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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기변환]사랑의 죽음, 후안 벨몬테, 수정.jpg

[illust by Yang EJ (양이제)]

 

 

필사즉생(必死卽生). 살고자 하면 죽을 것이고 죽고자 하면 살 것이다, 명량 해전에서 이순신 장군은 이렇게 외쳤다. 자신의 육신과 영혼을 걸고 전투에 임하는 장군의 굳센 의지를 엿볼 수 있는 말이다. 여기서 방점은 '죽고자 하면'에 찍힌다. 단순히 몸을 격렬히 움직이는 것에 그쳐서는 안 된다. 마음에서부터 죽음을 미리 상상하고, 앞으로 닥칠 위험을 진심으로 이해하고 감내해야 한다. 눈앞의 피상적인 적이 아니라 내면의 두려움과 싸우는 것, 그것이 사즉생 정신이다.

 

명량 해협에서 이순신 장군이 혼을 불태운 것도 벌써 수 세기 전이다. 하지만 오늘날에도 필사즉생 정신은 여전히 살아 숨 쉰다. 최선을 다해라, 후회 없이 임해라, 미련이 남지 않도록 불태워라 모두 두려움을 이기고 세상과 진지하게 맞서기를 요구하는 말이 아닌가. 장군의 정신을 특히 적극적으로 좇는 분야가 하나 있다. 바로 예술이다. 동명의 만화를 원작으로 하는 애니메이션 <블루 자이언트>에서는 다음과 같은 대사가 나온다. "넌 무대에서 수십 번 수만 번 죽어야 돼." 초짜 색소폰 연주자 '다이'가 숙련된 재즈 피아니스트인 '유키노리'에게 하는 말이다. 즉흥적인 애드리브가 매력인 재즈에서 유키노리는 오직 안전한 연주만을 추구한다. 다이는 그에게 실패와 그로부터 오는 성장을 두려워하지 말기를 권한다. 안주하지 않기를 권한다. 설령 서툴지라도, 청중 앞에 내장을 까뒤집어 보이며 카타르시스를 느껴보라고 권한다. 그리고 무대의 막이 내릴 때 세상이 이전과 달라지는 경험을 해보기를, 설명할 수 없는 처참함 또는 황홀경을 맛보기를 유키노리에게 권한다. 마치 <사랑의 죽음. 피비린내가 눈에서 떠나지 않아. 후안 벨몬테>(이하 <사랑의 죽음>)의 안헬리카 리델처럼.

 

 

Liebestod © Christophe Raynaud de Lage 4.jpg

Liebestod © Christophe Raynaud de Lage

 

 

황홀경을 맞이한 신비주의자는 모두 죽고 싶어 한다. 안헬리카가 말했다. <사랑의 죽음>은 무대 중앙에 자리한 안헬리카와 소박한 탁자, 그 외 몇 가지 소품만으로 초반 내용을 전개한다. 탁자 위에는 포도주가 든 와인병, 유리잔, 소독솜 그리고 안헬리카를 위한 자해용 연장이 놓여있다. 안헬리카는 죽음을 갈망한다. 그는 죽음을 추구함으로써 역설적으로 죽음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고 했다. 여기서 죽음은 두 가지로 해석될 수 있다. 더 이상 생기가 돌지 않는 허무로써의 죽음 그리고 우리의 영혼을 절정과 황홀경으로 이끌어줄 인도자로써의 죽음이다.

 

죽음의 두 번째 의미는 투우를 떠올려 보면 이해하기 쉽다. 투우사는 성난 소를 계속해서 도발한다. 한 번에 심장을 찌르지 않고, 작살을 여러 군데 꽂으며 붉은 천을 교묘하게 흔들어 소를 끝없이 흥분시킨다. 아무리 잘 훈련된 투우사라 한들, 소와 맨몸으로 겨룬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하물며 상대가 미쳐 날뛰고 있다면 더더욱 그렇다. 그러나 투우사는 그 모든 위험을 각오한다. 장내를 극한으로 몰아 관객들에게 감명을 주기 위해, 인간을 위해 희생당하는 소에 대한 존중으로, 죽고자 결심하며, 죽음이 도사리는 무대에 오른다. 투우란, 투우사로 대표되는 인간과 그를 향해 맹렬히 돌진하는 죽음과의 사투에 대한 은유다. 동시에 죽음을 감내하는 것은 투우사뿐만 아니다. 맞은편의 소 또한 마찬가지다. 소는 이미 여러 번 꽂힌 작살에도 굴하지 않고, 자기를 죽일 수 있는 존재와 맞서 싸운다. 투우장은 죽고자 하는 두 생명의 의지가 격돌하는 장소다. 그리고 그 충돌에서 관객은 무대 위 맥동하는 두 생명에게 경외심을 품는다.

 

다시 안헬리카의 말로 돌아와 보자. 안헬리카는 죽음을 추구함으로써 죽음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고 말한다. 마치 투우장의 투우사처럼, 달려드는 소처럼 생의 극한에서 오는 절정을 추구하다 보면 삶의 허무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렇게 해서 황홀경을 맞이한 신비주의자는 다시금 죽고 싶어 한단다. 생에 다시는 오지 않을 그 감동을 재차 느끼기 위해, 그리고 더는 기대할 게 없는 텅 빈 세상에 작별을 고하기 위해. 안헬리카는 사랑하는 이가 자신을 죽여주길 원한다. 맹렬히 타오르는 감정으로 자신을 폭력적으로 대해주기를, 둘 중에 누구 하나 모자람 없이 흥분하기를, 죽기 직전 눈앞에 주마등이 스쳐 지나가는 것처럼 감정이 자신의 전 생애를 꿰뚫어주길 원한다.

 

초반부의 내용 대부분은 안헬리카의 발광으로 이루어져 있다. 안헬리카는 양 손등과 양 무릎 위에 칼날로 생채기를 낸다. 양팔과 양다리를 자르고 가상의 뿔을 꺾는 듯한 동작으로 투우장의 소가 되기를 갈망한다. 바닥에 드러누워 오르가슴을 느끼거나, 자기 피로 빵을 적셔 먹는다. 죽음을 혀끝으로 맛보기까지 했으나, 안헬리카의 갈증은 사라지지 않는다. 결국, 고통스러워하던 안헬리카는 방 밖으로 나선다. 막이 다시 올라가면, 안헬리카는 소 앞에 서 있다. 본격적으로 죽음을 찾아 나선 것이다. 안헬리카는 눈앞의 소를 비난한다. 같은 소라도 된 것처럼 손가락으로 뿔 모양을 만들고, 발을 쿵쿵 구른다. 때로는 우스꽝스러운 움직임으로 그를 놀리고, 때로는 쓰다듬고 옷을 벗어 그를 유혹한다. 그러나 소는 안헬리카를 죽이지 않는다. 안헬리카는 다시 갈증을 느낀다. 이윽고, 무대 위로 도축된 소의 양면이 천천히 내려온다. 안헬리카는 분리된 소 가운데 서서 칼을 빼 들었다가 다시 검집에 집어넣는다. 이때 정육점에서나 볼 법한 거대한 근육 덩어리가 관객에게 시각적 자극을 선사한다. 관객은 생소한 무대 소품의 등장으로 무대에서 눈을 돌리지 못한다. 이 장면에서 안헬리카는 대사 하나 읊지 않으나, 그는 자신을 쳐다보는 수백의 눈동자에게 소리 없이, 그리고 분명하게 외쳤다. '아무도 나를 죽이지 않는구나. 그렇담 내가 나를 죽여주마. 이제 철저히 나를 해부하겠다, 마치 이 두 동강 난 소처럼'이라고.

 

안헬리카는 극의 상당한 시간 동안 자신을 신랄하게 분해한다. 안헬리카는 솔직하지 못하다. 안헬리카는 글을 쓰지만, 자신을 숨기는 글을 쓴다. 안헬리카는 대가大家가 되기를 원한다. 안헬리카는 사람들의 애정을 바라며 무대에 오른다. 안헬리카는 사람들의 박수갈채를 바라며 무대에 오른다. 안헬리카는 사랑받고 싶어 한다. 그러나 안헬리카를 칭찬하는 팬들은 돌연 안티가 될 수 있는 사람들이다. 겨우 그 정도 수준의 애정이다. 안헬리카가 서고 싶어 하는 파리의 대극장은 어떠한가. 신비는 진작에 살해당하고, 공허뿐인 권리만 남았다. 안헬리카는 대극장에 서지 못하고, 대가가 되지 못할 것이다. 배우는 안헬리카의 동료가 되어주지 못한다. 안헬리카는 누구나 그러하듯 품고 있을 저열한 욕망을 권위로 포장하려 드는 배우의 가식을 끔찍해한다. 안헬리카는 "창녀와 여배우", 그 둘 중의 하나를 고르자면 "창녀"를 고를 것이다. 안헬리카는 그렇한 마음을 글에 담지 않는다. 그러나 앞서 말했듯, 솔직하지 못함으로써 안헬리카가 얻은 것은 한없이 가벼운 관심과 퇴색된 무대, 실패한 관계뿐이다. 발버둥 치며 오로지 일, 일, 일만 해왔는데 주변에 안헬리카를 진정으로 사랑해 줄 이는 없다. 극장은 죽었고, 연극은 죽었고, 사랑은 죽었다. 그렇게 해서 나온 안헬리카의 작품도 훌쩍 성장한 관객에 비해 한참 못 미치는 수준이다. 안헬리카는 고독하다. 수십 분 내내 안헬리카 리델은 안헬리카 리델을 쉴 새 없이 맹비난한다. 자기희생적 퍼포먼스로 자자한 그의 명성을 직접 확인할 수 있는 장면이었다. 안헬리카 리델은 관객 앞에서 자기를 끔찍할 정도로 도륙 내버렸다. 무대 위에서 죽은 것이다.

 

스페인에서 온 한 신비주의자의 눈물겨운 노력에도 불구하고, 결국 신은 죽음을 맞이한다. 극의 가장 첫 장면에서 등장한 신은 투명한 관에 담겨 무대 밖으로 퇴장한다. 지금의 교육은 각종 규범과 이론, 공식에 근간을 둔다. 이를 통해 사람들이 마음속에 의심을 지우도록 훈련시킨다. 로봇처럼 분명해지기를 요구한다. 신이 실제로 존재하든 그렇지 않든, 스스로 의심해 볼 기회조차 강탈한다. 그 속에서 신은 죽는다. 신비는 죽고, 안헬리카에게 황홀경을 안겨줄 소도 죽는다. 자신과 공명하는 이는 세상에 의해 손발이 잘렸다. 안헬리카는 차라리 사자를 죽일 수 있는 아프리카에 가고 싶어 한다. 나를 죽여줄 사자가 있는 곳으로 떠나고 싶어 한다. 그때 아프리카에서 한 청년이 안헬리카를 찾아온다. 둘은 서로의 손을 맞잡고 춤을 춘다. 막이 내린다.

 

장황한 대사와 날 것의 감정 표출, 과감한 노출에 당황스러울 순 있으나 극의 내용이 난해한 것은 아니다. 연극은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의 검은 비석 등 대중에게 친근한 오브제를 활용하거나, 직관적인 이미지(태고의 순수를 말하기 위해 안헬리카는 원숭이 사진을 가져왔다. 원숭이는 진화 이전의 인류를 상징하는 동물이다.)를 사용하는 등 단순하게 내용을 전개한다. 무대 장치도 단출하다. 관이 아무리 화려한들, 수의가 아무리 수려한들 죽으면 그게 다 무슨 소용이겠는가. 안헬리카는 무대 위에서 죽기로 각오한 사람인데. 그러니 다른 것은 아무래도 상관없다. 죽음은 늘 초라하다. 그러한 안헬리카 리델의 맹렬한 사(死)의 의지를 보며, 나는 세상 어딘가에서 몸부림치고 있을 그 많은 신비주의자의 생의 의지를 떠올렸다. 살고자 죽으려 하는 사람들을 생각한다. 두려움과 싸우는 인간의 마음을 생각한다.

 

 

사랑의 죽음_포스터.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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