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세상과 나 사이의 '몸' - 이건용 화백 [미술/전시]

몸을 논의의 중심으로 앞세우다
글 입력 2024.12.06 1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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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용 화백은 한국 아방가르드 미술의 거장으로 불리며 80대인 현재까지도 활발하게 활동을 해오고 있다. 그는 특히 신체와 논리라는 키워드로 세상과의 소통을 위해 현실에 기반한 행위예술을 주로 선보이며 국내외의 미술계에 큰 영향을 미친 원로 미술가다. 예컨대 <신체 드로잉> 연작과 <신체항>, <달팽이 걸음> 등의 작품이 주로 대중들에게 많이 알려져 있다. 그가 이런 비범한 작품관으로 미술 활동을 해 나갈 수 있는 배경에 대해 알아보기 위해선 그의 어린 시절부터 거슬러 올라가 보는 것이 필요하다.

 

그는 9살의 나이에 6.25전쟁을 겪은 전후세대로 현재 우리가 살아가는 일상과는 조금 다른 역사 적 사건을 배경에 갖고 있다. 또한 독서를 즐겨하는 집안 가풍에 따라 다양한 분야의 인문학책을 접하며 미술과 철학에 입문하게 되었다. 특히 그림을 잘 그리는 것 자체보다는 ‘잘 그리는 행위’ 자체에 관심을 가지며 유년기에 예술의 방법론에 대해 고민했던 에피소드를 찾아볼 수도 있다. 이후 고등학교 시절에는 논리학 수업을 들으며 비트겐슈타인(Ludwig Wittgenstein)의 언어분석 철학과 메를로-퐁티(Maurice Merleau-Ponty)의 현상학을 작업의 근간으로 삼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세상이 규정하는 ‘쓸모 있는 일’을 하는 것보다는 ‘행위하는 나’를 중심으로 반응을 관찰 하고, 그 행위가 다시 사람들의 생각할 거리가 되게 하는 일에 집중한 것으로 보인다. 아래는 그에 대한 에피소드가 담긴 한 인터뷰 답변이다.


“중학생 때 뚝섬의 둑 위에서 비를 맞으며 수채화를 그리곤 했는데, 이게 제 최초의 퍼포먼스일 겁니다. 기후를 작업 안으로 끌어들이려는 시도였는데 빗물과 바람에 번져 묘한 그림이 나오곤 했어요. 동네 애들이 그러면 그림 다 망치지 않냐고 묻길래, 그래서 하는 거라고 답해줬어요. 소몰이꾼은 멈춰 서서 한참을 보다가 젊은 애가 참 안 됐다며 혀를 차고 가더라고요. 이런 사람들의 반응도 중요하게 생각했어요. (...) 고등학교 1학년 여름에는 그때까지 그린 수채화를 학교 건물 근처 고목 아래에 전부 모아두고 불을 질렀어요. 그런 쓸데없는 짓이라도 하지 않고는 못 견딜 지경이었거든요. 중학교 때부터 의사와 같이 사회에 쓸모 있는 인간이 되라는 어머니의 말씀을 듣다 보니, ‘예술이란 무엇인가’에 관한 고민을 자주 했어요. 이에 ‘예술이란 예술이 아닌 다른 어떤 개념들과 다른 예외적 개념에 속하며, 그것은 일반적인 가치 기준에 비추어 쓸데없는 짓을 적극적으로 밀고 나갈 때 예술적일 수 있다’는 식으로 예술 개념을 규정했죠. 그림에 불을 지른 건 이것을 실현하고자 한 퍼포먼스였어요.”


 


ST와 AG


 

홍익대학교 서양화과를 졸업 후 해외 미술계의 흐름을 동시대적으로 수용하기 위해 원전과 잡지, 서적 등을 번역하고 분석하여 토론하는 장을 만들었다. 그것이 바로 학술 소그룹 ‘ST(Space and Time)’이다. ST는 원래 정보가 부족한 시대에 문화가 발달한 해외의 정보를 스터디하고자 하는 취지에서 설립된 ‘아트뉴스(Art News)’가 전신이다. 아트뉴스는 당대 ‘미술수첩’, ‘아트포럼’, ‘아트프레스’ 등의 해외 잡지 및 서적 중 주요한 텍스트를 번역하고 다시 책으로 만드는 활동을 수행했다. 그중에서도 자주 만나는 학회원들과 더 색다른 활동을 기약하며 형성된 것이 ST다.

 

그들은 이해하기 어려운 철학 텍스트를 분석철학 교수에게 들고 가 물어보기도 하고, 다양한 철학 사상이 활동에 도움이 될까 하여 유학자에게 철학을 배우기도 하였다. 많은 텍스트들 중에서도 그의 작업관에 큰 영향을 미친 것이 몇 가지 있다. 먼저 하나는 이우환의 <만남의 현상학 서설>이다. 이우환의 일본에서 활동하던 모노하의 멤버 중 한 명으로, 동양의 노장사상과 메를로-퐁티의 현상학을 바탕으로 하여 ‘장소론’과 ‘신체성’을 논하는 작업을 주로 수행했다. 이를 통해 이건용은 기존의 스탠다드였던 서구의 모더니즘이 이야기하는 ‘주관적 대상화’에 대항하는 이론을 접하며 작업에서 신체가 주체이자 도구로서 경계가 흐려지는 존재론적 혹은 현상학적 작업관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었다. 그렇게 3년여를 스터디에 매진하다 마침내 1971년, <제1회 ST전>을 개최하였다.


특히 ST는 엘리트주의적인 기존의 예술계에서 당시 유일하게 남녀노소, 직업과 연령에 구애받지 않고 허심탄회하게 생각을 공유할 수 있는 세미나 등의 장을 마련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건용의 인터뷰에 따르면 그는 특정 몇 사람의 이익을 위해 모임을 조직하여 엘리트 의식을 갖고 소통 없이 작업하는 태도를 경계했다고 한다. 한 사례로는 ST의 그룹전에서 관심을 보이는 사람들을 붙잡고 신상을 물어본 뒤 이후에 좌담회의 초청장을 보내기도 했다고 한다. 이에 좌담회에 방문한 사람들은 학생, 주부, 자영업자 등이 포함되었으며, 예술에 조예가 깊지 않더라도 오가는 모든 이야기에 진지한 태도로 임하며 토론을 진행했다고 한다. 그는 이것이 진정한 문화 횡적인 유대라고 평하기도 했다. 이를 통해 알 수 있는 ST의 특징은 작업만큼이나 작업과 작품에 대한 아이디어와 의견이 공유되는 소통의 기회가 필수적으로 주어져야 함을 주지했다는 것이다. 그는 이와 관련하여 이렇게 말하기도 하였다.


“사람들은 아이디어를 비밀이라 생각해서 공유하는 걸 굉장히 싫어합니다. 아이디어를 가져다 먼저 발표하는 것에 대해 내 것을 훔쳐갔다고 생각하는데 사실 그게 아니거든요. 모든 것을 가져다 놓고 자유롭게 토론, 비판할 수 있는 상황이 되어야 합니다. 비단 예술만의 문제가 아니라, 토론은 문화 전반에서 일어나는 운동이어야 해요.”


그러나 ST의 멤버들은 유연한 사고방식과 신선한 작업물에 비해 오래가지 못했다고 한다. 이는 69년 형성되어 기성 작가들이 주를 이루었던 한국아방가르드협회 AG가 후배들을 이끌고 계 속해서 제자를 배출할 수 있는 환경이었던 것에 비하여 ST는 무명작가들이 대부분이었기에 소위 ‘안 팔리는 작업’을 계속하던 작가들에게는 버티기 힘든 환경이었던 것이다. 현재에도 미술계에 대한 국가적 지원은 부족한 편이지만, 그럼에도 젊은 작가를 위한 지원 정책과 대안공간들이 생겨난다는 점을 고려하면 당시의 환경은 더 열악했음을 부정할 수 없다.


 


1960년대, 캔버스를 벗어나다 – ‘해프닝(Happening)’


 

이건용은 1세대 행위예술가로 불리며 캔버스에서 작업하는 작가의 몸으로, 그리고 그것을 바라 보는 관객의 사유까지 시선을 옮기는 역할로 공로를 인정받고 있다. 하지만 그가 처음부터 인식하는 눈과 신체 자체를 분리시켜 작업한 것은 아니었다. 이 흐름을 알아보기 위해 당대의 정치적/역사적 흐름을 단계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


1960년대는 전후 근대화라는 범세계적 인식이 확대되는 가운데 우리나라 역시 명예로운 근대 시민의 역할을 부여받았다. 그러나 정치적으로 독재의 형태가 지속되는 상황에선 개인이 개인으로 살아가는 게 불가능했다. 해방, 그리고 남북분단 이후 좌와 우라는 이데올로기적 갈등 속에서 허허벌판에 빠른 성장을 모토로 삼는 군부독재정권에선 모두가 하나의 목표를 가질 수밖에 없다. 오직 근대 시민으로서 나라의 성장을 도모하는 데에만 혈안이 되어 선 밖에 나는 사람들은 억압 당하고 밟히는 일이 부지기수였다. 극한에 상황에 다다라서야 사람들은 실존의 위기를 겪게 되었다. 국가라는 단체와 나라는 개인이 동일시되면서 자아가 지워지는 일은 미술계와 더불어 당대 사람들에게 새로운 바람을 불러일으켰다.


이는 풍선을 한 손으로 꾹 누르는 행위와 비슷하다. 압력을 가한다고 그 부피가 가라앉는 것이 아니며, 다른 방향으로 새로운 시대의 욕구가 더 크게 부풀어 오르고 만다. 이는 67년 12월 개최된 <청년작가연립전>을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이 단체전에선 다수의 작가들이 탈회화 경향의 실험미술을 선보이며 가두시위 행렬을 이어갔다. 이때 처음으로 ‘해프닝(Happening)’으로 기록된 퍼포먼스들이 자행됐다. 이는 시대적 상황에 따른 억압에 대한 대립항으로서, 작가 이태현은 이를 ‘캔버스를 벗어나 우연적인 행위에서 발생하는 미적 사건’이라 명명하였다. 해프닝은 캔버스에서 몸으로 시선을 돌려 행위에 대해 생각해 볼 여지를 마련하였지만 아직은 그 경계가 모호하게 설정되었다는 아쉬움이 있었다. 그럼에도 이러한 시도가 갖는 의의는 성장이라는 명목하에 이루어 지는 감시와 억압의 시대적 상황 속에서도 작가 스스로가 몸에 대해 인식하여 주체이자 대상으로 나아가려는 과도기에 시발점이라는 것이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이탈리아의 미술사가 레아 베르 지네는 “예술가가 표현 수단으로 몸을 선택한 것은 억압된 어떤 것을 다루기 위한 시도”라고 언급하기도 했다.


 


1970년대, 대상이자 주체로서의 신체 – ‘이벤트-로지컬(Event-Logical)’


 

1970년대로 접어들며 독재 정권의 탄압이 극한에 치닫으며 국가는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후에는 계엄령이 내려졌다. 이에 실험미술의 수요와 공급은 줄어들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이건용 중심의 ST는 활동을 이어 나갔다. 70년대 초반엔 이우환의 영향으로 오브제 중심의 실험미술을 주로 펼쳐 나갔지만, 이후엔 퍼포먼스가 돋보이는 행위예술을 선보이기 시작했다. 이를 통해 몸은 도구이자 동시에 주체로서 지위를 되찾을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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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주목해야 할 작품은 71년도 <제10회 한국미술협회전>과 73년 <파리 비엔날레>에 출품된 <신체항>이라는 작품이다. ‘세계의 일부를 원형으로 그대로 갖다 놓았다’는 이 작품은 2m 높이로 잘린 아름드리나무를 지층 채로 상자에 넣은 모습을 하고 있다. 마치 마르셀 뒤샹이 기성품을 전시장에 가져다 놓고 작품이라고 내보인 순간부터 작품이 되는 상황과 기시감이 들기도 한다. 혹은 모노하의 오브제를 그대로 전시장에 내놓으며 작품과 관람자 사이의 공간과 관계를 인식하게 하는 방식의 작업관도 엿볼 수 있다. 그는 이 작품을 통해 예술과 예술이 아닌 것에 대해 생각하도록 하여 신체가 세상을 매개하는 장소로서 현전함을 느낄 수 있도록 하였다. 이 작품을 기점으로 이건용은 국내외 화단에 이름을 알리게 되었으며, 이후엔 그가 현재까지 이야기하고자 하는 ‘이벤트’가 시작되었다.


파리 비엔날레에 다녀온 그는 작품에 사용되는 매체에 대한 생각이 변화하게 된다. 위에서 살펴본 신체항처럼 돌, 흙, 나무 등을 있는 그대로 사용하는 데서 한발 더 나아가 작업 행위를 실천하는 ‘작가 자신의 신체’야말로 탁월한 매체가 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이에 따라 이건용은 오브제 설치 작업에서 75년을 기점으로 퍼포먼스 작업을 시작했다. <<오늘의 방법전>>에서 선보인 <실내측정>과 <동일면적>은 동일한 행동을 반복하지만 결코 같은 기대값을 갖지 않는 일련의 행위들의 총합이 작품으로 현시된다. 이에 계속 반복되는 것 같은 행위도 발생할 때마다 다른 행위라는 것을 상기시켜 준다.


이건용은 이와 같이 반복되는 행동을 통해 역설적으로 각 행위의 개별성을 드러내는 행위예술을 ‘이벤트’라고 이름 붙였다. 이는 행위를 통해 우연한 결과를 기대하는 ‘해프닝’과는 구별되는 용어로써 사용하고자 하였다. 해프닝은 우연성을 통해 감정적 동요를 일으킬 수 있지만 규칙성 혹은 논리성이 부족하여 공감을 일으키기 쉽지 않다. 반면에 이벤트는 반복되는 행위로 일시적인 충격을 가하는 데는 적합하지 않을 수 있으나 정확히 맞물리는 논리가 발생하기에 장기적으로 더 큰 영향력을 미칠 수 있다. 따라서 이건용은 이벤트 뒤에 로직(logic)을 함께 덧붙여 ‘이벤트-로직’ 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였다. 특히나 혼란한 시대적 상황이 감정 과잉을 부추길 때에는 논리가 해결책이 될 것이라는 그의 기대가 뒤섞여 있었다.


물론 일각에서는 이벤트와 논리가 병치될 수 없는 개념이 아닌지 의심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는 세팅된 논리에 이벤트를 끼워 맞추는 것이 아닌, 이벤트가 선행하면 자연스레 일정한 논리가 만들어진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그러므로 적어도 예술에서만은 이벤트와 로직이 진정한 공감과 소통을 가능케 하는 요소로서 공존할 수 있다고 설명한다. 따라서 이건용에게 논리란 작가 주체의 확인이 아닌 세계를 그리기 위한 형식이자 사실들의 반복이다. 다시 말해 이건용은 자신의 몸을 통해 세계를 논리로써 그리고자 하였다는 것이다. 이는 결국 비트겐슈타인의 언어 철학으로 설명이 가능하다. 이건용의 코기토적 사유와 구분되는 몸의 표명은 비트겐슈타인이 '생각하고 표상하는 주체는 존재하지 않는다' 강조한 바와 맥을 같이 한다. 따라서 이건용의 ‘논리’는 관념적 사유로 해석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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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 <제 4회 ST전>에서 재현된 이벤트 <건빵 먹기>와 <장소의 논리>로 살펴보자. 이 이벤트는 단순히 건빵을 집어 먹는 행위를 반복함으로써 이루어진다. 그러나 점점 붕대나 각목을 팔과 어깨에 덧대면서 팔의 움직임을 제한한다. 처음엔 먹기 쉬웠던 건빵이 갈수록 팔을 뻗어 집기조차 어려워진다. 이를 통해 아이러니하게도 몸의 존재는 더욱 두드러진다. 신체가 불편하게 느껴지지 않을 때는 공기처럼 존재한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살게 된다. 하지만 이 간단한 행위가 어려움을 겪을수록 몸이 그 자리에 현전한다는 사실은 더욱 부각되어 증후적으로 나타난다. 이 이벤트의 시연 후 좌담회에서는 ‘탈이데올로기성과 무목적성’이라는 키워드가 도출되며 당시 정치적 상황에 대한 비판을 피해 가는 듯한 제스처로 읽히기도 했지만, 검열을 통해 퇴폐미술을 처단했던 상황에서는 이러한 우회적인 행위가 검열을 피해 가기 위한 가장 절충적인 대안이라 평가받기도 하였다.


<장소의 논리>는 ‘내’가 움직이면 대상이 다르게 인식되는 ‘시차적 관점’을 이용한다. 운동장에 둥근 원을 그린 다음, 그 앞에서는 ‘거기’라고 지시하며, 안에서 ‘여기’, 밖으로 나가서는 ‘저기’를 지칭한다. 이를 통해 현재의 이 공간에 존재하는 나의 몸과 그 사이의 관계를 지칭 할 수 있는 언어를 통해 세계를 인식하는 상황을 연출한다. 이렇게 몸으로서 세계를 느끼고, 언어로 그 논리를 서술하는 매커니즘은 이후의 몸을 작업의 도구이자 주체로 격상시키는 작업의 도화선이 되었다. 이후에는 작가의 몸 자체를 도구화하는 것을 작업 매커니즘으로 삼기 시작했다. 이 역시 언어를 삶의 도구라 인식한 비트겐슈타인의 후기 철학을 차용한 행위라고 해석할 수 있다. 이에 대한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드로잉의 방법>(1976), <신체 드로잉>(1976), <달팽이 걸음>(1980) 등이 해당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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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드로잉의 방법>과 <신체 드로잉>이라는 작품에서는 이건용의 새로운 시도를 찾아볼 수 있다. 바로 일반적인 ‘드로잉’의 방식을 벗어난 작품이란 것이다. 회화라 하면 모름지기 연필이나 붓 등의 재료를 손에 들고 캔버스를 마주 보며 그려나가는 경우가 대부분이며 그것 외에는 주어진 대상을 사실대로 담아낼 방법이 달리 없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가 캔버스에 눈을 두기 때문에 발생하는 일종의 편견이자 관습이다. 드로잉을 하는 행동 자체, 즉 그 작가에게 중심을 두면 캔버스는 더 이상 마주 보아야 할 대상이 아니게 된다. 앞서 말했던 사유하는 주체인 코기토에서 벗어나 만지고 느끼고 현실을 거니는 몸이 직접 우리 앞에 현시하게 된다. 이는 저자의 죽음을 이야기한 롤랑 바르트의 논의와 비슷하다. 글 속에서 마침내 저자가 지워지는 경험은 우리를 텍스트에 집중시키지만 진짜 필요한 것을 잊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마침내 제자리를 찾은 몸은 세상을 스스로 느끼는 지각자이자 창조자로 거듭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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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절정에 다다른 작품이 <달팽이 걸음>이라 할 수 있겠다. 아예 캔버스를 빠져나와 천천히 움직이며 선을 긋고, 몸으로 그것을 무화시키는 행동을 통해 생명력과 동시에 소멸을 보여준다. 이에 대해 이건용은 “나의 ‘신체의 회화’가 퇴색된 모더니즘을 극복하고 다시금 회화가 그리는 자의 생생한 신체적 전모를 드러내 줄 수 있기를 바란다”는 말을 남겼다. 이후 78년도에는 정찬승과 함께 <삭발> 퍼포먼스를 기획하였다. 이 이벤트는 정찬승이 무대의 의자에 앉으면 이건용이 등장하여 흰 천을 머리에 씌운 뒤 머리카락을 자른 후 잘린 머리카락을 천으로 싸서 원형으로 늘어놓는 일련의 과정이다. 이처럼 삭발이라는 즉흥적인 퍼포먼스에 머리카락을 원형으로 늘어놓는 반복적인 행위가 더해져 체계를 완성했다.


몸에 대한 논의는 시대적 징후처럼 나타났다. 도시의 모던한 삶에 대중이 삶을 이끄는 주체가 되고, 개인은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상황이 도래하며 서양과 동양에서는 ‘나’를 찾는 흐름이 가속화되었다. 권위적으로 캔버스를 응시하며 담아낸 구상 회화에는 도저히 만족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넘쳐났다. 예컨대 잭슨 폴록의 액션 페인팅이 그 대표적인 사례다. 캔버스에 물감을 던지고 바르며 ‘그린다’기보단 ‘갖고 노는’ 행위 자체에 초점을 두며 큰 반향을 일으켰다. 하지만 그때 마저도 캔버스와 작가는 서로 대치하듯 마주 볼 수밖에 없었다. 나의 사유와 감정은 ‘캔버스’에 담길 필요가 있었다.


이에 이건용은 한 발 더 나아가기 위해 몸을 논의에 장이자 화두로 만들었다는 데 의의가 있다. 이에 대하여 그는 “작가라는 권력자로서 예술가가 자신의 아틀리에 안에서 만들어 강요하는 사고 시스템”이라 언급한 바가 있다. 작가가 그린 작품을 경외하듯 멀리 떨어져 지켜보는 게 아닌, 간단한 반복을 통해서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곱씹을 수 있는 사유의 장을 마련한다. 그것이 작가 이건용이 할 수 있는 담담한 노래다. 이는 메를로-퐁티의 현상학과 관련이 깊다. 이에 대해 강혜승은 미학예술학연구집 논문에서 “이건용뿐만 아니라 1960년대의 해프닝 작가들도 기존 사회가 규정하는 질서나 제약을 위반하는 장소로 자신의 신체를 택했다.”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이는 스스로를 타자화시키면서도 몸을 논란의 중심에 서게 하는 이중적인 효과를 주기도 하였다.


 


NFT 미술과 이후의 행보


 

80년대 중반 이후에는 이때까지의 작업을 이어가면서도 더 구체적인 메시지를 드러내는 작업을 많이 다루었다.

 

“1979년 <이어진 삶 79-2>에서 벌써 그럴 기미가 보였어요. 일상의 소지품이 한 개인의 삶을 대변 할 수 있지 않겠냐는 발상에서 시작된 퍼포먼스였죠. 그렇게 일상의 문제를 생각하다 문화, 사회, 정치 문제까지 다루게 되었어요. <물고문>(1987), <물로부터>(1989), <망각의 물>(1989) 등에서는, 물 이라는 소재가 한국 현대사에서 금강산댐 모금운동, 물고문, 하다못해 홍수를 떠오르게 하기에 물로 부터 많은 사람의 공감을 끌어낼 수 있겠다고 판단했어요. 또, 세대를 거쳐 꾸준히 지속된 한국 여성, 어머니의 문화를 나타낸 <모계>(1989)와 <독 속의 문화>(1989), 그리고 현대 산업사회의 문제 를 다룬 <구조조정> 시리즈 등이 있어요.”

  

또한 현재는 이전에 발표한 작품을 NFT로 리마스터하여 발표하는 새로운 작업 및 판매 흐름에 탑승하기도 하였다. 그의 첫 디지털 NFT 아트는 바로 <디지털 바디스케이프 76-3>이다. 구매자들에게 색다른 경험을 제공하기 위해 취한 방법적 장치는 이건용의 ‘아바타’였다. 그들은 이건용 의 몸을 3D 모션캡쳐 기술을 이용해 아바타화 하였다. 이를 통해 기존의 <신체 드로잉>과 같은 이벤트를 즐길 수 있도록 전 과정이 프로그램화되었다. 이는 이건용의 실험적인 태도가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음을 시사한다. 본래의 작업 방식을 고수하여 과거에 매몰되지 않고 어디로 향하는지 알지 못하는 파도에 가볍게 몸을 싣는 행위와 같다고 볼 수 있다. 정윤선의 논문 속 평에 따르면 회화의 제작 방법상의 인식적 전환을 시도한 작가의 실험적 태도처럼, 이건용은 동시대 새로운 기술을 기반으로 새로운 창작 방식을 개발, 선도하고자 하였음을 알 수 있다.


22년도에는 페이스 갤러리와 전속계약을 맺으며 앞으로의 활동을 더욱 기대해 볼 수 있게 되었다. 기존에 국내에서 함께 하던 ‘갤러리현대’, ‘리안갤러리’, ‘313아트프로젝트’의 활동도 병행이 가능하기에 국내외에서 활발한 활동이 가능할 것으로 예상된다. 특히 25년도 10월경에는 서울에 상륙하는 퐁피두 센터의 개막전에서 이건용의 개인전으로 만나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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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원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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