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로테스크', '코미디', 그리고 강렬한 포스터까지. 이 연극을 보러 가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현관에서 무대까지, 두 번의 반전
연극 상연 전, 나는 두 번의 반전을 겪었다. 먼저, 포스터와 캐스팅 보드 사이의 간극이다. '극단 적'이 각색하고 연출한 연극 <몰타의 유대인>은 개성 있는 포스터로 사람의 눈길을 이끈다. 포스터 하단의 손들은 마치 서로를 죽고 죽이는 살인자의 손 같다. 때로는 지옥에서 벗어나려는 고통 어린 몸부림처럼 보인다. 어쩌면, 수라도 위로 우뚝 선 저 거대한 인물을 닮고자 갈망하는 몸짓일 수도 있고. 몰타의 성채를 가리고 있는 정면의 인물은 아마 극의 주인공 '바라바스'로 추정된다. 손과 마찬가지로 이 역시 검은 실루엣으로 처리된 탓에 그의 얼굴이나 표정을 알 수 없지만, 가려졌기에 포스터는 더 강렬한 인상을 안겨준다. 인물에 대한 정보값을 극단적으로 줄인 새카만 실루엣은 극이 주요 키워드로 내세운 '그로테스크'와 잘 어울린다. 공포는 미지로부터 오지 않던가. 원작을 아직 읽지 않은 나로서는, 이 연극이 분명 어둡고 무거운 내용이리라 짐작했다.
그러나, 그 추측은 오래가지 않았다. 극장 입구에 세워진 캐스팅 보드는 전혀 다른 분위기였다. 배우들이 모두 어울려 포즈를 취하고 있는 하얀 배경의 캐스팅 보드는 극의 또 다른 키워드인 '코미디'에 집중한 모습이었다. 사진 속 배우들의 발랄한 포즈와 밝은 미소 때문에 더 그랬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서로를 죽고 죽이며 모조리 전멸하는 극의 결말과 완전히 대비되는 사진이었다. 이야기 결말과 캐스팅 보드 사이의 이질감은 극의 내용을 전혀 모르는 채 극장에 당도했던 관객들에게 적잖은 충격을 안겨줬을 것이다.
마지막 반전은 무대에 설치된 소품이었다. 연극 <몰타의 유대인>은 기존에 있던 소품 외의 별도의 장치나 물건을 추가하지 않는다. 오직 일찍이 무대에 자리했던 '풍선'만을 활용할 뿐이다. 여름 물놀이에서나 쓰일 것 같은 이 거대한 풍선들은 소파, 지폐, 보석 반지 등의 모습을 띠고 있다. 소파를 제외하면 대체로 값비싼 물건의 모습이다. 이처럼 풍선이 가득 놓인 무대 뒤편은 마치 바라바스의 재물 창고를 상징하는 듯하다. 풍선은 무대를 장식할 뿐만 아니라 배우들에 의해 직접 사용되기도 하는데, 배우들은 이 풍선 위에 앉고 누우며 대본을 연기한다. 주목할 점은 이 소품의 재질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무대 위 소품들은 모두 풍선이다. 이 거대한 튜브들은 고무 특유의 가벼운 무게 덕에 배우들이 들고 나르기에 용이하다. 풍선에 바람을 뺀다면 무게는 더 줄어들 것이다. 그때는 두 손 가득 안을 필요도 없다. 어린아이도 한 손으로 가지고 놀 수 있고, 만약 세찬 바람이 불기라도 한다면 저 멀리 날아가 버릴 테다. 바라바스의 재물을 상징하는 소품들이 이토록 연약하다. 또, 아기자기 모여있는 풍선의 모습은 마치 놀이공원에 놀러 온 것 같은 유치한 감상을 준다. 그 감상은 재산을 지키고자 버둥대는 바라바스의 집착과 상충하며 아이러니를 자아낸다. 나는 강렬한 포스터와 배우들의 유쾌한 표정, 반짝이는 고무의 광택 속에서 감히 연극의 내용을 추리하지도 못하고, 기대 반 우려 반으로 막이 오르기를 기다렸다.
연극 <몰타의 유대인>은 인터미션이 없는 극이다. 장장 2시간 동안 배우들은 문어체가 가미된 수많은 대사들을 연기한다. 극의 내용은 더 놀랍다. 보통의 이야기 전개 방식이 기승전결이라면, <몰타의 유대인>은 모든 장면이 클라이맥스다. 주인공 바라바스에게 끝없이 위기가 닥쳐오고, 위기는 점점 몸집을 불려 종국에는 국가 단위로 커진다. 그러나, 바라바스는 이에 아랑곳하지 않는다. 어떤 크기의 위기든 모두 '살인'으로 귀결시킨다. 연극의 소개 문구인 "광기 가득한 죽음의 파티"는 결코 빈말이 아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된 바라바스의 생존 본능과 탐욕에 혀를 내둘렀다. 연극의 말미에는 관객인 내가 배역을 맡은 배우를 걱정할 정도로 바라바스의 에너지는 뜨거웠다.
연극의 줄거리는 단순하다. 그야말로 서로 죽고 죽이는 이야기다. 무대에 오르는 인물들은 모두 빠짐없이 죽는다. 그리고 그 죽음의 배후에는 언제나 바라바스가 있다. 바라바스는 자기 딸인 '아비게일', 수녀, 수사(修士), 섬의 총독, 타국의 장군 등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죽인다. 이런 내용의 연극은 사실상 줄거리가 중요하지 않다. 주인공의 몰락이 예고되어 있음에도 눈을 뗄 수 없도록 관객을 압도할 힘이 관건이다. 관객을 굴복시킬 만큼의 힘이. 그렇다면, 연극 <몰타의 유대인>은 어땠는가?
노래가 가지는 양날, 너무 배부른 <몰타의 유대인>
답은 명확했다. 즐겁고, 아쉬웠다. 배우들의 연기에 아낌없는 박수를 보낸다. 특히 어마어마한 양의 대사와 110분 분량의 광기를 소화해 낸 바라바스 역의 곽지숙 배우에게 바라바스의 광기만큼 뜨거운 박수를 보내고 싶다. 페르네즈 총독 役 권 일 배우, 캐서린 & 필리아 보르자 役 백은경 배우, 돈 마티아스와 자코모 수사 役 안병찬 배우의 매력적인 발성은 잊을 수 없을 것이다. 또한, 안병찬 배우와 이승현 배우의 찰떡같은 호흡은 연극이 돈 마티아스와 돈 로드윅의 결투까지 매끄럽도록 이끌어주었고, 자코모 수사와 베르나딘 신부의 장면에서 이 호흡은 더욱 빛을 발해 관객들에게 끊이지 않는 웃음을 선물해 주었다. 극 전반의 유쾌함을 담당해 준 아비게일 役 심연화 배우, 카리스마와 농염함을 함께 선보인 칼리마스 & 벨라미라 役 임윤진 배우, 바라바스에 비견할 광기로 극의 기이함을 한껏 끌어올린 성근창 배우 모두가 연극 <몰타의 유대인>을 완성한 주역이었다. 이번 <몰타의 유대인>은 내게 '극단 적'을 알게 해준 뜻깊은 자리였다.
동시에 연극 <몰타의 유대인>은 너무도 배부른 식사였다. <몰타의 유대인>의 각본은 강렬하다. 이야기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극한으로 치닫는다. 바라바스는 딸을 살해하고, 딸의 고해성사를 들은 베르나딘 신부를 살해하고, 자신의 충복이었던 이싸모어를 내버리고, 몰타섬을 패전으로 내몰며 페르네즈 총독과 칼리마스 장군의 죽음을 꾀한다. 연극 하나에 최소 두세 개 이상의 클라이맥스가 존재한다. 이미 각본부터 숨 쉴 틈 없이 벅찬데, 연극 <몰타의 유대인>은 이에 노래까지 더한다. 핑크 플로이드, 신디 로퍼, 마돈나 등 친숙한 노래가 부지런히 흘러나온다. 배우가 직접 이를 노래하기까지 했다.
극 중간에 노래를 삽입하는 건 여러 이점이 있다. 첫째, 노래를 통해 많은 대사와 장면을 생략할 수 있다. 신디 로퍼의 'Girls Just Want to Have Fun'이 흘러나왔던 장면을 예로 들어보자. 이 장면은 바라바스의 딸 아비게일이 수녀원에 위장 잠입한 시점이다. 아비게일이 수녀와 신부들을 잘 속여넘기고 있음을 그녀가 그들과 함께 어울리고 노래하는 것으로 대신 표현한다. 수녀원 사람들과 함께 줄지어 춤추고 노래하려면, 먼저 아비게일이 그들과 원만하게 지내고 있어야 가능한 모습이니 말이다. 단 3분도 되지 않을 시간 동안, 연극은 수녀원 모두에게 의심을 사지 않고 모범적으로 수녀 생활을 완수한 아비게일의 지난 나날을 그려냈다. 동시에 이는 바라바스의 계획이 차질 없이 수행되고 있음을 암시한다. 둘째, 노래는 관객을 환기시킨다. 소극장 좌석이 주는 피로함을 씻기고, 긴 러닝타임으로 흩어진 관객의 집중력을 모은다. 그리고 극에 흥겨움까지 더한다. 노래가 주는 이점이다.
반면, 노래는 양날의 검이다. 적절한 시기에 알맞은 분량만큼 삽입하지 않으면, 노래는 오히려 극의 몰입을 해친다. 극에 삽입된 핑크 플로이드의 'Money'를 떠올려보자. 'Money'는 연극의 초반부 혹은 극의 장면이 전환될 때 아주 짧게 삽입된다. 동전이 짤랑이고, 돈통이 여닫히는 'Money'의 인트로는 황금만능주의에 점철된 <몰타의 유대인>의 분위기와 잘 어우러진다.
그러나 연극의 다른 장면, 극의 후반부에 등장한 마돈나의 'Material Girl'은 다르다. 마돈나의 노래가 삽입된 극의 후반은 바라바스의 걷잡을 수 없는 광기가 장내를 장악한 상황이었다. 개인 단위로 시작했던 바라바스의 복수는(복수 대상이 총독이었으므로 사실 바라바스는 이때부터 반역죄에 해당했다.) 국가 단위로 규모가 커져 버렸다. 즉, 연극의 후반은 이미 각본의 힘이 어마어마하게 커진 시점이었다. 연극 <몰타의 유대인>은 여기서 바라바스가 직접 노래를 부르는 장면을 추가했다. 이는 연극이 박차를 가하는 시점에 역으로 고삐를 당긴 셈이 됐다. 또한, 아무리 친숙한 노래인들 마돈나의 'Material Girl'의 가사는 결국 외국어다. 후렴구를 번역 없이 완창하는 것은 가사에 대한 이해가 없는 관객을 지루하게 만들 수 있다. 무대장치와 퍼포먼스가 이를 덮을 만큼 화려하지 않다면, 더더욱 그렇다. 이야기는 끝을 향해 가는데 이미 죽어버린 아비게일까지 무대에 다시 올린 것은 관객의 몰입을 해칠 수 있는 모험이었다. 각본과 배우가 가진 순수한 힘을 믿고, 거기에 극을 온전히 맡겨도 충분한 장면이었다.
생략함으로써 완성된 장면도 있었다. 바로 페르네즈 총독과 칼리마스 장군의 대립 장면이다. 대학로예술극장은 다른 소극장에 비해 무대가 넉넉한 편이었지만, 튀르키예의 함선과 몰타의 성벽을 표현할 만큼은 못 되었다. 이때 제작진의 결단력이 반짝였다. 연극 <몰타의 유대인>은 과감히 생략하는 전략을 내세웠다. 이 장면은 페르네즈와 칼리마스 두 인물만이 등장한다. 별다른 소품도 없다. 조명도 최소한으로 사용되었다. 무대는 모두 꺼지고, 두 배우는 각각 2층의 비상구 통로에 서서 서로를 마주 본다. 단 두 개의 불빛만이 페르네즈와 칼리마스를 비춘다. 안전을 위한 대피로가 제2의 무대로 새로이 떠오른 순간이었다. 관객은 배우의 열연과 대사, 약간의 효과음에 기대어 어둠 속에서 전쟁을 그려낸다. 이때 어둠은 관객이 저마다 완벽한 장면을 그려낼 수 있도록 도와주는 훌륭한 도화지였다. 소품이 조금이라도 등장했더라면 관객은 완벽한 장면을 그려낼 수 없었을 것이다. 역설적으로, 모든 것을 생략한 덕에 전쟁의 큰 스케일을 소극장 무대에 담아낼 수 있었다. 각본과 배우들이 가진 힘, 관객의 상상력에 기대어 연극 <몰타의 유대인>은 지중해에 위치한 일촉즉발의 몰타를 완성해 냈다.
'극단 적'이 제작한 연극 <몰타의 유대인>은 배우들의 아낌없는 연기로 관객에게 즐거운 감상 경험을 안겨준다. 비록 너무 배부른 식사였으나, 이토록 거북할 만큼 장면에 욕심을 쏟는 이들이 어디까지 더 나아갈 수 있을까 기대되는 것 또한 사실이다. 배불렀지만, 일단 가득한 식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