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Do EUR♡PE me? – 니스와 파리 편 [여행]

1년 만에, 여행을 통해 나를 알아가는 법
글 입력 2024.08.25 1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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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리스 신드롬


 

홀린 듯 시계토끼를 좇아 간 앨리스는 이상한 나라에서 신묘한 경험을 하게 된다. 버섯을 먹고 몸이 건물만큼 커졌다가 개미처럼 작아지기도 하고, 체셔 고양이의 안내를 받아 하트 여왕과 게임을 하기도 한다. 삶이 무료했던 앨리스에게는 망설일 필요가 없었다. 당장의 권태로움을 벗어나기만 한다면야 어떤 시련도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런 그녀의 엉뚱 발랄한 대담함이 어린 시절 나를 매료시켰다. 기껏해야 영어 학원에서나 쓰던 이름들 중 가장 오래 쓴 것이 앨리스 킴이었으니 말이다. 그때부터 한곳에 머무는 일을 잘 못하는 기질을 갖게 됐는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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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리스처럼 언제나 낯선 풍경들을 꿈꿔 왔다. 본 적 없는 건물과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들 사이를 유유자적하는 유랑자의 감각이 늘 그리웠다. 경험해 보지 못한 것을 그리워하는 마음은 날개를 갖고 태어나지 않은 인간의 날개뼈 죽지가 가려운 느낌과 비슷하다. 그래서 난 예전부터 프랑스라는 나라에 가보고 싶었다. 예술과 낭만의 도시는 내게 물성 있는 낙원도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환상을 심어줬다. 마침내 23년의 여름, 니스라는 프랑스 남부의 도시에 도착했을 땐 내 믿음이 틀리지 않았음을 확인했다. 영화 속 세트장을 거니는 듯한 착각은 내가 그 영화의 주인공일 거라는 기분 좋은 예감으로 이어졌다. ‘여긴 어디, 나는 누구’라는 대사가 혀뿌리까지 차오른다.

 

 

 

신 포도와 작은 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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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lease don’t touch the grape.

 

 

어학 사전에서는 손이 작다는 것을 ‘(사람이) 물건이나 재물의 씀씀이가 깐깐하고 작다.’라고 정의한다. 평소의 나랑은 큰 관련이 없어 보이는 말이다. 수중에 여윳돈이 생기면 다 써버리고, 부족해도 바닥까지 긁어모아 살뜰히 써버린다. 돈이란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있는 것이라는 나만의 경제 지론에 의해 행해진 일들로 통장잔고는 영점에 수렴하곤 한다. 여하튼 난 내 흥미를 끄는 것에 한해서는 손이 작지 않다는 말을 하고 싶었다.

 

하지만 니스에서 허위 매물을 만난 나는 소비에 소심해졌다. 적지 않은 돈을 주고 간 호텔이 말도 안 되게 관리가 부실하고 위생 상태가 좋지 않았다. 먼지가 내려앉은 가구와 눅눅한 이불의 첫인상은 쉽게 수습되지 않았다. 게다가 호텔 측의 대응도 미적지근했다. 먼 타지에서 숙소를 다시 구하긴 어렵다는 걸 아는지 다 잡아 놓은 물고기 보듯 문제를 해결해 줄 생각이 딱히 없어 보였다. 원래 예상치 못한 곳에서 데이면 다음 걸음은 극도로 조심하게 되는 법이다.

 

사회에서 지레 겁을 먹고 신 포도 취급하는 사람은 속된 말로 찌질하게 여겨지곤 한다. 그러나 어딘가에서 카운터 펀치를 맞으면 사리게 되는 건 우리의 생존본능이다. 얻어맞고 손이 작아진 사람을 탓하기 이전에 서로가 신뢰에 기반해서 움직이는 게 먼저 아닐까. 두더지처럼 움츠러드는 어깨를 펴기 위해선 처음보다 더 긴 준비 시간이 필요했다. 나의 작은 신 포도는 합리화의 상징이 아닌 최소한의 보호 장비였다.

 

 

 

쿨과 불친절 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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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Paris Olympic, D-330

 

 

마침내 니스에서 국내선을 타고 파리에 도착했을 때, 가장 먼저 든 생각은 ‘내가 거대한 도시형 테마파크에 떨어졌다.’는 것이었다. 펼쳐지는 풍경들이 너무 아름다워서 현실감이 떨어졌다. 에펠탑부터 시작해서 센강, 노트르담 대성당, 그리고 루브르 박물관까지. 마치 랜드마크 하나하나가 모두 아는 어트랙션 중 하나처럼 느껴졌다. 비행기가 파리랑 이름만 같고 다른 곳에 착륙한 건 아닐지 생각도 했을 정도니 말이다.

 

그럼에도 가장 쿨하게 느껴진 건 파리지앵/파리지엔느의 시크한 라이프 스타일이었다. 그루밍을 즐길 줄 아는 어르신들, 센강변에 앉아 혼자 독서하는 청년, 한입 베어 문 바게트를 포장 없이 에코백에 다시 넣는 러너. 패션이 일상인 도시는 남달랐다. 화려하지만 한편으론 깔끔하고, 섬세하지만 동시에 무심한 게 바로 프렌치 스타일이다.

 

문제는 그 쿨함이 나에게까지 와 닿진 않는다는 점. 세상의 모든 사람이 친절할 순 없지만 이곳 사람들은 평균 온도부터 낮았다. 길거리 사람들이 웃는 걸 들키면 벌칙이 있나 싶을 정도로 잘 웃지 않았다. 그리곤 우리에게 한 가지 놀이를 제안했다. 이름하여 ‘인종 맞추기 놀이’. 나는 참여할 의지가 전혀 없었지만 계속해서 그들의 술래가 되어줘야 했다. 보기는 보통 중국, 일본, 한국의 3중 택 1이다. 흥미롭지 않았지만, 종종 바로 한국인인 것을 맞추는 사람들이 있긴 했다. 부탁하지 않은 팝 퀴즈를 고마워해야 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방인의 포커페이스 선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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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중 속 묘한 이질감을 느꼈던 나는 극약의 처방이 필요했다. 그 방법은 일단 눈에는 눈, 이에는 이. 거울처럼 그들의 표정을 모사하는 거다. 웃어주지 않는 이들에겐 나도 웃지 않는 게 이치라 생각했다. 실실 웃고 다니는 게 헤퍼 보이는 건가, 스스로 검열할 필요도 없으니 좋은 방법 아닌가. 유튜브를 통해 수많은 웃음 참기 챌린지를 견딘 나는 포커페이스의 달인은 아니더라도 견습생 정도는 되지 않나 싶었다.

 

간과한 것이 있다면 내가 웃상이라는 것. 역설적으로 웃음을 참아보니 내가 생각보다 웃음이 많은 사람이었단 걸 깨닫게 됐다. 그렇다면 포커페이스 작전은 실패다. 다음 계획은 내가 퍼즐 조각이라 상상하는 거다. 내가 퍼즐이라면 반드시 연결된 근처의 조각들이 있었을 테니. 좀 더 쉽게 말하면 파리에서 아시아인을 찾는 거다. 이 방법은 예상보다 효과가 좋았다. 실천 방법은 일식당, 중식당, 태국 식당이 눈에 띄면 들어가기.

 

작은 동질감을 느끼는 순간엔 조금씩 쌓인 스트레스 지수가 내려가는 것만 같았다. 다른 국가의 아시안들에게 특별한 감정을 가져본 적이 없었는데. 식당에서 젓가락을 보고 감동을 하기도 쉽지 않을 거다. 나는 지금에서야 그 이유를 조금은 알았다. 그들도 이 도시에서 나와 비슷한 외로움을 느꼈을 거라는 공감대가 쉽게 생겼기 때문이다. 실제로 언어가 통하지는 않아도 서로의 처지를 이해하고 눈빛으로 위로할 수 있다. 눈물의 포커페이스 선언보다는 확실히 효능이 있었다.

 

 

 

사랑의 수도, Au revoi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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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 정유미는 한 잡지 인터뷰 중 향기와 여행의 상관관계에 대해 말한 적이 있다.

 

"해외여행 갈 때마다 여행지에 도착한 첫날 향수를 꼭 하나씩 사요. 그러곤 여행 내내 그곳에서 산 향수만 뿌리죠. 나중에 시간이 지난 후 그곳에서 뿌린 향수 냄새를 맡으면 저절로 여행지에서의 추억이 떠오르거든요. 그때 뿌린 향수로 인해 여행의 기억들이 저절로 떠오르니까 저에게 향수는 '기억'인 것 같아요."

 

이 문장을 마음에 담고 있다가 이번 여행을 시작하기 전 면세점에서 ‘몽 파리(Mon Paris)’, 나의 파리라는 향수를 샀다. 이 여행이 달큰한 라즈베리 향으로 기억되길 바랐다. 그리고 이젠 같은 향수를 뿌리면 루브르의 피라미드, 장미 모양 젤라또, 바토 무슈 유람선을 타고 맞은 바람의 순간들이 파노라마처럼 떠오른다.

 

그리고 파리의 첫날 만난 택시 기사님의 말씀도 떠오른다. ‘Capital of Love’, 사랑의 수도. 처음에 이 말은 들었을 땐 이 여행이 얼마나 낭만적이고 아름다울까 그려봤다. 그러나 예민해지는 순간들은 공기처럼 함께 했다. 내가 사랑이라는 개념을 너무 얕고 단조롭게 생각한 건 아닐까 싶었다. 설렘과 정열이 사랑이라는 향수의 탑 노트라면, 배려와 질투는 하트 노트, 미련과 애증은 베이스 노트일 텐데.

 

이렇듯 사랑의 형태는 너무나 다양해서 형식보다는 동반자가 중요하다. 누구와 함께 보내느냐가 가장 중요하다는 말이다. 그래서 나는 여행이 좋다. 좋아하는 사람들과 그 시간을 온전히 할애해야 한다는 속성이 유희적이면서도 희생적이다. 그렇기에 외부에서 닥치는 무례함쯤은 웃어넘길 수 있는 여유가 사이를 더 단단하게 매꾸어 준다.(한 마디 사족을 덧붙이자면 프랑스 여행은 기세가 8할이라 기싸움에서 절대 지면 안 된다.) 머릿속에서만 시뮬레이션 되던 완벽한 환상을 현실로 펼쳐 놓고 깨뜨릴 용기가 필요하다. 사랑은 그렇게 다층적이면서 강한 힘을 갖고 있다.

 

*

 

한동안은 자다 깨면 호텔이고, 우리는 오늘 어디로 향하는 일정인지 몽롱하게 고민하며 잠에서 깨길 반복했다. 이런 걸 여행 후유증이라고 해야 할까. 이 중증은 다음 여행이 시작될 때까지 옅어질지언정 계속됐다. 두근거리는 가슴을 안고 인생을 여행자의 시간으로 살아가는 삶도 나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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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원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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