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연극 ‘The Wasp(말벌)’(이항나 연출)의 한국 라이선스 초연은 제작사 해븐프로덕션이 기획 제작, 글림 아티스트가 공동 제작을 맡아 2026년 3월 8일부터 4월 26일까지 세종문화회관 S씨어터에서 공연된다. 영국 극작가 모건 로이드 말콤(Morgan Lloyd Malcolm)의 극본을 기반으로 2015년 런던 햄스테드 극장에서 초연되었고, 길렘 모랄레스 감독의 동명 영화 <더 와스프>(2024)로 제작되기도 했다. 학교폭력 피해자였던 헤더와 가해자였던 카알라가 20년이라는 세월이 흐른 뒤 만나 헤더가 카알라에게 자신의 남편 사이먼을 죽여달라는 제안을 하면서 시작되는 이 연극은 예측할 수 없는 반전을 기점으로 두 사람 사이에 존재하는 긴장이 폭발하며, 양자 간 다양한 층위가 서로 빠르게 교차하는 권력의 역학 관계가 이 작품을 이끄는 동력이 된다. 극 내부에서 사이먼이 수집하는 곤충 표본의 대상이자 이 작품의 제목이기도 한 타란툴라 사냥벌은 ‘폭력’의 본질에 대한 은유로 제시된다. 타란툴라 사냥벌은 타란툴라 거미를 독침을 통해 마비시킨 뒤 거미의 안에 알을 낳아 유충이 자라면서 영양분을 빼앗게 만들고, 말벌의 유충이 성충이 되어 타란툴라 거미를 떠나면 거미는 죽게 된다. 기생을 통한 탄생과 성장, 번식까지 타란툴라 사냥벌은 영원히 일방적인 의존 관계를 (재)생산하고, 대상에게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는 폭력의 연쇄적 작용은 이 작품에서도 이루어진다.
<더 와스프>는 같은 제작사가 수입한 라이선스 연극 <베이컨(Bacon)>과 영국이라는 배경, 그리고 중산층(middle class)과 노동 계급(working class) 간 격차가 공고해진 영국의 계급적 상황, 학교폭력과 재회라는 전반적인 주제를 공유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이 극을 단순히 <베이컨>의 여자 버전으로 읽기에는 설명되지 않는 부분이 있다. (텍스트의 질적 측면을 언급하는 것이 아니라 초점을 맞춘 주제나 포인트가 다르다는 의미다.) 또래 집단이 모이는 학교라는 공간이 주는 특수성은 청소년이 공적(세속적) 질서나 가정이라는 사적 공간과 무관한 작은 사회를 경험하게 된다는 점인데, 두 경우 모두 다른 계급 출신들이 ‘섞이는’ 공간인 공립 학교가 배경이 된다. <베이컨>은 (동성애 금기를 통해 작동하는) 남성 호모소셜의 위계를 남성 동성애의 에너지로 전환시키며 양자 간의 불균형한 권력 관계를 성애의 포인트로 삼았고, <베이컨>의 대런이 경험하는 계급적 환경과 ‘가정’은 그가 학교에서 (마크에게) 폭력적인 성향을 보이는 계기가 된다. <더 와스프>의 카알라도 이와 비슷하지만, 과거 카알라는 젠더화된 수치심을 이용해 자신과 친구였던 헤더를 ‘걸레’라고 부르며 학교폭력을 주도했고, 어린 카알라의 행동이 자신의 가정폭력 피해 경험을 타자(헤더)에 대한 공격성으로 전이시킨 것이었음은 후반부에 밝혀진다. <더 와스프>에서 헤더와 카알라에 의해 묘사되는 학창시절의 모습은 헤더가 고작 남자 동급생을 좋아했다는 이유만으로 괴롭힘의 대상이 되었다는 부당함에 대한 진술을 넘어 ‘걸레’라는 기표가 어떻게 여성의 약점이자 낙인으로 작동하는지 보여준다. 여성을 ‘깨끗한’ 여성과 ‘오염된’ 여성으로 분할 통치하려는 가부장제의 규범(성녀 창녀 이분법)은 후자가 될 수 있다는 잠재적인 취약성을 반영한 불안을 낳는데, 이러한 불안을 외부로 투사하고 굴절시키는 방법은 후자를 타자화해 혐오하는 것이다. 가정폭력에 시달리던 어린 카알라가 자신의 취약성을 헤더에게 투사하고 그를 혐오의 대상으로 여기며 공격성을 발휘했다는 것, 그리고 이러한 낙인의 인식이 여성 집단 내부에서 공유되며 폭력으로 이어지는 과정의 노골화된 형태는 규범화된 폭력이 굴절되는 방식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는 후반부 헤더가 선택하게 되는 계획의 과정과 결말에도 방향이 반전되어 작동한다. 헤더는 ‘내연녀’를 향한 사회의 규범적인 시선을 활용해 카알라를 곤경에 빠트리거나, 카알라의 ‘수치심’을 유발하며 감정적 쾌감을 얻고, 이를 자신의 계획을 위한 중요한 장기말로 사용한다.
이러한 과거를 둔 두 사람이 재회한 시점에서 ‘계급’이라는 중대한 변수가 작동하여 두 사람의 관계는 반전된 채 등장하지만, 여전히 팽팽한 긴장이 그들의 관계에서 관찰된다. 헤더는 중산층의 교양을 습득하고 우아한 삶을 살고 있는 듯한 외양을 하지만, 카알라는 다섯 번째 아이를 임신한 채 빈곤을 경험하고 거친 어휘를 사용한다. 하지만 불쑥 학창 시절의 카알라의 모습이 튀어나오거나 카알라가 과거를 ‘지난 일’로 일축할 때면 발생하는 불협화음은 두 사람 사이의 관계의 질서가 더욱 요동치는 계기가 된다. 근황과 가족에 대한 일상적인 이야기를 하며 헤더가 임신이 어렵다는 사실과, 그로 인해 남편이 바람을 피운다는 사실이 밝혀지며 카알라는 돈을 받고 자신의 아이를 주겠다는 일종의 대리모이자 영아 거래의 제안까지 언급하기도 한다. 두 캐릭터의 속내에 무엇이 있는지 관객이 쉽게 짐작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 헤더는 바람을 피우는 자신의 남편을 죽여달라는 제안이 만남의 목적이었음을 밝히고, 카알라는 상당한 양의 돈을 주겠다는 헤더의 설득 끝에 계획에 공모하길 택한다.
이들이 헤더의 남편을 죽일 계획을 짜고 그 보상을 협상하는 과정에서는 거시적 맥락의 ‘계급’이라는 권력 관계에 더해진, 특정 상황에서 순간 순간의 정보의 격차와 ‘비밀’의 여부, 계획의 차이에서 발생하는 주도권의 긴장이 섞이면서 오는 쾌감이 작품을 관통한다. 분위기가 직접적으로 반전되는 것은 카알라가 만나던 유부남 제임스가 헤더의 남편 사이먼이고 카알라의 태아가 사이먼(제임스)의 아이임이 밝혀지고, 이를 이미 알고 있던 헤더가 자신의 계획을 위해 카알라를 정신을 잃게 한 뒤 감금을 시도하는 부분이다. 헤더는 묶어놓은 카알라에게 뱃속 태아를 이야기하며 협박하기도 하고, 카알라의 머리를 변기 안에 넣으며 고문하기도 한다. 의자에 묶인 카알라는 그 곳에서 살아 나가기 위해 과거의 추억부터 자신의 어린 시절 가정폭력 경험까지 자원화하며 온갖 종류의 화술을 동원해 동정심을 유발하며 애원하고, 설득하고, 협박하고, 빈다.

이 작품의 결말은 충격적이지만 예상이 불가능한 영역에 있지는 않다. 카알라를 결박한 의자에서 풀어준 헤더는 카알라로 하여금 자신을 칼로 찌르도록 유도하고, 집에 도착한 사이먼의 소리가 들리는 상황에서 헤더는 카알라의 귀에 ‘굿 걸’을 속삭인 채 공연은 끝이 난다. 헤더가 준비한 완벽한 복수의 방법이자 ‘큰 그림’은 카알라를 의문의 여지가 없는 가해자의 위치로 영속시키려는 것이다. 연극은 헤더가 과연 죽음을 맞이했는지 아닌지 알 수 없는 열린 결말로 종결되지만, 영화에서는 헤더가 이웃에게 남편의 내연녀가 자신을 죽이려고 한다는 식의 메모를 이전에 남긴 상황에서 헤더는 죽음을 맞이하고 경찰이 오면서 카알라와 사이먼이 (헤더가 치밀하게 설계한 ‘증거’에 기반해) 살인 혐의를 뒤집어쓰고 범인으로 지목될 것이 예상되는 결말이다. 카알라가 자신의 식기에 손을 대는 것을 경계하던 헤더의 성격대로, 깔끔하고 정돈된 계획을 성공시킨 것이다. 헤더가 선택한 복수라는 폭력의 완성은 완전 무결한 ‘피해자-되기’로 귀결된다. 자기보존이라는 인간의 내재적 욕망과 자기파괴라는 해법 사이에서 헤더는 ‘유령’이라고 부르는 트라우마와 공존하는 대신 죽음을 택한다.
영원히 서로가 말벌이 되고 거미가 되는 순환 속에서, 이 작품은 폭력의 연쇄적인 순환을 끊는 것의 어려움과 그 조건을 묻는 듯하다. 이때 흥미로우면서 문제적인 지점은 폭력이 상호 의존성이라는 인간의 보편적인 특성 속에서 등장한다는 점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를 빠져나올 수 있는 방법은 헤더가 최종적으로 한 선택처럼, 그리고 폭력의 근원인 말벌이 성장해 자신의 몸을 빠져나왔을 때 타란툴라 거미가 죽어버리는 것처럼 그러한 (강제적이거나 불가피한 방식으로 맺게 된 것이더라도) 의존성을 거부하고 죽음을 맞이하는 선택이다. 거미에게 기생하는 말벌의 유충처럼 트라우마를 몸 안에서 ‘키워 온’ 헤더는 이를 진작에 간파했고, 그는 스스로 말벌이 되어 카알라에게 새로운 절망의 씨앗을 전염시킨 뒤 소멸을 택한다. 폭력의 연쇄와 연속을 해결하는 것이 복잡한 과제가 된 이유는 ‘주체’와 ‘타자’를 포함한 모두가 서로 연루되어 있기 때문이다.
연극 <더 와스프>가 젠더의 관점에서 진일보한 이유에 대해 말하기 위해서는, 단순히 ‘수동적’ 여성상에서 벗어나 파괴적인 욕망을 추구하는 ‘주체적(?)’ 여성상을 그렸다는 전형화된 설명, 여성 배우가 표현할 수 있는 영역의 확장이라는 설명은 (틀린 말은 아니지만) 이 작품에 잠재된 가능성을 고려하면 절대 충분하지 않다. 무엇보다 헤더와 카알라 간의 관계를 단순히 무결한 피해(자)와 극악무도한 가해(자)의 구도로 환원하기에는 놓치는 게 많으며, 여성 간의 폭력, 혹은 여성 호모소셜 내부의 폭력에 내재한 굴절된 취약성과 투사를 통한 혐오를 포착했다는 점이 이 작품의 예리한 지점이다. 또한 폭력의 재생산이라는 주제를 투영한 타란툴라 사냥벌의 탄생과 성장, 그리고 카알라의 임신과 헤더의 ‘불임’의 대비가 병치되면서 표현되는데, 이러한 생명의 탄생성을 폭력의 재생산과 유비적으로 배치했다는 점은 다소 기묘한 기획으로서, 앞서 언급했던 인간의 본질적인 조건을 젠더의 차원에서 복잡하게 (재)해석할 여지를 준다. (특히, 카알라를 의자에 묶어 놓은 헤더가 스스로를 어머니로, 결박된 카알라를 아이/태아로 비유하는 대사에서는 고도의 집요함이 느껴진다.) 이 연극은 ‘원수에게도 생리대를 빌려준다’ 같은 조어처럼 쉽게 낭만화되고 하는 여성 간 ‘연대 가능성’을 배반하고 오히려 연대 불가능성의 조건을 묻는데, 이는 현재 사회에서 ‘연대’의 대상이 ‘대문자 여성’으로 국한되면서 수반하는 배제와 취약성에 대한 혐오가 팽배한 상황에서 더욱 생산적이고 현실적인 작업이라고 생각된다.
무엇보다, 이 작품에서 가장 흥미로웠던 지점은 ‘트라우마가 페티쉬로 함수변환’이라는 ‘밈’에서 알 수 있듯이 헤더와 카알라의 관계 속 폭력에서 성애적 에너지를 읽어내는 소비자/관객/수용자의 모습이다. 카알라와 카알라의 친구들이 헤더에게 저지른 성폭력의 위계와 부조리함을 부인하지 않으면서, 기나긴 복수의 과정 속에서 폭력의 에너지를 전유하려는 행동들이 보였다. 레즈비언 커플 간 폭력이 묘사된 박민정 소설가의 단편 「아내들의 학교」(2017)가 주는 통찰처럼, 섹슈얼리티와 폭력은 완벽하게 불가분의 것인가? 연대와 폭력은 배치되는가? 오히려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발생하는 회색 지대를 제대로 응시하는 것을 통해 우리 사회를 설명할 수 있는 답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