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와 춘천에 위치한 명동에 갔을 때의 기억이다.
춘천의 명동은 서울의 명동을 축소해 놓은 것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서울의 명동이 그렇듯 춘천의 명동 또한 번화가이자 유동인구가 많은 곳이다. 이래 선거철이 되면 정치인들은 각 지방의 번화가에 방문해 선거 유세를 한다.
공교롭게도 친구와 명동을 간 그날 그 시각, 그는 명동 인근에서 선거 유세를 펼쳤다. 5060세대와 그 윗세대는 거리를 가득 매웠고 물감통에서 물감이 퍼져나가듯 공간은 순식간에 빨간색으로 물들었다. 후보자는 늘 그렇듯 어퍼컷을 날리며 등장했고 사람들은 환호했다. 동시에 꺼림직한 모양새의 깃발들이 휘날렸다. 그때 문득 대통령 후보 유세장 치고는 굉장히 구시대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얼마 뒤, 그는 대통령이 되었고 민주주의는 후퇴했다.
우리가 뽑은 대통령은 국민에게 총칼을 들이밀었다. 이 사실은 그 어떤 핑계와 이유로도 정당화될 수 없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고 말하는 건 사람을 죽여놓고 죽을 짓을 했으니까 죽였다고 말하는 것과 다름없다. ‘계엄령이 정당하다’는 말이 단지 수치상이 아닌 주변 사람들의 입을 타고 나왔을 때, 또 지하철 옆 사람이 극우 유튜브를 보며 웃음 짓고 있는 얼굴을 봤을 때, 나치즘과 파시즘은 결코 과거의 일만이 아닐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4.3 사건, 5.18 민주화운동, 그리고 지금에 이르기까지. 정치적 반대자, 정권에 저항하는 세력을 종북, 빨갱이로 규정하는 구시대적인 이데올로기는 여전히 수많은 사람들을 매료시키고 있다. 탄핵반대 집회 인원 중 2030 남성의 비율이 높은 것을 봤을 때, 종북 이데올로기는 앞으로도 한국 사회에 꾸준히 등장할 것으로 보인다.
과학기술이 발전할수록 진실과 사실은 거짓에 묻히기 쉽다. AI 기술은 존재하지 않는 사람의 형상을 만들어주거나 죽은 사람의 목소리까지 복원해 살아있는 것처럼 만들어주는 단계까지 발전했다. 어떤 유튜브 영상들은 순전히 AI 기술로만 만들어지기도 한다. 이런 시대일수록 특정 문제에 대해 최대한 객관적으로 접근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정보를 얻는 수단인 유튜브는 대개 주관적인 시선으로 만든 영상들이 가득하다. 즉, 사실인지 아닌지 알 수 없다. 결국 거짓에 삼켜지지 않기 위해선 누군가가 전하는 정보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보단, 여러 정보를 종합해 보고 스스로 사실관계를 파악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윤석열 지지층, 다시 말해 ‘극단주의자들’에게 그런 건 중요치 않아 보인다. 내가 보는 유튜브만이 정답이고, 언론과 입법부, 사법부, 경찰은 거짓이라고 말한다. 나아가 헌법재판관조차 좌파세력이라고 매도한다.
그렇다면 윤석열 지지자들은 모두 분별력이 없는 사람들일까? 그렇진 않은 것 같다. 한국사를 가르쳐온 전한길 강사도, 그리고 대학에서 ‘사회학’을 배우며 늘 우수한 성적을 받던 나의 지인도 분명 명석한 사람들이다. 결국 잘못된 신념에 빠져드는 것은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는 것이다. 마치 히틀러가 국민투표에서 88.1%의 찬성 표로 당선된 것처럼. 유대인은 악마라는 나치의 거짓 선전을 많은 사람들이 사실로 믿었던 것처럼.
사회심리학자 김태형은 <그들은 왜 극단적일까>라는 책에서 극단주의를 ‘광신에 사로잡혀 세상을 배타적으로 대하고 자신의 믿음을 타인들에게 강요하는 것’이라고 정의한다. 저자에 따르면 배타성은 자신의 집단을 제외한 나머지를 모두 거부하는 것, 광신은 이성을 잃고 무비판적으로 믿는 망상에 가까운 것이다. 즉, 극단주의자들은 자신의 견해가 절대적으로 옳으며 다른 관점은 있을 수 없다는 식의 망상적 사고방식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배타성, 광신, 강요는 혐오로 이어진다.
그들의 혐오는 자신의 믿음을 거부하는 대상을 향한다. 이는 서부지법 폭동 사태와 같은 일이 단지 우발적이고 일회적인 일이 아님을 시사한다. 극단주의자들은 언제든 자신의 혐오를 행동으로 옮길 가능성을 내재하고 있다. 윤석열이 그러했듯, 결국 극단주의는 폭력을 낳을 뿐이다. 그와 그의 지지자들은 집단적 망상에 빠져 한국의 민주주의를 그늘지게 하고 있다.
극단주의자들은 과거에나 앞으로나 항상 존재할 것이다. 허수아비가 탄핵된다 할지라도 그들은 자신들의 신념을 대신 내세워줄 또다른 '메시아'가 나타나길 기다릴 것이다. 결국 우리는 그들의 그릇된 신념에 빠져들지 않고 조금이라도 더 올바른 것을 볼 수 있도록 부단히 노력해야 한다. 늘 깨어 있어야 한다. 그것이 우리나라가 역사 속에서 겪어온 고통과 슬픔을 반복하지 않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