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같지만 다른 두 공연, 발레 '라 바야데르'의 두 버전 [공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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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10월 자 기사 <고대 인도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발레, 유니버설발레단 '라 바야데르’>에서 이어집니다.
고전발레의 아버지로 불리는 안무가 마리우스 프티파와 작곡가 루드비히 밍쿠스의 조합으로 19세기 러시아에서 처음 초연한 4막 7장의 발레 <라 바야데르>(La bayadere)는 현재 프티파의 원 안무에 (1막 2장에 등장하는) 노예와 니키아의 파드되 같은 여러 안무를 추가하고, 솔로르와 감자티의 결혼식에서 신의 분노로 사원이 붕괴하는 4막을 제외한 채 3막으로 공연되는 등 여러 안무가들이 제안무를 시도한 작품이다. 그 중 포노마레프와 바흐탕 차부키아니의 재안무 버전이 지금 현재 공연되고 있는 여러 <라 바야데르> 버전의 초석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유니버설발레단은 1999년 마린스키 발레단(그 당시 키로프 발레단)의 예술감독인 올렉 비노그라도프가 연출을 맡아 러시아 마린스키 발레단과 같은 버전으로 <라 바야데르>의 초연을 올렸다. 국립발레단은 2013년 러시아 볼쇼이 발레단의 예술감독 출신 유리 그리고로비치가 볼쇼이 발레단의 <라 바야데르>를 국립발레단에 맞게 재안무한 버전이 발레단의 장기 레퍼토리로 자리잡았다. 이는 두 발레단이 공연하는 <백조의 호수>, <호두까기 인형>의 안무 역시 각각 마린스키 발레단 버전과 볼쇼이 발레단 버전으로 나뉜 것과 유사하다고 볼 수 있다.
<라 바야데르>의 역사 속에서 같은 점과 다른 점
<라 바야데르>는 <백조의 호수>, <잠자는 숲속의 미녀> 같은 다른 클래식 발레에 비해 러시아 색채가 많이 묻어나는 작품으로서, 루돌프 누례예프와 나탈리아 마카로바 같은 구소련 발레 무용수들의 망명을 통해 미국이나 유럽에서도 레퍼토리로 자리잡기 시작했다. 볼쇼이 발레단 버전에 기원을 둔 국립발레단 버전과 마린스키 발레단 버전인 유니버설발레단의 <라 바야데르>는 모두 그 기반을 러시아 발레에 기반을 두고 있다는 점에서 차이점보다 유사한 점이 더 많다고 할 수 있다. 에투알 박세은이 있는 파리 오페라 발레단의 누레예프 버전은 그 특유의 의상이 독특하고, 수석무용수 서희가 있는 ABT 발레단의 마카로바 버전은 구소련 이전 프티파의 원작에 가깝게 약혼식을 1막으로, 결혼식을 3막으로 나누고, 결혼식에서의 사원의 붕괴 장면을 살려 2막 망령들의 왕국 이후에 배치해 한국에서 공연되는 <라 바야데르>와는 차이점이 있다.
유니버설발레단과 국립발레단의 <라 바야데르>는 전반적으로 동일한 서사의 흐름과 3막 5장이라는 막 구성의 측면에서 거의 유사하다고 볼 수도 있지만, 두 버전이 러시아 발레계의 양대산맥, 마린스키 버전과 볼쇼이 버전이 각각 그 근간이 된다는 점에서 차별화된다. 결정적인 차이점은 결말 부분에서 나온다. 물론 니키아와 한 사랑의 맹세를 깨고 감자티와 결혼하는 솔로르에 대한 신의 분노로 신전이 붕괴하고 모두 죽는 <라 바야데르>의 초연 결말이나 이 결말을 살린 마카로바 버전만큼의 파격적인 차이는 아니지만, 국립발레단의 경우 솔로르의 죽음이 암시된다는 점에서 다르다. 유니버설발레단 버전에서는 3막 ‘망령들의 왕국’에서 망령들의 모습을 배경으로 영원한 사랑의 맹세를 하는 환상 속 니키아와 솔로르의 모습으로 극이 끝나고, 그 이후의 솔로르의 삶에 대해서는 알 수가 없는 ‘모호한’ 엔딩이다. 반면 국립발레단 버전에서는 니키아를 비롯한 망령들의 군무가 끝난 후 솔로르가 혼자 남겨지고, 환각에서 빠져나왔음이 암시되며 슬픔과 고뇌에 빠진 솔로르의 독백 같은 안무가 이어진다. 그 후 마치 처음 환각에 빠져 망령들의 왕국에 진입한 솔로르가 봤던 것처럼 니키아의 모습이 같은 구도로 다시 등장하고, 쓰러진 솔로르의 모습에서 그의 죽음을 짐작할 수 있다. 시놉시스 역시 솔로르가 ‘니키아의 망령을 따라 세속을 떠난’ 것, 즉 죽음을 명시하고 있다.
놓치기 쉬운 디테일한 차이들
볼쇼이 버전을 바탕으로 개정한 국립발레단 버전과, 마린스키 버전을 적극적으로 채택한 유니버설발레단이 선보이는 <라 바야데르>는 많은 면에서 다르기도 하다. 조연인 등장인물의 이름 표기 역시 브라민(UBC)/브라만(국립), 마가다베야/마그다비아, 라자왕/라자, 더그만타 국왕(혼용)으로 조금씩 차이가 있다. (사실 영어 스펠링이 같아서 큰 차이는 아니다.) 구체적인 안무 순서나 세트 같은 세세한 부분에서도 차이가 있는데, 먼저 서곡이 연주된 후 1막이 올랐을 때 국립발레단 버전은 마그다비아를 비롯한 고행수도승들의 춤으로 시작하고, 유니버설발레단은 승려들과 수도승들의 등장으로 시작한다. 이것을 제외하고 브라민의 구애와 니키아의 거부, 고행수도승들과 무희들의 춤이나 니키아와 솔로르의 파드되 같은 부분은 동일하지만, 왕궁이 묘사되는 1막 2장에서 차이점이 생긴다. 유니버설발레단 버전은 라자왕이 군사들이나 신하들과 함께 먼저 등장해 그 이후로 디베르티스망이라고 할 수 있는 스카프 춤이 이어지고, 스카프 춤이 끝난 뒤 라자왕이 솔로르에게 감자티를 소개시켜주면서 감자티가 등장한다. 애인 니키아가 있지만 공주 감자티와 결혼해야 하는 상황을 마주하여 고뇌하는 솔로르는 무희 니키아와 노예가 감자티를 축복하기 위한 춤을 출 때 이 상황을 제대로 마주하지 못하고 숨어있는 연기를 해야 한다.
국립발레단 버전에서는 왕궁으로 무대가 전환된 이후 감자티가 수행하는 어린 아이들과 함께 처음부터 등장하고, 왕궁을 활보하는 듯이 춤을 추고 아버지 라자 왕이 보여준 솔로르의 초상화를 보고 매혹된다. 이때 수행하는 어린아이들(2막의 황금신상 수행과 동일)의 춤도 추가되고, 스카프 춤이 진행되던 와중 노예와 무희 니키아가 등장해 감자티를 축복하기 위한 파드되가 이어진 뒤 스카프 춤이 마무리된다. 그 후 감자티와 솔로르의 만남과 브라민의 등장으로 흘러간다. 그렇기 때문에 솔로르의 고뇌가 드러나는 시간이 더 짧다고 볼 수도 있다. 또한 니키아를 죽이려는 라자왕과 브라민의 대립은 유니버설발레단 버전에서 조금 더 동등하게 느껴지며, 카스트 제도 내에서 브라만(승려) 계급과 크샤트리아 계급의 대유로 여겨지는 감이 있다.
그리고 1막 마지막 장면이자 하이라이트는 공주 감자티 대 무희 니키아의 ‘사랑 싸움’ 장면이라고 말할 수 있다. 유니버설발레단은 마임과 원초적인 움직임에 집중한 반면, 국립발레단은 마임 중간에 안무를 넣었다. 예를 들어, 니키아와 감자티의 대립 장면에서 국립발레단 버전은 대립을 표현하기 위해 둘이 서로를 마주보며 같은 안무를 대칭을 이루며 하는 반면 UBC 버전에서는 보다 적극적이고 본능에 따른 몸싸움이 등장한다. 그리고 니키아가 칼로 감자티를 찌르려고 할 때 유니버설발레단의 감자티는 달리듯이 도망치지만, 국립발레단의 감자티는 제떼(jete)를 뛰며 피하려고 하는 것 등이 있다.
다음으로, 2막은 유니버설발레단 버전에서는 솔로르와 감자티의 ‘결혼식’인 반면 국립발레단 버전에서는 ‘약혼식’으로 명시된다. 또한 축하연 장면에서도 소소한 차이가 돋보인다. 유니버설발레단에서는 각각 가마를 탄 라자왕과 감자티가 등장한 뒤 대형 코끼리 기계를 타고 솔로르가 등장해 웅장함과 화려함이 사는 반면, 국립발레단에서는 라자왕이 등장한 뒤 솔로는 감자티와 같이 등장한다. 그리고 유니버설발레단의 경우 부채춤(Fan dance)이 앵무새 춤 앞에 등장하는데, 국립발레단에서는 부채를 든 이들은 등장하지만 따로 부채춤(Fan dance)는 추지 않는다. 다만 감자티와 솔로르의 그랑 파드되 코다 장면에서는 부채를 든 일부 인원이 군무의 일환으로 참여한다. 앵무새 춤, 황금신상, 물동이 춤(마누)와 두 소녀, 북춤(인디언 댄스), ‘레드’와 ‘블루’(혹은 ‘큰 무희’와 ‘작은 무희’), 감자티와 솔로르의 그랑 파드되의 순서는 전반적으로 동일하다.
또한 니키아의 죽음이 등장하는 2막 마지막 장면 역시 중요한데, 니키아가 브라민에게 해독제를 받았음에도 솔로르의 모습을 보고 해독제를 포기한 뒤 죽는 장면은 동일하고, 뒤늦게 절망하는 솔로르의 모습 역시 마찬가지다*. 이 부분에서 자세한 차이점이 있다면 니키아의 등장부터 죽음을 지켜보는 연회에 참석한 사람들이 유니버설발레단 버전에서는 니키아가 어떤 연기를 하든 차갑게 서 있는 반면 (특히 독사에 물린 니키아 장면에서는 일부러 외면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국립발레단 버전에서는 니키아의 연기에 생동감 있게 반응해준다. 또한 유니버설발레단 버전에서는 라자왕이 감자티의 시녀 아야에게 니키아에게 줄 독사가 든 꽃바구니를 준비하라 지시하고, 아야가 이를 전달하지만 국립발레단 버전에서는 마그다비아가 전달한다. (마그다비아가 독사를 처리하는 것을 생각하면 지시를 수행한 마그다비아가 라자왕과 감자티의 계략을 알았는지는 의문이다.) UBC 버전에서는 마가다베야가 브라민의 명령을 받고 해독제를 가져오기에 이 버전에서는 그가 어느 정도 자신의 자유 의지로 니키아와 솔로르의 조력자 역할을 하고 있음이 강조되는 반면, 국립발레단은 단순히 솔로르와 브라민, 라자왕의 지시만을 수행하는 것으로 마그다비아의 역할이 축소되는 감이 있다.
이러한 차이점은 슬픔에 잠긴 솔로르가 묘사되는 3막의 서두로 이어진다. 유니버설발레단 버전에서는 마가다베야가 단독으로 등장해 환각제(아편)를 흡입하는 솔로르 앞에서 피리를 불어 코브라를 일으켜 환각의 효과를 극대화하지만, 국립발레단 버전에서는 마그다비아를 비롯한 (고행) 수도승들이 무리로 등장해 솔로르의 부탁을 받고 불을 켜고 단체로 춤을 추며 환각제를 마신 솔로르 앞에서 일종의 종교적인 성격을 지닌 의식을 진행한다. 그 이후 진행되는 <망령들의 왕국> 장면의 경우 흰색 튀튀를 입은 망령들로 가득한 그 장면 특유의 ‘발레 블랑’과 절제된 서정성이 주는 고전적인 아름다움을 보존하기 위해서인지 버전들 사이에도 큰 차이가 없다. 아라베스크 팡셰를 반복하며 등장하는 32명의 쉐이즈(망령)들, 세 쉐이즈의 바리에이션, 니키아의 망령과 솔로르가 보여주는 스카프 파드되 등 전반적으로 동일한 안무다. 결말 부분이 앞서 말했듯이 좀 차이가 있고, 무대 세트에 있어서 UBC 버전이 조금 더 ‘고대 신전’ 같은 분위기가 난다는 것을 제외하면 3막 <망령들의 왕국> 장면은 거의 동일하다.
* 2막 엔딩에서의 자세한 차이는 발레단의 버전보다 솔로르를 맡은 무용수에 따라, 혹은 같은 버전이더라도 구체적인 연도에 따라 달라지기도 한다. 일반적으로 죽은 니키아를 부둥켜안는 솔로르가 있는 반면, 하늘에 손을 뻗으며 절규하는 솔로르도 있다. 추가적으로, 21년도 국립발레단 공연에서 김기완을 포함한 솔로르를 맡은 무용수들은 니키아의 죽음 장면에서 니키아 곁에서 절규하는 일반적인 모습을 보여주었지만, 24년도 공연에서 허서명과 김기민 솔로르는 니키아의 죽음이라는 현실을 회피하듯 뛰쳐나가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두 버전의 <라 바야데르>, 나의 취향은?
<라 바야데르>는 계속해서 비평의 대상이 된 내재된 오리엔탈리즘과 ‘막장 드라마’ 같은 전개에도 불구하고 내 확고한 ‘최애작’이다. 드라마의 성격이 강한 고전 발레라는 이중적인 성격 역시 오히려 이 작품 특유의 장점인 것 같다. 어린 시절, 2010년 유니버설발레단의 <라 바야데르>를 보고 느낀 충격은 내가 계속해서 발레 마니아로 살아가는 것의 원동력이 되었고, 2021년 국립발레단 박슬기-김기완 페어의 공연은 발레에 대한 잊었던 향수를 불러 일으켜 다시 발레를 적극적으로 보러 다니도록 했다. 황혜민, 박슬기, 강미선 등 여러 발레리나들이 보여주었던 니키아의 캐릭터는 나에게 진한 여운과 감동을 남게 했고, 2024년 POB의 에뚜알 박세은과 마린스키 발레단의 수석 김기민이 국립발레단에서 재회해서 선보인 공연은 2010년 ‘발레 유망주’였던 20대 초 박세은과 10대 후반의 김기민이 유니버설발레단에서 객원 자격으로 공연했던 것이 연상되어 감회가 새로웠다. 곧 마린스키 발레단에 입단하게 될 전민철의 유니버설발레단 <라 바야데르> 공연은 한국 발레의 새로운 역사의 전조를 경험하고 있다는 것이 실감났다.
현재 한국에서 공연되고 있는 <라 바야데르> 두 버전 모두 나의 발레 취향을 형성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제작비의 규모가 크고 많은 인원이 필요하기 때문에 자주 올라오기 어려운 작품이지만, 나는 나를 거쳐 갔던 '니키아'와 '솔로르', 그리고 '감자티'의 기억들은 나에게 큰 추억이 되었다. 올해 두 발레단의 <라 바야데르>가 동시에 올라오면서 한국 발레의 역사를 비롯해 나에게 발레라는 장르가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지에 대해서도 되돌아 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던 것 같다. 나에게 <라 바야데르>가 가지는 의미가 유독 남다른데, 그렇기 때문에 올해 <라 바야데르> 공연들을 보기 위해 예술의 전당에 연속으로 가면서 이 공연을 보는 다른 이들에게 이 공연이 어떠한 기억으로 남을지 생각하게 되었다. <라 바야데르>를 접하고 그 여운에 충격받던 어린 시절의 나처럼, 다른 이들도 이 공연이 어려운 삶을 버티기 위한 하나의 추억 조각이 되길 바란다.
[이다연 에디터]<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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