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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에세이

 

 

실감과 비실감


 

이 글을 쓰는 지금, 밖에는 눈이 내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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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간만의 눈. 이번 겨울에 보는 두 번째 눈인 것 같다. 다행이다. 황량하기 짝이 없는 풍경과 몸을 움츠리게 만드는 싸늘한 추위가 겨울의 전부는 아니구나. 나는 하늘에 나리는 눈을 보며 마치 스노우볼 속의 눈사람처럼 겨울에 놓여있음을 실감하고 있다.

 

그런데 온 감각이 겨울의 실감에 무게가 실리며 기우는 지금 이 순간, 평형을 유지하고 있던, 의식조차 하지 않고 있던 원래의 실감들이 시소의 반대쪽처럼 붕 떠오른다.

 

그러니까 눈이 내리는 지금 이 순간은 겨울을 깨닫는 동시에, 달콤한 꿈처럼 망각의 저편으로 잠겨가던 일주일 전 호주 여행이 현실의 틈바구니 속에서 붕 떠오른 순간인 것이다.

 

겨울의 몽환적인 실감을 맛보면서도 멀리 떨어진-거리로도 시간으로도 마음으로도-비현실을 떠올릴 수 있다는 걸 깨닫고서야, 나는 이제 호주 여행기를 쓸 수 있겠구나 생각한다.

 

 

 

알기도 하고 모르기도 한


 

호주 여행은 뜬금없이 성사된 거지만, 실은 전부터 호주를 가고 싶었다. 대학교 1학년 소설 창작 수업 때 호주 배경으로 소설을 썼기 때문이다.

 

남반구에 섬처럼 고립된 거대한 대륙, 서양이자 계절마저 우리나라랑 정반대인 나라. 이런 이질성, 이국성이 우연히 알게 된 실화와 엮어 나의 상상을 마구마구 부추겼다. 스무 살은 상상만을 가지고도 무언가에 임할 수 있는 나이였다(그게 용인되는 나이라고 하는 게 맞겠다).

 

한 학기 동안 고민에 잠겨 쓰고 고치고 하며 소설을 완성했다. 그땐 만족스러웠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고, 다시 읽을 때마다 한계를 느꼈다. 구체성이 부족하다는 흔한 비판보다도, 호주를 내가 알긴 아는가?하는 근본적인 의문이 싹 텄다. 거기의 풍경은 어떠한가? 마을은 또 어떻고?

 

물론 모르고도 쓸 수 있다. 미국의 인류학자 루스 베네딕트가 일본을 한 번도 가지 않고서도 일본에 대해 분석한 <국화와 칼>이란 책을 썼듯이. 그러나 그것은 엄청난 조사가 선행된 작업이었을 테다. 그에 비해-비교하는 것 자체가 우습지만-나는 터무니없이 부족하고 게을렀다.

 

호주 배경의 소설을 썼지만, 내가 아는 호주란 별거 없었다. 앞에서 언급한 특성들과, 샘해밍턴의 나라, 고기 수출을 많이 하는 나라, 워홀의 나라, 캥거루와 코알라, 쿼카, 에뮤의 나라, 호주 내륙은 사막이며 아웃백이라 불린다는 것 정도. 그래서 언젠가 호주를 가볼 기회가 생긴다면... 하고 작게, 아주 작게 소망했던 것이다.

 

그리고 소망은 뜬금없이 이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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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비


 

2020년대를 통찰하는 인간 분류 기준 십육진법 MBTI에 따르면 나는 계획형이지만, 이상하게 여행 ‘준비’에 있어서는 계획형이 아니다(여행지에 가서 느닷없이 계획형으로 돌변한다). 여행일에 닥쳐서야 벼락치기처럼 준비를 하게 되지만, 이번엔 그런 수고스러움이 적었는데, 패키지 여행이기 때문이었다. 

 

호주를 여행자로 가는 게 아니라 관광객으로 가는 거였다. 나는 그 둘이 엄연히 다르다는 걸 알고 있다. 미지의 상태로 가서 스스로 그 미지를 개척하는 게 여행자라면, 개척된 곳을-그러니까 보여줄 만한 곳, 익히 알려진 곳을-누비는 게 관광객이다.

 

비교적 저렴한 가격인데도 버스를 타고 편안하게 호주의 동부 시드니 명소를 둘러볼 수 있으니 나는 관광객으로 가는 거에 만족했다. 백지에 가까운 미지의 상태로 가서 헤매기만 하고 어떤 소득도 없이 돌아갈 바에야, 가이드를 믿고 개척지를 무작정 따라다니는 것도 괜찮은 선택이라 생각하기도 했다.

 

이번 여행은 여태 가본 해외여행과 많이 달랐다. 계절이 정반대였다. 한국 기온은 영하에 이르는데 호주는 평균 기온이 27도였다. 계절이 반대인 곳으로 간다고 생각하니, 거기서 지낸다고 생각하니 시간 여행을 가는 것처럼 그렇게 낯설 수가 없었다.

 

끈덕지게 붙잡고 놓아주지 않던 여름의 마수-그만큼 괴로웠다-에서 겨우 벗어났는데, 갑자기 그 소굴로 되돌아가게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러나 여름이란 계절은 더위와 습기가 이글거리는 소굴로만 여기기엔 식물과 하늘의 청량한 색채가 기억에 잊지 못할 추억을 묻히는, 없어져선 안 되는 계절이었다. 그래서 여름으로 돌아가는 일이 그렇게 거북스럽진 않았다. 색이라곤 황량한 갈색뿐인 메마른 겨울에 흥미를 잃어가던 중이라, 여름이 오기까진 아직 6개월이 남은 상태에서 때이른 여름을 맛보고 싶기도 했다.

 

아무튼 그런 사정으로 캐리어에 여름 옷을 챙겼다. 장롱 깊숙이 넣어놓은 여름 옷 상자를 꺼냈을 때는 그 안의 옷들이 잠시 내 옷이 아닌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인천 공항과 시드니 공항에서의 복장이 달라야 한다는 건 무슨 위장을 하는 것 같아 은근히 재미있기도 했다. 인간이 이토록 옷에 의존하는 동물이구나 싶기도 했다.

 

게다가 처음 경험하는 저녁 비행기였다. 저녁에 출발해 아침에 도착할 예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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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에 일어나 비몽사몽한 눈을 비비며 공항으로 향했던 이전과 달리, 하루를 충분히 보내고 눈에 피곤이 차차 내려앉을 시간에 공항에 가니 이상했다. 남들 퇴근하는 시간에 출근하는, 야간 근무자가 된 기분이었다.

 

그러나 한번도 경험한 적 없는 이러한 차이가 그 자체로 여행의 비현실성을 고조시켰다.

 

비행기가 어둠 속을 이륙하면서 나는 내가 완전한 비현실로 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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