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프랑스 파리를 고등학생 때 처음 갔다. 내가 살던 지역 교육청에서 제2외국어로 프랑스어를 배우는 고등학교를 대상으로 프랑스에 단기연수를 보내준 것이었다.
출국을 앞두고 준비를 하는데 프랑스에 대해서, 정확히는 파리에 대해서 많이 찾아봤다. 미디어가 어찌나 파리를 아름답고 고고하게 포장을 해놓던지, 나도 홀랑 속아넘어가서 잔뜩 기대를 했더랬다. 예술과 낭만의 도시, 패션과 품격이 살아 숨 쉬는 곳. '파리지앵'이라는 단어가 연상시키는 이미지가 얼마나 세련된 지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이 알고 있을 것이다. 그렇게 부푼 가슴을 안고 파리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거두절미하고 말하자면 파리의 첫인상? 최악이었다.
회색빛 도시
장기간 비행으로 온몸이 찌뿌둥하고 씻지 못해서 꼬질꼬질해진 몸을 이끌고 비행기에서 내렸을 때는 내가 프랑스에 있다는 것이 실감이 잘 나지 않았다. 하지만 샤를 드골 공항에 들어서는 그 순간, 맡았던 냄새(아마 빵과 화장품이 섞인 냄새였을 것이다)와 살짝 훕훕했던 온기를 기억한다. 함께 온 또래 학생들이 길게 줄을 지어서 인솔교사의 꽁무니를 졸졸 쫓으면서도 눈은 바쁘게 움직였다. 그 와중에 곳곳에 쓰여있는 프랑스어 안내판이 내가 프랑스에 도착했음을 서서히 실감케 했다.
학생들은 파견 전에 배정된 가정집으로 홈스테이를 할 예정이었기에 공항에서 나와 대절버스를 타고 도심으로 이동했다. 나는 파리로부터 한 57km쯤 떨어져 있는 퐁텐블로라고 하는 도시에 머물게 되었다. 이 주일 동안 머물 곳은 퐁텐블로였지만 그 기간 중 몇 번 파견학생들과 함께 파리로 올라가서 관광을 했다.
트랑지리엥(파리 근교에서 운행하는 열차)을 타고 도착한 파리는 뭔가 얼떨떨했다. 내가 파견을 간 기간이 2월 초였는데, 알 사람은 알다시피 유럽의 겨울은 우중충하기로 유명하다. 하늘은 먹구름이 꽉 메우고 있어서 우중충했고, 날씨는 꿉꿉하면서 서늘했다. 거리 위를 분주하게 오가는 파리지앵들은 내 환상 속 '파리지앵'이 아니었다. 남들은 생각지도 못하게 기발한 멋을 부리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냥 어느 나라를 가도 흔하게 볼 수 있을 것 같은 차림새였다.
오히려 파리를 처음 방문하느라 잔뜩 신이 난 한국 학생들이 더 화려하고 세련돼 보였다.


우리는 팔레 루아얄과 라파예트 백화점의 전망대, 몽마르트르 언덕, 에펠탑을 구경했다. 여행에 있어 날씨가 생각보다 많은 것을 좌우했던 걸까. 어떤 것을 봐도 좀처럼 흥이 오르지 않고 심드렁했다. 팔레 루아얄은 다 시들고 앙상한 가지만 남은 가로수들뿐이었고, 백화점의 전망대는 안개가 끼어있어서 전경을 볼 수 없었다.
몽마르트르 언덕에서는 집시들이 얼쩡거리면서 소리를 질러서 기분이 좋지 않았고, 기대했던 에펠탑은 꼭대기가 구름에 가려져 온전한 탑 모양조차 보지 못했다. 에펠탑에서 내려와 개선문이 있는 곳까지 걸어왔는데 그 거리가 어찌나 멀던지 파리고 뭐고 당장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이렇게 심신이 잔뜩 지친 채로 하루를 대충 마무리하고 집으로 가는 기차를 타기 위해서 역으로 이동하는 지하철을 타려는데 개찰구 앞에서 역무원들이 검표를 하고 있었다. 순조롭게 지나갈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갑자기 역무원들이 험악한 표정으로 무어라고 이야기를 하더니 우리 일행들을 한쪽으로 몰아세웠다. 듣자 하니 잘못된 표를 들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처럼 표를 검사했을 때 잘못된 표를 가지고 가거나 무임승차를 할 시에는 벌금을 지불해야 하는데 그 돈이 꽤 비쌌기에 학생들은 당황했다.
당시 인솔교사가 프랑스어로 대화를 시도했지만 역무원이 대화를 하려 하지 않아서 우리는 추운 겨울날 통로에 서서 오들오들 떨며 기다려야 했다. 문제의 표는 현지 학교측에서 마련해 준 것이었는데, 가까스로 관계자와 통화가 되어서 자초지종 사정을 설명하고 나서야 지하철을 탈 수 있었다. 기차를 탔을 땐 나를 포함한 모두가 잔뜩 녹초가 되어 곯아떨어졌다.
집에 돌아와서 홈스테이 가족들이 파리는 어땠느냐고 물었을 때 난 대충 얼버무리면서 어색하게 웃었다. 나중에 들은 얘기로는 한국에서 문화생활을 즐기기 위해 서울을 자주 방문하는 것처럼 프랑스 학생들이 파리를 찾지 않는다고 한다. 그래서 살면서 파리를 한 번도 가보지 않은 학생들도 많다고 했다. 현지인들 사이에서는 파리가 그렇게 사랑받는 도시가 아님을 확인하고 나서 난 그들의 말에 격한 공감을 했다.
짧은 연수를 마치고 비행기에서 지난날을 회상했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내가 다시 파리를 가나 봐라. 파리는 정말 최악이야, 최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