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니버설발레단이 예술의 전당 오페라극장에서 2024년 9월 27일부터 29일까지 총 3일간, 6년만에 발레 <라 바야데르>를 올렸다. 발레 <라 바야데르>(La Bayadere)는 인도의 신전에서 춤을 추는 무희라는 뜻의 ‘bayadere’에 프랑스어에서 쓰이는 여성 단수 명사 앞에 붙는 관사 ‘la’가 붙어서 만들어진 제목이다. 주요 등장인물은 인도의 무희 니키아, 전사 솔로르, 왕국의 공주 감자티, 그리고 힌두 사원의 최고 승려 브라민으로 이루어져 있다. 고대 인도를 배경으로 신분을 뛰어넘는 비밀스러운 사랑을 하던 니키아와 솔로르는 탁발승 마가다베야의 도움을 받아 만남을 이어나간다. 브라민은 니키아에게 사랑을 고백하지만 거절당하고, 솔로르와의 관계를 알게 된 뒤 분노하고 솔로르와 감자티를 결혼시키려는 왕 라자에게 이 사실을 알린다. 결국 결혼식 축하연에서 니키아는 라자왕과 감자티가 보낸 꽃바구니 속에 들어있는 독사에게 물리지만, 해독제를 줄 테니 멀리 떠나자는 브라민의 제안을 거절하고 죽음을 맞는다. 솔로르의 환각 속에서 둘은 재회하고 영원한 사랑의 맹세를 하게 된다는 것이 이 작품의 결말이다.
발레 <라 바야데르>는 <백조의 호수>, <잠자는 숲속의 미녀> 등 여러 고전 발레를 안무한 것으로 유명한 프랑스 출신의 마린스키 발레단 발레마스터 마리우스 프티파의 안무와 <돈키호테>와 <파키타>의 음악을 작곡한 오스트리아 출신 루드비히 밍쿠스의 합작으로 1877년 상트페테르부르크 황실극장에서 처음 초연되었다. 처음 4막 7장이었던 본래의 흐름에서 사원 붕괴 장면이 사라지는 등의 많은 변화를 겪으며, 프티파의 원전 안무에 ‘황금신상 춤’을 추가하거나 순서를 바꾸는 등 여러 부분을 수정해 만든 발레마스터 포노마레프와 무용수 바흐탕 차부키아니의 3막으로 이루어진 재안무 버전이 주요 흐름이 되었다. 그 이후, 소련 발레 무용수들의 망명을 통해 영미권이나 서유럽에 전파되며 프티파를 재안무한 차부키아니 버전을 바탕으로 여러 버전이 나뉘어졌다. 현재 <라 바야데르>는 러시아의 두 발레단에서 선보이는 버전과 함께 POB 발레단에서 공연되는 루돌프 누레예프 재안무 버전과 현재 ABT 발레단의 주요 레퍼토리인 나탈리아 마카로바 버전 등도 유명하다.
유니버설발레단은 1999년 당시 창단 15주년 기념으로 올렉 비노그라도프의 연출 아래 러시아 마린스키 발레단(전 키로프 발레단)의 버전을 이어받아 <라 바야데르>를 한국 관객들에게 처음 선보였다. 한국 초연 이후 <라 바야데르>는 장기 레퍼토리로 자리잡았고, 거대한 ‘스펙타클’을 위한 많은 인원이 필요한 이 극의 특성으로 인해 또 다른 장기 레퍼토리인 <지젤>이나 <백조의 호수> 같은 작품들과 달리 민간 발레단인 유니버설발레단 입장에서는 올리는 ‘텀’이 길 수밖에 없다. (물론, 2009년 <라 바야데르> 공연과 임혜경 발레리나 은퇴 공연이기도 한 2010년의 1년 차이는 예외다.) 따라서 유니버설발레단의 <라 바야데르>는 러시아 발레리나 스베틀로나 자하로바의 내한으로 주목받았던 2018년 프티파 탄생 200주년 기념 공연 이후로, 6년이 지난 2024년 유니버설발레단 40주년을 맞아 다시 올라올 수 있었다.
드라마가 강한 고전발레라는 특징과 다양한 안무들
<라 바야데르> 속 서사의 감정선은 1막 솔로르-니키아 파드되에서 드러나는 사랑이라는 감정과 그로 인한 브라민의 분노, 솔로르를 죽이려는 브라민과 니키아를 죽이려는 라자의 대립에서 고조된다. 1막의 하이라이트는 무엇보다 니키아를 부른 감자티가 니키아를 회유하려다 분노에 차 솔로르가 자신의 약혼자임을 알리고, 니키아가 칼을 집어 들고 감자티를 찌르려다 시녀 아야의 저지로 실패한 후 퇴장하고 감자티가 니키아를 죽이겠다는 결심을 담은 마임으로 끝나는 장면이다. 유니버설발레단의 경우 이 대립에서 발레의 동작보다는 조금 더 원초적인 욕망을 반영해 솔로르의 초상화를 사용해 니키아를 밀고, 니키아의 팔을 잡으며 매달리는 감자티의 모습을 살렸다. 니키아 역시 신분 차이로 인해 감자티에게 공대의 자세를 취하지만 솔로르와 감자티의 약혼 사실을 알고 신분 따위는 신경쓰지 않고 ‘여자 대 여자’이자 연적으로 대립하게 되는 변화가 드라마틱하다. 니키아를 자연스럽게 하대하던 권력을 가진 공주 감자티가 자신을 칼로 찌르려고 하는 니키아의 모습에 놀라 본능적으로 행동하는 부분도 짜릿한 쾌감을 준다.
또한 2막 마지막 장면인 니키아의 등장 이후의 모든 장면들이다. 자신을 배신한 애인의 결혼식에서 춤을 춰야 하는 니키아의 애절함, 그런 니키아를 바라보지 못하는 솔로르, 그리고 그 사이에서 피어오르는 라자왕&감자티와 브라민의 상이한 계략에서 나오는 긴장이 무대에 깔린다. 솔로르가 준 꽃바구니인줄 알고 광기에 가까운 춤을 추다 독사에 목을 물린 니키아가 모든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감자티를 범인으로 지목하지만 라자에게 저지당하고, 브라민에게 해독제를 받지만 감자티 옆에 있는 솔로르의 모습을 보고 죽음을 택하는 모습은 특유의 음악이 주는 리듬과 함께 ‘도파민’을 선사하는 것 같은 기분을 준다. 사랑과 음모가 교차하는 니키아 – 솔로르 – 감자티 – 브라민이라는 4자 관계에서의 역학 역시 드라마에 일조한다. 결국 니키아의 죽음에 뒤늦게 절규하는 솔로르를 배경으로 2막의 막은 내려가는데, 그때 이 작품은 테크닉뿐만 아니라 연기력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이처럼, <라 바야데르>는 기존의 고전 발레보다 드라마적인 성격이 강한 것이 특징이다. 그렇지만 작품의 호흡은 이 작품이 드라마 발레가 아니라 고전 발레의 형식을 지녔다는 것을 나타낸다. 감정을 통해 서사가 전개되기보다는 그랑 파드되 같은 고전적인 안무 형식을 따르는 등 서사와 안무는 서로를 의식하며 진행된다. 이때, <라 바야데르>에서 주목해야 할 파드되는 1막 신전에서 마가다베야의 도움을 받아 비밀스럽게 만난 솔로르와 니키아의 파드되와 2막 결혼식에서의 감자티-솔로르의 그랑파드되, 그리고 3막에서의 스카프를 사용한 니키아와 솔로르의 파드되다. 이 안무는 갈라에서 따로 공연되기도 할 정도로 유명하다. 또한 1막의 신전에서 탁발승과 무희들의 군무를 비롯해 화려한 세트에서 추는 춤들은 서양을 배경으로 하는 고전 발레에서 쉽게 볼 수 없는 분위기를 뿜는다. 이어지는 2막 감자티와 솔로르의 결혼식 축하연은 화려한 춤들의 향연이다. 부채춤, 앵무새춤, 북춤, 마누(물동이를 든 여자와 물을 달라고 하는 두 아이) 춤, 북춤(인디언 댄스)이 이어지고 이는 감자티와 솔로르의 그랑 파드되로 마무리된다. 그 중 많은 환호성을 받는 춤은 황금신상(the golden idol)의 춤이다. 황금으로 만들어진 우상이 춤을 춘다는 발상으로, 이 역할을 맡은 발레리노는 3분도 안 되는 장면을 위해 온몸에 금칠을 해야 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또한, 2막 그랑 파드되 속 코다 부분에서 이탈리안 푸에테를 하는 감자티와 감자티를 둘러싼 많은 인원들의 모습은 거대한 화려함의 극치다. 이 결혼식 축하 장면의 흐름은 마치 <잠자는 숲속의 미녀> 3막 오로라와 데지레의 결혼식에서 나타나는 디베르티스망과 그랑 파드되를 연상시킨다. 다만 <라 바야데르>는 이러한 화려함이 끝난 후 바로 애절한 니키아의 솔로로 전환될 뿐이다. 그리고 3막인 ‘망령들의 왕국’에서는 망령들(shades)의 단체 군무와 세명의 쉐이즈들이 보여주는 바리에이션이 유명하다. 후자의 경우 이야기 전개와는 큰 상관이 없지만, 각종 콩쿠르에서 쓰이기도 할 정도로 테크틱을 보기에는 좋은 안무다.
이국성에서 환상성으로, 스펙타클의 변화
<라 바야데르>의 1~2막은 인도의 왕궁과 신전을 배경으로, 카스트 제도가 강했던 인도 사회가 작품의 갈등과 사건을 이끄는 주요 동력이 된다. 니키아와 솔로르, 감자티와 브라민의 신분은 그들의 ‘사랑의 화살표’가 파국으로 향하거나 장애물을 마주하도록 하기 때문이다. 사랑의 금기 속에서 니키아와 솔로르의 낭만적이고 순수한, 진실된 사랑이라는 가치는 인도라는 배경 속에서 원초적으로 파국을 피할 수 없는 것이 된다. 또한, 기존 고전 발레 작품들이 이국성이라는 요소를 디베르티스망 속 한 안무, 에를 들어 <백조의 호수>나 <호두까기인형> 속 각 나라 민속 춤을 바탕으로 한 안무로만 등장시켰던 것과는 달리 <라 바야데르>는 고전 발레라는 형식을 지킨 채 이국적인 배경과 의상을 펼쳐 보인다. 신전과 왕궁 세트에서 드러나는 특유의 디자인과 ‘동양적’인 스타일을 가미한 발레 의상과 튀튀의 이질감 없는 조화는 주로 서양 배경으로 이루어졌던 고전 발레에 인도라는 설정을 배합시킨다. 그 외에도 앞서 언급했던 황금신상 바리에이션 같은 춤이나 대형 코끼리 기계 같은 무대 세트, 그리고 수도승들이나 탁발승의 강렬한 이미지는 <라 바야데르> 특유의 동양적이면서도 거대한 스펙타클을 만드는 것에 일조한다.
이러한 인도라는 배경이 주는 신비로운 낯섦은 니키아가 죽고 3막이 시작되며 전환된다. 코브라를 일으키는 마가다베야의 도움으로 환각제(아편)을 흡입하고 환상에 빠진 솔로르는 알 수 없는 곳에서 니키아의 환영과 줄지어 등장하는 32명의 망령(shades)들을 본다. ‘망령들의 왕국’(kingdom of shades)이라고 불리는 이 장면은 숭고의 미학이 느껴질 정도로 환상적이고 관객을 홀리는 것처럼 압도하는 장면인데, ‘망령들의 왕국’이 백조의 호수 속 호숫가 장면과 지젤의 2막과 더불어 백색 발레(발레 블랑, ballet blanc)의 진수로 꼽힌다는 것은 발레에 조금이라도 관심있는 사람들은 모두 알고 있는 사실이다. 3막에서는 마치 현대의 네오 클래식 발레처럼 이야기의 전개가 거의 없고 안무에 집중되기 때문에 ‘망령들의 왕국’ 장면은 고전 발레의 전성기였던 19세기 중 가장 현대적인 성격을 지녔다고 이야기되기도 한다.
3막 망령들의 왕국은 단테의 『신곡』 속 <천국>을 묘사한 낭만주의 화가 구스타프 도레의 삽화에서 영감을 받은 장면으로 알려져 있다. 환각에 빠진 솔로르가 보는 망령들은 니키아의 잔상 같은 환영이 되는 셈이다. 따라서 망령의 존재는 같은 ‘발레 블랑’ 하면 거론되는 <지젤>의 윌리나 <백조의 호수> 백조와는 다르다. 순백의 이미지는 유사하지만, 윌리는 밤이라는 한정적인 시간 속에서 현실 세계를 지배할 수 있는 초-자연이자 한계 있는 육체와 대비되는 영혼에서 기반한 ‘귀신’이다. 백조는 인간-신체와는 대비되는 동물성을 체현하고 그 사이의 이행 불/가능성을 통해 환상성을 구성했다. 반면 망령(shade)은 이들과는 달리 ‘shade’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 솔로르의 환각 속에서 존재하는 니키아라는 ‘실체’의 그림자에 불과하다. 플라톤 같은 철학자에서 기원한 서양의 지성사에서 ‘모상’으로서의 그림자가 함의하는 비존재성과 허구성을 감안한다면 감정을 의도적으로 절제하는 것처럼 보이는 망령들의 모습이 이해가 간다. 그리고 동시에 이 작품이 동양을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서구 문화권에서 자라난 프랑스인 프티파에 의해 처음 고안된 작품이기에 서구적인 세계관의 영향을 배제할 수 없다는 것도 느껴진다.
마지막으로, 3막에서 유니버설발레단은 유독 <라 바야데르>를 묘사한 다른 버전과 달리 다소 모호하게 끝을 맺는다. 솔로르의 환영인 3막 ‘망령들의 왕국’ 장면에서 솔로르는 니키아와 ‘스카프’가 주는 연결의 의미가 그러하듯 사랑의 맹세를 한 상태로 막이 내려가고, 솔로르의 환영이 끝나고 난 뒤에 대해서 어떻게 될 지는 명시되지 않는다. 이는 솔로르의 죽음을 암시하는 버전이나 사원이 무너지는 다른 버전과 구분되는 점이다.
화제를 이끈 캐스팅
오랜 시간이 지나 돌아오는 대작이기 때문에, 유니버설발레단은 예전부터 <라 바야데르> 캐스팅에 공을 들였다. 각 역할에 기존부터 이 캐릭터를 해 왔던 수석무용수을 캐스팅하고, 신예를 세 주연 역할에 새롭게 발탁함은 물론 2018년의 자하로바와 데니스 로드킨, 2010년의 루슬란 스크보르쵸프처럼 객원 무용수를 초청해 조합의 신선함을 보장한다. 이번 캐스팅은 작년 브누아 드 라 당스를 수상한 발레리나 강미선이 니키아와 감자티로, 마린스키 발레단 솔리스트로 입단 예정인 한국예술종합학교 학생 전민철이 객원 무용수 자격으로 솔로르를 연기한다는 점에서 화제를 모았다. 이는 2010년 <라 바야데르> 당시 로잔 콩쿨에서 우승한 발레리나 박세은(현재 파리 오페라 발레단 수석/에뚜왈)을 니키아로, 세계 여러 발레 콩쿠르에서 입상한 19살의 한국예술종합학교 학생이었던 김기민(현재 마린스키 발레단 수석무용수)을 솔로르로 파격 캐스팅했던 과거 유니버설발레단이 연상되는 결정이다.
공연이 진행되는 3일동안 총 5회차 공연에서 니키아는 그동안 니키아를 맡아 왔던 강미선, 홍향기에 이어 엘리자베타 체프라소바, 서혜원, 이유림이 합류한다. 솔로르는 기존의 이현준, 콘스탄틴 노보셀로프, 이동탁, 강민우와 객원 무용수인 전민철이 맡는다. 감자티 역할의 경우 니키아 역할을 맡은 강미선, 홍향기, 이유림이 감자티로도 또 한번 무대에 서고, 드미 솔리스트 전여진이 남은 2회차를 맡는다. 다양한 선택지 속에서 니키아와 솔로르, 그리고 감자티라는 세 주연의 각기 다른 조합이 돋보인다. 또한 캐릭터 아티스트이자 2015년과 2018년 공연에도 참여했던 곽태경이 5회차 모두 브라민을 맡고, 황금신상과 마가다베야 같은 중요한 조연 역시 임선우, 김동우 무용수가 번갈아가며 맡았다. 주역부터 조연까지 전반적으로 유니버설발레단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아우르는 캐스팅이라고 말할 수 있다. 연출의 특성부터 캐스팅까지, 유니버설발레단의 <라 바야데르>가 선사하는 특별한 의미와 감동은 이 공연을 접한 사람들에게 오랫동안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