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무엇이 삶을 의미 있게 만들까? - 연극 이방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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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베르 카뮈의 <이방인>을 원작으로 한 연극이 소극장 산울림과 만났다. 프랑스 작가인 알베르 카뮈는 실존주의자로 알려져 있지만 그는 정의되기를 거부한다. 터무니없음과 부조리의 문법으로 인간 존재의 의미를 해체한 작품 <이방인>. 문학 작품이 된 철학적 질문을 소극장 산울림은 연극으로 어떻게 표현해 냈을까. 여러 번 곱씹으며 읽어도 어려운 이 작품을 생동감 있게 재현하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 한 인물의 고뇌와 독백이 연극으로 어떻게 표현될지 의심스럽기도 했다.
연극의 매력은 ‘울림’에 있다. 다시 돌아오지 않는 순간의 연기에서 느낀 전율이 어떤 메아리가 되어 다시 나를 언제 찾아올지 모른다. 밀도 있는 대사들과 가까운 거리에서 마주하는 살아있는 인물의 눈은 책으로 읽힌 쉽게 상상이 가지 않던 어두운 감정을 그려내는 것을 도와주었다.
주인공 '뫼르소'의 이유 없는 선택
<이방인>의 1부에서 주인공 뫼르소는 주위의 모든 것들을 그의 시점으로 설명한다. 그가 어떻게 세상을 바라보고 있는지가 드러난다. 중요한 삶의 순간을 결정하거나 어떻게 시간을 사용하는지에 있어서 그가 하는 대답에는 큰 의미가 담겨 있지 않다. 연극에서 나에게 가장 잘 들린 뫼르소의 독백은 ‘굳이 그러지 않을 이유가 없어서’다. 그에겐 모든 게 그런 식이다. 커피를 마시는 것부터, 결혼을 하는 것까지 타인의 제안을 받아들이는 데에 그럴싸한 이유가 없다. 그래서 의미도 없다. 그의 대사들은 삶의 덧없음과 무상함을 뽐낸다.
‘하루하루는 서로 넘치고 마는 것이다. 세월은 이제 자신의 이름을 잃어버리게 되었다. 어제 혹은 내일이라는 말만이 겨우 그 의미를 잃지 않고 있을 뿐이었다.”
“왜 나하고 결혼을 하지?” 나는 그런 건 아무 중요성도 없는 것이지만….., 그녀가 원한다면 결혼해도 좋다고 설명해 주었다..”
‘물론 나는 어머니를 사랑했었다. 그러나 그것은 아무 의미도 없다.”
“이제 나에게는 일요일이 또 하루 지나가고, 어머니의 장례식도 끝났고, 내일은 다시 일을 시작해야 할 것이고, 그러니 결국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매일매일’이라는 해가 가진 폭력성
뫼르소는 특별한 이유를 가지고 행동하지 않기에 모든 인과 결과를 매일 고정된 자리에 있는 ‘해’로 설명한다. 처음부터 끝까지 이방인 곳곳에 해에 대한 흔적이 있다. 그 흔적이 사람을 죽이게 된 원인이 될 줄은 몰라도 상당 부분은 ‘해’를 중심으로 사건의 인과와 배경이 설명되고 있다.
시간적의 기능을 하는 해는 정직하다. 오래 쐴수록 우리의 피부가 그을리는 것처럼 해의 시간 측정 능력은 정확하다. 우리에게 시간을 주고 이를 세는 것의 기준이 되는 해로서의 역할은 물리적인 기능만을 포함한다. 하지만 인간이 실질적으로 사용하는 시간은 보다 많은 가치와 감정을 담을 수 있는 그릇이다. 25년 뒤에 부자가 되어 다시 나타난 자식을 알아보지 못하고 잔인하게 죽인 그의 가족 이야기에 대해 ‘자연스러운 이야기’라고 말한다. 뫼르소는 시간의 물리적인 속성만 이해하고 그 시간에 인간이 시간에 부여하는 참된 질적인 의미를 모르기 때문에 가능한 설명이다.
똑같은 태양 아래서 모든 사람의 하루가 평등하지는 않다. 절박한 한시 한시를 보내고 있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게으름의 미학으로 여유롭게 시간을 흘려보내는 사람이 있다. 모두에게 똑같이 주어진 시간 속에서 각자는 다 다른 의미를 담아 시간을 보낸다. 다양한 사람들의 하루와 무관하게 해는 매일매일 뜬다. 어쩌면 이방인은 개인에게 의미 부여되는 각자 다 다른 하루의 가치와 무관하게 항상 고정된 자리에 있는 해가 가진 폭력성을 이야기하는 것 같다.
무엇이 삶을 의미 있게 만들까?
우리가 뫼르소와 다른 군상을 하고 있다면 “무엇이 우리를 살아가게 하는가?” 질문하게 한다. 뫼르소는 ‘그냥’이라고 답할 것이며 <이방인>은 여기에 철학적 근거와 논리를 부여해냈다고 생각한다. 뫼르소의 삶은 오히려 내게 삶의 도처에 있는 ‘그냥’이라는 답을 경계하게 한다.
시간에 의미를 부여할 줄 모르는 그가 세상을 사는 방법이 1부에서 드러났다면 2부에선 재판 과정을 통해 그가 의미 없이 보낸 시간들에 의미가 부여되며 재정의 된다. 법의 심판을 받기 위해 그의 행동들의 옳고 그름과 원인이 명확하게 진단되어야 한다. 이 과정에서 그의 발자취에 이유가 붙여진다. 이때 이유는 피고 자신이 아니라 변호사와 검사에 의해서 붙여진다. 이를 통해 그의 행동은 재정의되고 해석이 되며 그렇게 그가 보낸 시간에 의미가 형성된다. 이에 대한 평가는 판사의 몫이다. 어쩌면 우리가 시간에 의미를 부여하지 않으면 타인에 의해 재정의된다는 것을 경고하는 것 같다. 행위의 주체성을 갖고 있어도 그 의미를 설명할 수 없다면 그 주체성에 대한 주도권도 뺏기는 것이다.
재판 도중 뫼르소는 외친다. “때로 나는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가로막고 이렇게 말하고 싶었다. 그렇지만 도대체 누가 피고입니가? 피고라는 것은 중요합니다. 나에게도 할 말이 있습니다.”. 벽에 양팔을 뻗어 부르짖는 뫼르소의 모습이 기억에 남는다.
무감각과 무의미의 반대는 당연하게도 의미와 감각이다. 시간을 어떤 감각으로 느껴서 여기에 어떠한 의미를 부여하는 가는지가 우리가 사는 이유를 만든다. 시간을 더 효율적으로 관리하기 위한 스케줄러를 보면 때론 테트리스 게임이 떠오른다. 뫼르소는 이렇게 테트리스 같은 방식으로 삶을 사는 사람들에게 거울이 되어준다. 외적으로, 질적으로 흘러가는 시간은 사실 중요한 게 아님을 한 번 생각하게 된다. 정해진 시간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를 넘어서서 어떻게 의미를 부여할 것인가가 삶의 의미를 만들어내는 고민이기 때문이다.
삶의 유한성을 찬양하다.
유한성에서 오는 집착과 감정 앞에서 이방인의 주인공 뫼르소는 초연하다. 이방인의 첫 문장 ‘오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다. 어쩌면 어제였는지도 모르겠다.’는 오늘과 어제라는 시간적 개념이 덧없음을 느끼게 한다. 또한 죽음 앞에서는 모두가 평범한 인간일 뿐. 언젠가 한 번은 겪게 될 일이라는 위로에 쉽게 동의하는 뫼르소이다. 어차피 인간은 죽고 뫼르소는 시간이 주는 의미적인 가치에 무감각하다. 그래서 뫼르소는 조삼모사의 논리로 죽음을 설명한다.
“다른 사람들보다 먼저 죽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나 인생이 살만한 가치가 없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고 있다. 결국 30세에 죽든지 60세에 죽든지 별로 차이가 없다는 것을 나도 모르는 바 아니었다.” (뫼르소의 말)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뜬다. 이 말이 희망적으로 들리는가? 아무리 엉망징창이고 모자란 나의 모습만 발견하게 하는 하루에 새로운 내일이 주는 삶의 위안은 크다. 동시에 내가 흘려보낸 오늘의 하루는 절대 돌아오지 않는다는 의미에서는 내일은 위화감도 준다. 내일은, 그렇게 매일은 새로운 하루가 된다. 인간 앞에 주어진 시간은 한정되어 있다는 사실이 이중적인 감정을 만든다.
주인공 뫼르소는 이 인간의 유한성을 긍정적인 속성으로 보고 있다. 하루와 세월을 채우는 ‘일과’는 그에게 굴레이기에 이 굴레에서 벗어나야 진정한 자유를 얻는다는 논리인 듯하다. 그가 정의하는 자유는 삶으로부터의 해방이다.
왜 이방인인가
시간과 물질이 가진 의미에서 행복을 찾는 우리의 관점에서, 더 나은 선택과 행복을 위해 고민하지 않는 뫼르소를 불행하고 싶은 주인공으로 보아도 무방하다. 문학 작품에서 불행한 주인공은 있어도 불행하고 싶은 주인공은 찾기 힘들 것이라 생각했다. 반항하는 주인공들에게서 불행하고 싶은 마음이 간혹 읽힐 때가 있지만 궁극적인 목적은 자유와 행복이다. 뫼르소의 불행하고 싶은 마음이 어디서 나왔을까를 생각해 보니 여타의 다른 반항심 깊은 주인공들과 같은 심리에서 비롯되었음을 이해하게 되었다. 그 또한 반항하는 인물이다.
무엇에 반항하는가? 뫼르소는 자신의 존재 자체에 반항한다. 존재 자체와 삶에 대해 회의하는 인물로 그를 이해해 보자. 삶의 의미를 모르기에 행복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그는 행복을 벗어나야 자유와 환희를 느낀다. 이는 보통의 인간 군상과 확연히 다른 점이다. 뫼르소는 우리와 같은 인간이지만 마치 다른 세계에서 온 사람같다.
이는 제목 이방인(원제: The Stranger)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 보게 한다. 자유와 행복을 삶의 유한성과 덧없음에서 발견한 뫼르소를 이방인이라고 본다면 그의 세계가 우리의 세계에게 건네는 말의 언어는 해석이 필요하다. 그 해석의 시간은 어려워도 연극의 관객에게 걸을 만한 가치가 있는 새로운 길을 열어줄 것이다. 연극이 관객에게 전달하는 전율로 시간의 질적 가치를 향유해 보는 것은 어떨까.
[한 줄 평이 되지 못 한 두세 줄 평] 한 사람의 길고 긴 고뇌와 독백이 연극이 되었다. 응축된 대사와 배우들의 연기가 가진 전율은 우리의 상상을 도와준다. 삶에서 무엇이 중요하고 의미가 있는지를 말할 줄 아는 것은 인간이 지닌 축복임을 알게 된다.
[신가은 에디터]<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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