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다른 사람의 말은 다른 사람의 말일 뿐 - 사랑의 탐구

글 입력 2024.09.19 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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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카메라 워킹은 다급하다. 추격전을 연상시키듯 카메라는 잰걸음으로 주인공 '소피아'의 사랑의 현장을 포착한다. 로맨스를 주제로 한 영화에게는 다소 익숙하지 않은 움직임이겠으나, 카메라로써는 현장을 기록하고 기억한다는 제 본분에 충실한 움직임이다. 그도 그럴 것이 소피아의 행동력과 널뛰는 감정은 아무리 뒤쫓아도 따라잡을 수 없을 만큼 빠르기 때문이다. 소피아의 다음 행동은 종잡을 수 없었고, 극장에서는 웃음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주인공 소피아는 마치 고대부터 근현대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철학자에 의해 매 시대 정의를 새로 했던 '사랑'의 의인화 같다. 존재하지 않는 정답을 찾아 쉴 새 없이 방황하고, 배회한다.

 

영화에서 소피아는 크게 두 가지 사랑을 한다. 먼저, 오랫동안 함께 동거한 남편 '자비에'와의 사랑이다. 자비에는 인문사회학 관련으로 논쟁하기를 즐겨하는 학자로서, 노인을 상대로 철학을 강연하는 교육자 소피아와 꼭 잘 어울리는 한 쌍으로 보인다. 그러나, 자비에에게는 크나큰 결점이 있다. 소피아는 자비에에게 성적으로 끌리지 않는다. 자기 남편이 도무지 섹시하지가 않다. 소피아와 자비에는 벽을 사이에 두고 각자의 침대에서 굿나잇 인사를 보내는 걸로 밤을 마무리한다. 긴 세월을 함께했음에도 여전히 일주일에 서너 번씩 관계를 가진다는 친구 프랑수아즈-필립 부부와 대조되는 장면이다. 물론, 소피아-자비에 부부는 섹스가 주는 쾌락보다 대화가 주는 즐거움과 고정된 관계에서 오는 안정감을 더 즐기게 된 걸지도 모른다. 미지로부터 오는 불안감과 설렘, 긴장감(이 영화에서는 특히 성적 긴장감)이 사그라들고, 그와 반비례하여 유대와 연대는 더욱 깊어졌을 수도 있다. 어쩌면, 소피아가 마흔을 바라보게 되면서 문자 그대로 '불혹'의 나이로 접어들게 된 걸지도 모를 일이다. 섹스 자체에 흥미가 떨어진 것이다.

 

불행히도, 소피아는 섹스에 달관하지 못했다. 불행히라 표현하는 이유는 소피아가 남편으로부터 성적 만족감을 얻을 수 없는 자신의 처지를 서글퍼하기 때문이다. 소피아는 주유소에서 기름을 넣으며, 맞은 편 커플의 스킨십을 쓸쓸히 바라본다. 소피아는 흥분과 육체적 쾌락 외에 다른 것이 도외시되는 경험을 다시금 겪을 수 있기를 소망한다. 그러나 자기 남편 자비에와는 아니다. 소피아가 자비에와의 섹스가 단조로워진 참인지 혹은 그가 아내를 충분히 만족시킬 만한 능력과 배려가 부족한 탓인지 그 이유는 명확하지 않지만, 어쨌든 소피아는 자비에와 섹스할 수 없는 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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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소피아에게 혜성처럼 등장한 인물이 '실뱅'이다. 실뱅은 시골 출신의 인테리어 수리업자로 육체노동과 실제적인 일에 종사하는 인물이다. 거두절미하고, 섹스 심벌로 자주 대표되는 '내 집에 침입한 수상할 정도로 매력적인 야성미의 남자'가 곧 실뱅이다. 그런 환상 속의 남자가 소피아의 펜션을 찾은 것이다. 소피아는 자신의 육체적인 쾌락을 충족시켜 주는 실뱅과 지적 만족감을 채워주는 남편 자비에 사이에서 갈등한다. 영화에서는 소피아의 이 두 가지 사랑을 쇼펜하우어와 플라톤의 말을 인용해 각각 '에로스적 사랑'과 '플라토닉 사랑'으로 정의한다. 무엇이 진정한 사랑일까. 소피아는 고민한다.

 

소피아는 결국 두 가지 사랑에서 모두 실패한다. 소피아에게 섹스는 사랑의 활력이다. 요란한 시동음을 울리고, 끝없는 질주를 허락하는 윤활유며 원료다. 소피아가 주유소에서 자동차에 넣던 바로 그 기름이다. 반면에 지적 만족감은 관계의 지구력이다. 광란의 질주는 짜릿함을 선사해 주지만 타이어를 쉽게 마모되게 한다. 백만 리터의 연료가 있다고 한들, 타이어가 튼튼하지 못하면 자동차는 달리지 못한다. 반대로, 타이어만 있다면 차는 견인이나 여러 사람의 도움으로 어찌저찌 굴러갈 수 있다. 소피아에게 기름은 실뱅이며, 타이어는 자비에다. 소피아는 실뱅과 연애할 수 있으나 결혼할 순 없고, 자비에와 결혼할 수 있으나 연애할 순 없다. 영화의 말미에서 결국 소피아는 본격적으로 자비에와 관계가 흔들리기 시작한 주유소에서 실뱅과 이별하며 수미상관의 구조를 완성한다. 소피아의 어깨 위에 쌓인 눈만이 그의 곁을 지킨다.

 

영화에서 소피아-실뱅의 결별은 처음이 아니다. 소피아-자비에의 결별 또한 처음이 아니다. 소피아는 두 남자와 만나고, 이별하고, 재회하며 다시 안녕을 고한다. 지나간 사랑을 되돌리려는 스콜피온스의 'Still Loving You' 가사처럼 말이다. 관객은 에로스-플라토닉 사랑의 반복을 통해 사랑을 함께 탐구한다. 그러나, 영화 장면만으로는 탐구가 충분치 않다. 영화 <사랑의 탐구>가 보여주는 사랑은 제한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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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사랑은 성적 끌림을 전제로 한다. 이 영화의 원제는 < The Nature of Love >, 즉 '사랑의 본질'이지만 단어가 가지는 규모에 비해 영화의 사랑의 크기는 작다. 영화와 마찬가지로 주인공 소피아의 사랑 또한 섹스의 여부에 집중되어 있기에 플라토닉에 대한 논의는 다소 약해졌다. (자비에와 헤어진 최종 이유는 결국 섹스였고, 실뱅과의 만남과 재회도 섹스로 이루어졌다. 자비에와 두 번째 이별 역시 섹스가 원인이었고, 실뱅과의 이별 장소도 엑스트라 커플의 스킨십이 이루어졌던 주유소였다.) 축소된 플라토닉에 대한 고찰은 '극우주의적 정치 성향'이란 실뱅의 극단적인 설정으로 그 빈자리를 메꿨다. 다른 문화권/인종의 사람을 자연스레 타자화하는 '선량한 차별주의자'인 실뱅. 음모론을 믿고, 국수주의자의 시집을 즐겨 읽는 실뱅. 영화는 앞에 열거한 설정의 힘을 믿고, 실뱅은 깊이 있는 대화가 불가능한 인물이라고 주장한다. 더군다나 소피아의 정치 성향은 아무리 봐도 좌파에 가까우니, 이러한 주장은 분명 설득력이 있다. 그러나, 이는 플라토닉에 대한 만족스러운 설명을 뜻하지 않는다.

 

따라서 <사랑의 탐구>는 섹스가 없거나 중요하지 않은 사랑에 대해 상세한 표본을 제공해 주지 않는다. 그러나, 주인공 소피아가 벌이는 모순에는 의의가 있다. 소피아는 다양한 문화권을 존중할 줄 모르는 차별주의자 실뱅을 거부한다. 그러나, 소피아 자신도 익숙하지 않은 언어권의 이름을 발음하기를 낯설어하고, 단 한 음절뿐인 이름 '순'을 기억하지 못한다. 낯선 발음 조합의 단어를 연습하고자 하지 않고, 당황한 얼굴로 그냥 넘겨버린다. 이름을 부를 줄 모른다면 어떻게 그를 부르겠다는 말인가? 자비에와 차 안에서 벌였던 논쟁과 그 이후 있었던 실뱅과의 다툼에서 소피아의 발언도 주목할 만하다. 소피아는 도시 태생의 고학력자 집단, 이른바 '엘리트' 집단과 그렇지 않은 사람 사이에는 '급'이 있다고 믿는다. 소피아는 실뱅에게 교정을 시도할 때는 활발하지만, 정작 자신의 의견을 확실히 표현해야 하는 상황에서는 멋쩍은 웃음으로 방어한다. 이는 자비에의 헌신을 의심하지만 그를 직접 비난하기를 거부했던 영화 초반부 소피아의 체면 차린 미소를 떠올리게 한다. 사랑의 정의(定義)가 소피아의 사랑을 실패하게 한 유일한 이유는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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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은정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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