 사실을 밝힌다. 구스타브는 레이첼의 마음을 이해하고 그녀를 보내준다(한 사람을 치열하게 이해해 보려다 실패하는 순간, 솔직하게 포기를 선택하는 레이첼의 모습이 인상적이다).


노라도, 노라의 연극배우로서의 삶도, 구스타브도, 구스타브의 영화감독으로서의 삶도 중단된 그 시점에 아그네스가 주도적인 역할을 하기 시작한다. 구스타브가 한번 훑어나 보라고 집에 두고 간 시나리오를 읽기 시작한 아그네스는 그 시나리오가 구스타브의 어머니 ‘카린’의 이야기라는 걸 알게 되고, 도서관에 찾아가(아그네스는 역사학자기도 하다) 레지스탕스 활동을 이유로 나치에게 잡혀가 고문당했던 카린의 기록을 읽으며(그 후 어린 아들을 두고 자살했던 개인사도 더불어 생각하며) 구스타브가 왜 노라에게 이 역할을 주려 했는지를 알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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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센티멘탈 밸류>의 압권은 잠적하고 있던 노라를 찾아간 아그네스가 구스타브의 시나리오를 읽어보라고 건네주고, 시나리오를 읽고 구스타브가 어떻게 자기를 이렇게 잘 알고 있었나 싶을 정도로 놀란 노라가 아그네스와 지친 듯 침대에 누워 대화를 나누는 부분이다. 노라는 문득 지금 자신을 정신 차리게 해준 아그네스가 자신과 같은 환경에서 자랐음에도 불구하고 망가지지 않고 가정도 꾸리고 안정적인 삶을 살고 있는 것이 신기하다. 그러자 아그네스는 언니가 있었잖아, 라고 답한다. 언니가 자신을 챙겨주며 집의 중심이 되어주었던 사실을, 지금 이 망가져 가는 가족 관계를 붙듦으로써 새로운 중심이 된 아그네스가 상기시킨다.


그렇게 하여 노라와 에리크는 그 영화에 출연하지만, 그 슬픈 결말은 수정된다. 젊은 엄마는 아이를 배웅해 주고 나서 목을 매달지 않는다. 문을 닫은 채로 구스타브의 영화촬영은 끝이 난다.


각자의 이야기에 살며 각자의 장르에 갇혀버린 이들이 서로를 이해해 보려던 마음을 뒤늦게 확인하고 다시금 연결되는 이야기. 거기서 찾아내는 ‘감상적 가치’. 구원이라는 단어에 담긴 무게감이 이들의 관계 회복에 어울린다. 그런 한편 나는 세실의 삶이 궁금해지고, 이해의 무게가 아버지의 시나리오에만 쏠려 있는 게 아쉽다는 마음도 생긴다. 아버지가 노라의 연극을 보러 간 장면이 있었다면, 아버지와 노라가 대면하여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 더 있었다면 어땠을까도 생각해 보게 된다.

 

 

 

국보 – 예술의 독단과 고투, 그리고 고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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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서 천만 관객을 돌파했다는 ‘이상일’ 감독의 신작 <국보>는 ‘요시다 슈이치’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구원의 어두운 측면에 치중한 영화다.


영화는 예술에 바쳐지는 삶을-두 인물의 50여 년의 삶을 통해-풍부하게 드러낸다. 야쿠자 타치바나 조직 두목의 아들로 가부키 연극에 재능을 보였던 ‘타치바나 키쿠오(아역. 쿠로카와 소야 배우)’는 상대측 조직원의 습격으로 아버지를 잃고 한순간에 고아가 된다. 그 후 시간이 지나 키쿠오는 등에 수리부엉이 문신을 새긴 뒤 복수를 감행하지만 실패한다. 그런 그를 간사이 가부키 명문가의 당주이자 키쿠오의 아버지가 살해된 그날 송년회 귀빈으로 초대되어 키쿠오의 ‘온나가타(가부키 속 여성 역할 전문 배우)’ 연기를 감명 깊게 보았던 ‘하나이 한지로(아역. 와타나베 켄 배우)’가 거둔다. 한지로는 키쿠오를 자기 아들이자 후계자인 ‘오가키 슌스케(아역. 코시야마 케이타츠 배우)’와 같이 가부키 수련을 하게 한다. 라이벌이자 사이 좋은 친구로 자라던 둘은 인간 국보이자 당대 제일 온나가타인 ‘오노가와 만키쿠’(다나카 민 배우)의 ‘백로 아가씨’ 공연을 보고 깊은 감명을 받아 연기에 매진하며, 가부키 회사 사장의 후원 아래 가부키계에서 ‘토한’ 콤비로 유명세를 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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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흐른 어느 날, 성인이 된 키쿠오(요시자와 료 배우)와 슌스케(요코하마 류세이)는 한지로가 연극을 앞두고 사고를 당해 입원했다는 소식을 듣고 병원으로 달려간다. 크게 다친 건 아니지만 연극에 나설 수 없게 된 한지로는 대역으로 아들 슌스케가 아니라 키쿠오를 지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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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보>의 압권은 그 극을 앞두고 키쿠오가 분장을 하고 있을 때다. 평소에는 슌스케와 티격태격 장난치며 분장하던 그는 이번엔 혼자 분장을 하면서 긴장해 몸을 떤다. 아버지의 대역이 되지 못해 내심 속상할 테지만 축하해주러 대기실에 찾아온 슌스케가 그의 분장을 도와줄 때 불안에 떨던 키쿠오가 말한다.


“내가 지금 제일 필요한 건 네 피야. 내겐 나를 지켜줄 피가 없어. 네 피를 컵에 담아 벌컥벌컥 마시고 싶어.”


연극이 시작되자 불안은 역전된다. 객석에 앉아 있던 슌스케는 자신이 결코 따라잡을 수 없는 재능을 펼쳐 보이는 키쿠오를 바라보다 감정을 억제하지 못하고 밖으로 뛰쳐나간다. 그때 같이 연극을 보던 ‘후쿠다 하루에(타카하타 미츠키)’, 키쿠오의 오랜 연인이었으나 그와의 관계가 소홀해진 그녀가 슌스케와 같이 도망친다.


하루에와 함께 잠적한 슌스케는 그 후로 오랫동안 소식이 없어 가부키계에서 암묵적으로 퇴출된다. 반면 키쿠오는 혼자 착실히 가부키 연기를 해가며 명예를 독식한다. 그가 일전에 피에 대한 욕망을 드러냈듯이 지금의 그는 예술을 추구하는 욕망에 사로잡힌 상태다. 그는 어릴 적 만난 게이샤 ‘후지코마(미카미 아이 배우)’ 아래 딸 ‘아야노’까지 두고 있지만 명예가 훼손될까 그들을 없는 가족 셈 친다. 그는 딸과 길을 걷다 말곤 조그만 사당에서 악마에게 다른 건 필요 없으니 최고의 가부키 배우가 되게 해달라고 거래의 기도를 올리며 예술에 대한 욕망을 가감 없이 드러낸다.


그 기도 덕일까, 그는 혈연이 아닌데도 이례적으로 한지로의 예명을 물려받는 의식을 치르게 된다. 그러나 물려받는 기념 공연에서 한지로가 각혈하며 쓰러진다. 그 후 슌스케가 돌아와 가부키계에서 다시 이름을 알리기 시작하고, 이렇게 슌스케가 회복하자 키쿠오의 역경이 시작된다. 스캔들(야쿠자 아들, 등의 수리부엉이 문신, 게이샤와의 관계에서 태어난 사생아 등)이 터지고, 병상에 있던 한지로가 세상을 뜨면서 키쿠오는 자신이 가문의 명예에 먹칠을 했다며 절망하고, 화해의 손길을 내미는 슌스케와 흉악한 속마음을 드러내며 다툰다. 그리하여 가부키계를 떠나 자기를 짝사랑하는 ‘아키코(모리 나나 배우)’와 여기저기 떠돌며 작은 공연을 해나가지만, 사람들에게 난폭하게 무시당하면서 키쿠오의 절망이 극에 달하자 인내심이 한계에 달한 아키코는 그를 떠나고 만다.


그때 인간 국보였던 만키쿠가 키쿠오를 요양원으로 불러내 국보의 삶의 말미가 어떤지를 보여주며 그를 인정해 주고, 슌스케가 키쿠오에게 했던 약속, 다시금 너를 무대 위로 올릴 거야라는 약속이 다시 실현되면서 키쿠오는 다시 자리를 잡게 된다. 슌스케와 키쿠오가 17년 전의 그때처럼 ‘토한’ 콤비로서 공연을 올리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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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쯤에서 영화가 우정을 보여주는 영화라고 생각했다. 두 라이벌이 자신의 욕망이 실현되지 못하는 현실의 벽 앞에서 좌절하고 헤매다 절망의 끝을 달리고선 끝내 화합한다고. 하지만 영화는 이때부터 삶을 지배하는 시간의 가속도를 무섭게 끌어올리기 시작한다. 한지로가 키쿠와의 공연 중에 각혈을 하고 쓰러진 것처럼, 슌스케가 키쿠오와의 합동 공연 중에 당뇨로 인해 괴사되고 있던 발의 통증으로 인해 쓰러져 무대에 키쿠오 혼자 남게 되었기 때문이다.


마흔다섯에 이른 키쿠오가 한쪽 다리를 절단하고 의족 생활을 하는 슌스케와 마지막으로 합동 공연을 치르는 장면을 보노라면 삶이 제물로 바쳐진 예술의 경지를 보고 있는 듯 느껴진다. 그 공연은 바로 슌스케가 버티지 못하고 나간 공연, 키쿠오가 아버지 한지로의 대역을 했던 바로 그 공연이다. 무사히 끝까지 같이 하지만, 그들은 완전히 지쳐버린다. 보는 나조차도 탈진할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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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또 시간을 건너뛰어 2014년 64세에 인간 국보가 된 키쿠오가 과거 만키쿠가 열연했던 극 ‘백로 아가씨’를 공연하는 장면으로 끝을 맺는다. 그 전에 키쿠오의 인터뷰 장면이 등장하는데 인터뷰 사진을 찍는 사람이 공교롭게도 그의 사생아 아야코다. 아야코는 이 경지에 다다르기까지 수많은 사람들을 희생시킨 그를 비난하면서도 악마에게 감사해하라며, 그가 최고의 가부키 배우가 되었다고 평가한다. 국보가 된 키쿠오는 무대에서 백로 아가씨 연기를 선보이며, 만키쿠의 연기를 볼 때 봤던 그 잔상, 칼을 뽑아 든 아버지를 향해 총이 발포될 때 터져나간 불꽃과 하늘하늘 내리던 눈의 풍경을 지금 눈앞에서 보고 있다고 생각한다.


영화 <국보>는 가부키극과 삶을 오가며 반복 변주되는 것들(각 공연의 특징, 배우와 관객의 차이를 포함해서)을 성실히 보여줌으로써 오랜 시간을 거쳐야만 달성되는 예술의 경지를, 수많은 이기심, 욕망까지 포함해서 가감 없이 드러내고 있다. 예술이 한 사람의 삶을 구원하기는 했지만, 그 삶을 지탱할 수 있게 도와주고 범위를 넓혀줄 주변을 전부 망가뜨린 게 여실히 보인다. <센티멘탈 밸류>에서는 예술로 도피한 이들이 삶을 외면해버리기 직전에 다시 삶을 바라보기 시작해서 회복이 이뤄질 수 있었다면, <국보>는 예술이 삶을 처음부터 끝까지 철저히 도외시하여 끝내 삶을 집어삼켜 버렸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예술은 사치라는 말의 암(暗)을 보여주는 영화다.

 

 

 

햄넷 – 예술과 삶이 바치는 애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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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로이 자오’ 감독의 영화 <햄넷>은 셰익스피어의 비극 <햄릿>을 연상시키는 제목의 영화로, ‘매기 오패럴’의 소설 <햄닛>이 원작이다. 16~17세기 사람으로 삶이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셰익스피어의 삶에서 몇 가지 단서(그의 쌍둥이 아들 이름이 햄넷이었고, 그 아이가 일찍 죽었고 그 후에 햄릿이 상연되었다는 점, 그 당시 기록에는 햄릿과 햄넷이 혼용되었다는 점)를 가지고 소설화, 그리고 영화화한 것이다. 제목 자체도 그렇고 영화의 첫 순간을 보노라면 주인공이 윌리엄 셰익스피어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주인공은 그의 아내 ‘아녜스(실제 이름은 ‘앤 해서웨이’다. 제시 버클리 배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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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의 나무둥치 아래에서 웅크린 채 나타난 아녜스는 마치 그 숲에서 태어난 존재 같다. 매를 데리고 숲을 쏘다니는 그녀는 상대의 손을 마주 잡으면 무언가를 볼 줄 알고, 어린 시절 어머니로부터 배워 해박한 약초에 관한 지식 때문에 마녀라는 오해를 받지만 딱히 신경 쓰지 않고 살아 간다. 이처럼 그녀는 얼마간 영적인 인물로 그려진다. 그러다 아녜스가 사는 마을에 라틴어 교사 ‘윌리엄(폴 메스칼 배우)’가 찾아오고, 그 둘이 만나 사랑에 빠지고, 결혼하여 가정을 이루게 된다. 순탄하다.


그 뒤에 이어지는 이야기가 이 영화가 진정으로 보여주고 싶은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셰익스피어의 희곡 속의 위엄 서린 대사가 언어예술의 힘을 여실히 보여주는 것처럼, 영화는 그 후부터 말이 씨가 되어 인물들의 삶에 영향을 발휘하는 순간들을 빈번하게 보여준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윌리엄을 경계하던 아녜스가 윌리엄한테서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 신화 이야기를 듣고선 감동하여 그와 함께하기로 결심했었기에, 언어의 힘이 영화 전반에 깔린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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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은 아녜스를 만나기 전부터 극을 쓰고 있었지만(책상에 앉아 펜으로 뭔갈 끄적이며 <로미오와 줄리엣>의 대사를 중얼거리는 장면이 있다) 생계유지가 어려워 교사나 아버지한테 배운 가죽 장갑 제작 일을 하고 있었다. 아녜스가 숲으로 가서 첫째 딸 ‘수재나(보디 래이 브레스내치 배우)’를 낳고서부터 그는 가장으로서의 책임과 극작 사이에서 극도로 갈등하기 시작한다. 그를 위하고자 했던 아녜스는 그가 극작에 집중할 수 있도록 런던에 보낸다. 그가 떠나기 전에 둘째를 임신한 아녜스를 걱정하자 그녀는 나는 두 아이의 배웅 아래서 죽을 거라고 당당하게 말하며 그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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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떠난 후 배가 불러오고 진통이 시작된다. 하지만 장모가 나서서 아녜스가 숲으로 가는 걸 막는다. 홍수 때문에 갈 수가 없게 된 것이다. 결국 집에서 진통 끝에 남자아이를 낳는데, 이상하다. 통증이 끝나지 않는다. 아무래도 쌍둥이인 거 같다. 여기서부터 아녜스와 관객은 불안감에 휩싸이게 된다. 이미 두 아이가 됐는데 한 아이가 더 있다니. 그러면 아녜스가 이 나머지 쌍둥이 아이를 낳는 도중 죽게 되는 건가. 제발 그러지 않았으면, 그 말이 틀렸으면, 하고 관객은 기도하게 된다.


그녀는 진통 끝에 딸아이를 출산한다. 하지만 이번엔 아이가 울지를 않는다. 그녀의 예언이 이렇게 잔인하게 들어맞는다니. 무서울 지경이다. 보모가 아이가 죽은 거라 판단해 데려가려 하자 아녜스는 발악하며 자기 품에 안기도록 한다. 그런 다음 갖은 애를 쓰며 새로운 다짐, 너만은 절대 살릴 거라는 다짐을 하여 결국 아이를 살려내고야 만다. 새로운 말이 씨가 된 것이다.


윌리엄, 아녜스, 수재나, 쌍둥이 아들 ‘햄넷(자코비 주프 배우)’, 쌍둥이 딸 ‘주디스(올리비아 라인스 배우)’ 다섯 사람은 행복한 시절을 보낸다. 주디스가 몸이 허약한 것 말고는 걱정이 없다. 윌리엄은 가장임에도 극작 일로 자주 자리를 비우게 되는 것에 대한 부채감 때문에 아들 햄넷에게 가족을 지켜달라고 부탁하며 햄넷에게 용기를 심어주려고 노력한다. 햄넷은 자기에게 주어진 역할을 충실히 이행하겠다고 다짐한다.


윌리엄이 다시 런던으로 가고 얼마 가지 않아, 주디스가 병을 앓기 시작한다. 그런데 좀 심하다. 약초에 능한 아녜스가 무슨 수를 써도 낫지 않는다. 이를 지켜보던 햄넷은 아버지의 말을 상기하며 주디스를 지키기 위해 갖은 애를 쓰기 시작한다. 주디스에게 계속 말을 걸고, 주디스와 자리를 바꿔 누우기까지 하며 주디스 대신 자기를 데려가라고 중얼거린다.


그리고 그 말은 씨가 된다.


다음 날 주디스는 깨끗하게 낫지만, 건강하던 햄넷이 주디스가 앓던 것보다 훨씬 심하게 앓기 시작한다. 역시나 어떤 수를 써도 통하지 않는다. 영화는 검은 천에 가려진 듯한 렌즈로 햄넷과, 그의 뒤에, 마치 아녜스가 첫 등장했을 때 있었던 그 나무둥치의 구멍처럼 구멍 뚫린 무대를 보여주면서 햄넷이 처한 내면 풍경을 보여준다. 무대 뒤편의 구멍을 알아챈 햄넷의 눈빛에는 불안, 결단과 망설임 등이 섞여 있는 것만 같다. 하지만 자신이 한 말을 지키고자 햄넷은 그 운명을 향해 당당히 걸어간다. 너무, 너무 어리고, 무엇보다 그 등이 무척 외로워 보이는데, 혼자 그렇게 가게 둬도 되는 걸까. 그 누구도 그를 붙잡지도, 그가 가는 걸 지켜보지도 못한단 말인가.


그렇게 햄넷이 숨을 거두자 아녜스는 그 어느 때보다 크게 오열한다(아녜스가 주디스에게만 지키겠다는 약속의 말을 했었다는 게 순간 상기되면서 그녀의 슬픔이 더욱 묵직하게 와닿는다). 주디스가 아프다는 소식을 듣고 런던에서부터 급하게 달려왔다가 햄넷이 죽게 된 걸 본 윌리엄 또한 이 사실을 받아들일 수가 없다.


하지만 윌리엄은 다시 런던으로 가봐야 한다. 작품을 위해서. 시간이 지나고 그가 다시 돌아오지만, 아녜스는 햄넷이 죽을 때 윌리엄이 곁에 없었다는 이유로 그를 용서하지 않는다. 어쩔 수 없었던 상황임에도 아녜스의 심정이 이해가 가는 대목이다. 아녜스는 그가 런던에서 일하며 모은 돈으로 스트랫퍼드에서 가장 좋은 집에 이사 가자고 제안하자 그게 맞냐고 따져 묻는다. 아들의 죽음이 마음속에 응어리져 있던 상황이었기 때문에 아녜스에게는 윌리엄의 제안이 바보 같은 소리로 들린다. 그녀는 윌리엄의 손을 잡아보지만 무엇도 볼 수가 없다. 윌리엄은 이런 아녜스의 심정을 알 텐데도 뭐라 제대로 말하지 못한다. 윌리엄은 다시 런던에 간다. 아녜스와 윌리엄의 오래간 돈독했던 관계가 이런 식으로 무너지게 되는 걸까.

 

 

무대 만지는 윌리엄.jpg


 

아녜스가 보낸 슬픔의 시간을 꾸준히 응시하던 영화는 윌리엄이 런던에서 공연한다는 걸 알게 된 아녜스가 동생과 함께 런던으로 건너가면서부터 영화에 그동안 비치지 않은, 윌리엄이 보냈을 시간과 그만의 애도를 보여주기 시작한다.


아녜스는 공연 이름이 <햄릿>이라는 걸 알았을 때 분노했다. 아들이 죽었는데 그걸 소재로 쓴 것 같아서. 화가 난 그녀는 극장에 들어서서는 맨 앞으로 가서 무대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기가 막힌 듯이 지켜보고 소리를 질러 다른 관객들로부터 원성을 사기도 한다. 뒤에 서 있던 동생 ‘바솔로뮤(조 알윈 배우)’가 말리기는 하지만 그도 아녜스의 심정을 모르는 바가 아니다.


하지만 윌리엄이 선왕 햄릿의 유령으로 무대에 등장해서는 왕자 햄릿에게 슬픔을 표하는 걸 보면서, 아녜스는 윌리엄이 아들 햄넷과 그 자신의 위치를 바꿨다고 생각하고는 비로소 극을 집중해서 보기 시작한다(반면 아내를 보고 퇴장한 윌리엄은 무대 뒤편 대기실에서 혼자 눈물을 쏟는다).

 

 

공연 보는 아녜스.jpg


 

비극 <햄릿>은 선왕을 시해한 음모와 연관된 모두가 죽은 뒤 햄릿이 가장 마지막으로 죽으면서 끝이 난다. 혼자 남은 햄릿(역할의 배우)이 온몸에 퍼지는 독에 고통스러워하며 쓰러져 무대 앞으로 공허하게 손을 내뻗는 그때, 관객인 아녜스가 바로 그 앞에서 햄릿을 향해 손을 내민다. 건너갈 수 없는 세계를 건너가고 싶은 무의식적인 바람에서 내민 손. 그 손에 담긴 애도의 심정을 느끼지 못할 관객은 없을 것이다.


그걸 목격한 극장 관객들이 그녀를 말리는 대신 일제히 아녜스를 따라서 햄릿을 향해 손을 내미는 대목은 눈물을 감추기 어려운 압권의 장면이다. 햄릿(역할의 배우)도 그 응원에 힘입어 더욱 열연하면서 홀로 맞이하는 죽음이 그럼에도 외롭지 않음을 보여준다. 무대 뒤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던 윌리엄의 표정이 확연하게 변한다. 그리고 이제 훤히 보이는 듯하다. 삶에서 홀로 퇴장하는 아들 햄넷을 무대 밖의 무수한 사람들이 지켜보고 있는 모습이. 벗어날 수 없는 죄책감 속에서 만든 이 애도의 극이 아녜스의 손짓으로 완성되었음이.


이 영화는 고대 디오니소스 극장에서부터 있었던 ‘카타르시스’, 감정의 정화가 정확히 어떤 건지 몸소 깨닫게 해준다. 아녜스의 고통과 외로움을 지켜보았던 우리는, 죽음으로 먼저 건너갔던 햄넷에게 사무치는 마음을 느끼던 우리는 무대 위 비극을 보면서 묵은 감정을 씻어내리게 된다. 죽음이 침묵할 때 삶은 죽음을 아우르는 더 큰 말을 한다. 그 말이 우리를 위로한다. 그 말이 저쪽으로 건너간 이들을 제대로 기억하게 하고 이쪽의 우리를 다시 살아가게 해준다. 이런 게 구원이 아닐까. 어떤 일이 있어도 결국 삶을 향하게 하는 것. 삶이란 명제를 긍정하게 하는 것. 그것도 사력을 다해.

 


 

삶을 긍정하기


 

삶을 무너뜨리는 건 실패가 아니라 이별, 죽음처럼 돌이킬 수 없는 실패다. 서로를 잔인하게 타인으로 선을 긋는 그 경계. 우리는 그 경계를 넘을 수 없어서 무너진다. 때론 그 경계를 외면하고 다른 곳을 보려고도 한다. <센티멘탈 밸류>의 노라와 구스타브가 오랜 시간 그랬고, <국보>의 키쿠오는 그런 삶을 살았으며, <햄넷>의 아녜스나 윌리엄도 그만 그럴 뻔했다. 다시 그 경계를 응시하느냐 응시하지 않느냐, 그러는 데에 얼마나 걸렸느냐에 따라 그들에게 제각기 다른 구원이 찾아왔다.


긍정은 그런 부정적인 경계를 응시할 때 가능한 것 같다. 그 경계란 노라의 집에 난 균열이다. 키쿠오의 등에 그려진 문신이다. 햄넷이 망설이다 들어간 그 구멍이다.


예술은 상처의 섬세한 기록이다. 삶에는 그런 사치가 필요하다. 상처를 외면하지 않을 때 예술은 모두가 바라 마지않는 삶을 선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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