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동그라미만 그렸더니 600만원이 입금됐습니다 - 사막의 왕 [드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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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를 경험하며 어떤 원대한 목표를 이루기 보다는 길고 오래 가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예컨대 빌보드 차트 1위를 하고, 스타디움 투어를 도는 팝스타가 되고 싶다기보다는 돈 많은 백수가 간절해진다. 그럼 돈 많이 버는 꿀직장 회사원 정도는 어떨까? 6편의 단편들로 이루어진 왓챠 오리지널 시리즈 <사막의 왕> 중 1화 ‘모래 위의 춤’ 속 신입사원 나이서의 이야기다.
맨홀 뚜껑이 동그라미인 이유
취준생 나이서는 지원한 회사에 다 떨어지고 면접 하나를 남겨둔다. 더이상 물러날 곳이 없는 그녀는 벼랑 끝에서 기적을 기다리듯 마지막 면접에 임하게 된다. 그러나 면접관들의 태도는 시베리아에서 불어 오는 바람만큼 냉랭하기만 하다. 그리고 함께 면접을 보는 면접자 3명에겐 이상한 질문이 던져진다. “맨홀 뚜껑은 왜 동그라미인가요?” 순발력과 창의성을 체크하는 구글식 면접 질문인가 하는 의문이 든다.
이에 앞서 2명의 면접자는 각각 객관적인 이유를 들다가 맨홀 회사에 지원하지 그랬냐는 황당한 답변을 받았고, 그런 고정관념에 대한 새로운 답을 이 회사와 함께 알아가고 싶다는 말에 누가 함께 하겠다고 했냐는 냉소적인 답변을 받았다. 이를 지켜본 이서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겠죠?”라는 싱거운 대답을 하며 탈락을 예감했다. 하지만 며칠 뒤 합격 문자를 받으며 회사에 출근하게 된다.
도대체 그녀의 대답 속 어떤 점이 이 회사의 인재상과 부합했기에 합격하게 되었을까? 좀 더 지켜보자.
메타버스유비쿼터스NFT디지털컨버젼스딥러닝빅데이터태스크포스팀의 앨리스
출근 첫 날, 어색하게 입은 정장과 구두를 갖추고 23층 발령된 부서로 향하는 이서. 만원 엘리베이터에 몸을 싣지만 버튼을 아무리 눈 씻고 찾아봐도 23층은 없다. 머뭇거리는 그때 한 직원이 이서에게 말을 건다. “메타버스유비쿼터스NFT디지털컨버젼스딥러닝빅데이터태스크포스팀이시죠? 그 부서는 엘리베이터 못 타요. 비상계단으로 걸어서 올라가야 합니다.” 22층에서 내려서 올라가면 안돼냐는 질문에도 단호하게 그것이 규칙이라 설명한다.
하는 수 없이 땀을 뻘뻘 흘리며 23층에 도착한 이서는 한 가지 이상한 점을 또 발견한다. 자리까지 향하는 길에 흰 카펫이 길게 늘어져 있는데 그 밖을 벗어나면 안 된다. 그 길로만 다닐 수 있다. 그 카펫 바깥은 ‘사막’이라 밟을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점심은 회사에서 배식하는 음식만을 팀원들과 사물실에서 먹어야 한다. 그리곤 모두가 영어 이름을 사용한다. 이에 이서는 얼떨결에 앨리스라는 이름을 갖게 된다. 어쩌면 이상한 팀에 배정된 그녀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이름이다.
무언가 의아하지만 회사의 사내 규칙과 업무의 정당함을 판단할 능력이 아직은 부족한 이서는 시키는 일을 제때 해낸다. 그녀가 맡은 업무는 종이 열 댓장에 동그라미를 일직선으로 핏하게 그려서 상사에게 확인을 받는 것이다. 그것을 검사 맡으면 상사는 그 동그라미를 다 지우고 세모를 그리라고 한다. 가끔은 한 선 긋기로 나선형 나이테를 그리거나 진동하는 4차함수 그래프를 계속해서 그리기도 한다. 이에 앨리스, 즉 이서는 이 일을 하는 이유 혹은 목적이 무엇인지 질문한다. 상사인 에이미는 우리 부서가 NFT 메타버스에 사용되는 사용자 경험 데이터를 쌓기 위해 반복적인 경험 데이터를 수집하는 것이라 설명한다. 다소 납득하긴 어렵지만 수긍하며 일을 마저 수행한다.
여느 때처럼 한 선 긋기를 하던 이서는 디렉터 저스틴에게 컨펌을 받는다. 하지만 선이 끊기는 걸 확인한 그는 그녀에게 불 같이 화를 낸다. 시키는 일이 어렵냐며, 시킨 것 하나 해내지 못하냐며, 실수를 대체 몇 번이냐 하는 거냐며 역정을 낸다. 사실 이 정도로 화를 내는 것은 받아 들이기가 힘들다. 이서가 하는 일은 기껏해야 컴퓨터 한 대 없는 자기 자리에서 선이나 도형을 그리고 지우고 하는 것 밖에 없는데 그걸 지적 받는 게 의미가 있는지 알 수가 없다.
이에 맞사수 제이크는 그녀를 계단으로 데리고 나와 일 잘하는 법에 대해 알려주겠다고 한다. 그 방법은 간단하다. 일에서 의미를 찾지 말 것. 그때 마침 둘 에겐 월급이 들어오는 알림 소리가 들린다. 문자에 찍힌 입금 내역은 자그마치 600만원. 신입 사원의 첫 월급이 600만원이다. 액수를 확인한 이서는 그 다음날부터 경쾌한 발걸음으로 자리에 들어오는 흰 카펫만을 밟는다. 열심히 원을 그리고, 군말 없이 그걸 다시 지운다. 그래도 콧노래가 절로 난다. 내가 쓰고도 엄마 용돈을 드릴 수 있는 월급이 들어오는데 업무가 무엇이든 대수일까.
내가 사장의 햄스터라니
여느 날처럼 엄마와 통화를 하는 이서는 이게 정말 너냐며 한 링크를 받게 된다. 링크를 열고 들어가자 이서는 자신이 계단을 타고 23층을 올라가는 장면과 사무실에서 열심히 한 선 그리기 원을을 그리는 모습이 담긴 CCTV 영상을 확인한다. 본문과 댓글에는 다 팀원들을 조롱하는 반응들 밖에 없다. 특히 한 댓글에서는 자신이 이 회사 현직인데 회장 비서에게서 이 팀이 사장의 순전한 재미를 위해 만들어진 부서라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사장이 기분이 나쁠 때마다 CCTV를 돌려보며 한바탕 웃어재끼는 사장의 햄스터 정도라고.
그에 엄청난 수치심을 느낀 이서는 사무실로 가 퇴사를 통보한다. 내가 하는 일을 납득할 수 없어도 흐린 눈으로 무시하고 있었던 이서는 이제야 제정신을 차린 듯 따져 댄다. 이 일 NFT고 메타버스고 아무 상관도 없는 일인데 다들 알고 있냐며 울분을 토한다. 하지만 아무도 동요하지 않는다. 되려 다른 팀원들은 그걸 모르고 일하고 있는 거겠냐며 핀잔을 준다. 이를 지켜보던 사장은 이서에게 계속 회사를 다닐 시 팀원 전체의 월급을 2배씩 올려주겠다는 파격적인 제안을 한다. 물론 익명 커뮤니티 속 댓글처럼 이래도 이 일을 하겠냐는 듯 조롱하는 투로.
다른 모든 부서원들은 일제히 이서를 쳐다본다. 마치 그 제안을 제발 받아들여 달라는 듯이 말이다. 이게 꿈인지 현실인지 어안이 벙벙한 이서는 실체를 알면서도 모른 척 할 수는 없지 않겠냐는 말을 남기고 결심한 듯 뒤를 돌아 나간다. 흰색 카펫 밖 사막을 무자비하게 밟으면서. 그 이후 그녀가 어떤 마음으로 어떤 일을 하게 되는지는 보여주지 않는다. 집에 돌아와서는 조금만 나를 내려 놓고 버텼으면 돈 걱정 없이 살아갈 수 있었을 텐데 후회할 수도 있다. 혹은 그 선택은 당연한 것이라 여길 수도 있을 것이다.
돈 많은 백수가 꿈인 나는
사회에 발은 들이면서 배운 진리가 있다면 돈은 많을 수록 좋다는 것이다. 너무 속물처럼 보일까 싶지만서도 부정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누군가는 우스갯소리로 행복하지 않다면 돈이 부족한 건 아닐지 돌아보자는 말을 하기도 한다. 실제로 삶에서 돈 걱정만 사라져도 반 이상의 고민들이 사라질 것이다. 그러나 돈을 많이 번다는 건 고용되는 곳에 나를 파는 일이다. 다시 말해 내 시간과 체력을 고갈시키는 만큼 돈을 벌 수 있다. 재밌고 즐거운 곳이면 누가 돈을 줘가면서 일을 시키겠냐는 말을 하기도 한다. 그래서 ‘돈 많은’ 백수라는 것은 내 부모님이 부자라 상속되는 것이 아니면 성립하기 어려운 말이다. 그럼에도 나는 매일 꿈꾼다 사람을 상대할 필요 없는, 그저 자아실현할 정도의 프리랜서로 돈을 많이 벌고 싶다고. 그런 조건에서 <사막의 왕> 속 이서의 자리는 꽤나 괜찮은 자리다. 정해진 간단한 일만 하면 되고, 칼퇴근을 하면 내 시간이 보장되고, 돈은 많이 벌 수 있다.
처음 이 시리즈를 보면서 어떻게 저런 보람 없는 일을 하겠냐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하지만 곰곰히 생각해보면 내가 저거 보다 가치 있는 일을 하고 있던가 하는 의문이 든다. 나는 저것과 비슷한 처지지만 돈은 더 벌지 못한다면 내가 저 상황을 안타까워할 수 있는가. 사람들은 모두 자기 일에서 의미나 가치를 찾는다. 내가 하는 일에 어디에 도움이 되는지 알면 노동에 대한 정당한 가치를 받는다는 희미한 믿음이 생기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믿음 자체가 정말 근거가 있느냐 하면 쉽사리 대답할 수가 없다.
이 단편은 그런 류의 찜찜함을 남긴다. 내가 이서보다는 나은 업무를 하고 있다 확신할 수 있을까? 돈을 많이 버는 것보다 보람 있는 일을 하는 게 정말 만족스러운 일일까? 내가 저 자리를 제안 받는 다면 과연 당당하게 거절할 수 있을까? 현대인들의 자아와 노동에 대한 가치관을 다시 확인하게 만든다. 돈 많은 백수가 꿈인 나는 이서처럼 사막을 건너갈 수 있을까.
[김영원 에디터]<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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