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terview] 우리가 서로의 ‘곁’이 되어주기를 그리며 - ‘은의 혀’ 박지선 작가, 윤혜숙 연출

글 입력 2024.08.11 1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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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3] 국립극단 은의 혀(2024) 포스터.jpg

 

 

서로 간섭하지 않고 폐 끼치지 않는 것이 미덕으로 여겨지는 사회에서 타인에게 공연한 관심을 보였다가는 오지랖 넓은 사람 취급받기 쉽다. 하지만 누구에게나 뜻밖의 곳에서 전혀 기대하지 않은 사람에게 도움을 받거나 위로를 받은 적이 있지 않나. 때로는 그 짧은 인연이 한 사람을 계속 살아가게 만들기도 한다. 국립극단 신작 <은의 혀>에도 그런 관계가 나온다. 아들의 죽음 후 장례식장을 떠나지 못하는 ‘은수’와 장례식장에서 일하는 ‘정은’이다. 생판 남이었던 두 사람은 차츰 서로에게 기댈 언덕이 되어간다.


<은의 혀>는 <견고딕-걸>, <누에> 등으로 연극적 상상력을 펼쳐 온 박지선 작가와 꾸준히 돌봄 문제를 다루며 <정희정>, < SECOND CHANCE >, <마른 대지> 등 작품 활동을 해 온 윤혜숙 연출의 만남이다. 공연을 앞둔 인터뷰에서 두 사람은 <은의 혀>가 ‘말’이 많은 작품이라고 전해 왔다. 말은 혀로 하는 것이다. 강하지 않은 우리가 서로를 돌보고 연대하는 일은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타인에게 말을 건네고야 마는 그 작은 ‘혀’에서부터 시작될지도 모른다.

 

 

[국립극단] 은의 혀(2024)_박지선 작가와 윤혜숙 연출_인터뷰현장(1).jpg

왼쪽부터 박지선 작가, 윤혜숙 연출

 

 

“'혀'들의 대사가 단순히 내레이션 형태가 아니라

무대 위에서 ‘살아 있는 말’이 될 수 있도록 주의를 기울였어요.”

 


먼저 작가님께 작품을 쓰게 된 계기를 들어보고 싶어요. 돌봄 노동 현장을 다룬 기사 한 편에서 작품이 시작되었다고요.


박지선(이하 ‘박’): 중 장년 여성의 돌봄과 노동이 너무나 헐값이고 주목받지 못한다는 생각은 계속 있었기에, 어쩌면 그 기사는 출발점이 아니라 도착점에 가까웠던 것 같아요. 제가 어딜 가든 급식 먹는 걸 참 좋아하는데, 기사에 따르면 급식 노동자 10명 중 3명은 건강검진 시 폐에 이상소견이 발견되어 추가 검진을 한다고 해요. 이슈가 되어도 한참 전에 되어야 했을 이런 문제가 최근에 와서야 이야기되고 있다는 게 충격적이었죠. 그래서 본격적으로 작품을 구상하기 시작했습니다.

 

 

‘은의 혀’라는 제목이 무엇보다 한눈에 들어왔어요. 어떻게 정해졌나요?


: 급식 노동자의 노동 환경을 생각하다가 누군가의 밥을 만듦으로써 자신의 삶이 죽음에 이르게 되는 상황을 떠올렸어요. 죽음에서 검은색 이미지를 연상했고, 그러다 은에 독이 닿으면 검게 변한다는 말도 떠올랐죠. 옛날에 왕이 먹을 음식에 독이 들었는지 확인하기 위해 먼저 맛을 보는, 기미상궁이라는 존재도 있었잖아요. 그렇게 생각하니 왕의 권력이라는 것 역시 한 여성의 목숨에 기대어 존재했다는 생각도 들었어요. 그렇게 여러 이미지가 엮여서 ‘은의 혀’라는 제목이 탄생했습니다.

 

 

연출님은 처음 작가님 원고 읽었을 때를 기억하시나요? 첫인상이 어땠는지 궁금합니다.


윤혜숙(이하 ‘윤’): 등장인물 소개가 일반적인 희곡과 달리 노래 제목으로 쓰여 있어서 굉장히 독특했던 기억이 나요. 또 당시 아기를 재우고 한구석에서 조용히 휴대폰으로 원고를 읽었는데, 다 읽고 나니 제 상황 자체가 돌봄을 다루는 이 작품의 스핀오프 같다는 생각도 들었어요.

 

 

독특한 텍스트를 무대화하는 것이 어렵기도 했을 것 같아요.


: 대사가 많은 극인데, 인물 외에도 마치 내레이션처럼 전지적 작가 시점에서 인물의 속마음이나 생각, 객관적인 정보 등을 이야기해 주는 역할이 있어요. 처음 받은 원고에는 ‘목소리’라고만 나와 있었는데, 이경민 배우님 제안으로 ‘혀’라는 배역 명을 갖게 되었죠. ‘목소리’라고 하면 추상적이고 서정적인 느낌인데, ‘혀’는 살아서 팔딱거리는, 물질적인 이미지가 있어서 극에 더 잘 어울릴 것 같다 했어요.


그래서 ‘혀’들이 정은과 은수 곁에 둘러앉아 같이 이야기하는 형식으로 극을 만들었어요. 혀들은 함께 수다를 떨기도 하고, 인물이 목이 메여 말을 못 하면 대신 말해주기도 합니다. 이들의 대사가 단순히 내레이션 형태가 아니라 무대 위에서 ‘살아 있는 말’이 될 수 있도록 주의를 기울였어요.

 

 

[국립극단] 은의 혀(2024) 홍보사진01.jpg

 

 

"우리가 누구 옆에 있을 수 있는가,

그리고 우리의 일상은 누구의 노동에 빚을 지고 있나

질문할 수 있는 작품이 되길 바랐어요.“

 


혀들이 말하는 것까지 합치면 대사가 굉장히 많을 것 같은데, 큰 스포일러가 되지 않는 선에서 두 분이 좋아하는 각각 좋아하는 대사를 꼽는다면 무엇이 있나요?


: ”봄밤이야. 봄 밤. 봄밤에는 뭘 해도 말이 되지.“ 이 대사를 좋아해요. 정은이 처음으로 은수한테 한 발 다가가는 장면에서 나오거든요. 업무를 마치고 그냥 퇴근할 수도 있는데, 자꾸 은수가 눈에 밟히는 거죠. 두고 갈 수가 없고, 타인의 아픔을 예민하게 느끼는 더듬이로 은수의 고통을 눈치채죠. 그러고는 봄밤이니까 미친 짓을 해보자 결심해요. 벚꽃이 활짝 핀 봄밤이라는 시간적 배경과 병원 장례식장이라는 공간적 배경의 대조도 인상적이에요.


: 저도 그 대사 말하려고 했는데! 그 외에는 의외로 영양가 없는 말들이 기억에 남아요. “랍따띠디바바바” 같은. 공연을 다 보고 나면 아마 관객들 마음속에도 이 대사가 명대사로 남아 있을 거예요. 무슨 말인지 궁금하신 분은 직접 공연을 보시고 확인해주세요. (웃음)

 

 

중심이 되는 정은과 은수는 어떤 인물인지도 들려주세요.


: 정은은 일단 다정한 사람입니다. 다정함이란 말을 친절하게 하는 게 아니라 아픔 속에 있는 사람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마음이라고 보는데, 그런 면에서 정은은 참 다정해요. 그런 다정함을 품고 다른 사람의 상처에 다가가는 방식은 또 유쾌해요. 터프한 면도 있죠. 전면에 나서서 투쟁하는 사람은 아니지만, 자신의 삶에서 물러나지 않고 맞설 줄 아는 사람이에요. 가진 힘이 10이라면 10만큼, 50이라면 50만큼이요.


반면 은수는 인생에서 너무나 큰 상실감을 겪어 제대로 일상생활을 할 수 없는 취약한 상태에 놓인 인물이죠. 아들을 보내주지 못해 장례식장에 갇혀 있어요. <은의 혀>는 은수가 정은이라는 사람을 만나 가슴속 바윗덩어리를 어떻게 같이 굴릴 것인지 함께 고민하고, 아주 조금씩 회복에 이르는 과정을 그리는 작품입니다.


: 정말 외로운 사람은 오히려 말이 많아요. 제가 본 정은은 사실 되게 외로운 사람이에요. 이 세상에 자기밖에 없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이요. 하지만 외로워서 타인을 해치는 게 아니라, 타인에게 손 내밀 수 있는 사람이 정은이죠. 다른 사람의 외로움을 포착할 수 있는 촉, 일종의 더듬이가 발달해 있어요. 은수에게 선뜻 다가갈 수 있었던 것도 그 더듬이 때문이죠. 자신과 닮았다는 걸 눈치챈 거예요.


은수는 아들을 잃고 죄책감이 너무 커서 위험한 상태에 처해 있다가 정은을 만나 차츰 구렁텅이 바깥으로 나오는 인물이에요. 두 사람의 관계가 어떻게 시작되고 극이 진행되며 어떻게 변해가는지 보는 재미가 있을 거예요.

 

 

<은의 혀> 여러 키워드 중 하나는 ‘돌봄’인데요, 돌봄도 어떻게 접근하느냐에 따라 다양한 결이 있을 것 같아요. 이번 작품에서 드러내고자 하는 것은 어떤 돌봄인가요?


박: 저는 돌봄이 단 두 사람의 관계로 한정될 때가 가장 위험하다고 생각해요. 한 사람이 무너지면 다른 사람도 무너져 버리죠. 그렇기에 은수와 정은의 관계도 두 사람에서 그치는 게 아니라 커다란 호수에 던진 돌멩이처럼 동심원 모양으로 파장을 만들어가기를 원했어요. 두 사람에서 시작해 돌봄 현장에 있는 간호사, 병원에서 환자식 만드는 노동자, 학교의 급식 노동자... 흔히 생각하는 육아나 노인 돌봄에 한정되지 않고 사회 전체에 존재하는 돌봄, 그리고 돌봄으로 얽힌 다양한 관계를 생각해 보길 바랐습니다.


극에서 돌보는 이들, 돌봄 노동 종사자가 아프게 되는 원인을 짚어내는 것도 중요했어요. 특히 중년 여성의 돌봄노동은 쉽게 평가절하되곤 해요. 효율성이 절대적인 가치가 된 세상에서는 돌보는 이들이 자신의 생명을 담보로 노동해야 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급식 노동 현장이 대표적인 사례죠.


윤: 저도 작가님 말에 공감하고요. 원고를 쓰며 우리가 누구 옆에 있을 수 있는가, 그리고 우리의 일상은 누구의 노동에 빚을 지고 있나 질문할 수 있는 작품이 되길 바랐어요. 보통 돌봄은 가족관계 내에서 이루어져 큰 부담이 되곤 하는데 여기에 유쾌한 대안이 없을까 고민했지요. 보호자의 자격이 가족에게만 주어지는 건 아니라고 생각했거든요. 누구든 누군가의 옆에 있을 수 있어요. 그 사람은 정은처럼 장례식장에서 처음 본 사람일지도 몰라요.

 

 

그렇다면 기존 돌봄의 대안, 확장되는 돌봄에 대해서도 좀 더 들어보고 싶어요.


: 관련해, 공연 준비로 워크숍을 할 때 『돌봄 선언』에서 봤던 ‘난잡한 돌봄’이라는 표현이 떠올라요. 가족이나 친구, 연인처럼 명확한 단어로 정의되는 관계를 넘어선 돌봄, 사회와 공동체 전체적으로 이루어지는 보편적인 돌봄을 의미하는 것이죠. 그러한 돌봄은 어떤 관계나 가치를 흑과 백으로 명확하게 구분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그 경계를 흐려볼 때 가능해져요.


: 돌봄이라 하면 특정 시기에 자기 아이를 키우거나 부모님 병간호를 하는 것만 떠올리기 쉬운데, 사실 사람은 평생 돌봄을 받고 또 누군가를 돌보며 살아가요. 인생 전체에서 돌봄에서 벗어나 있는 시기는 겨우 20대 정도랄까요. 그보다 어릴 때는 돌봄 받는 입장이고, 그 이후는 타인을 돌보는 시간이죠. 게다가 사실 20대조차도 의식하지 못할 뿐, 사회 전체의 관점에서 본다면 굉장히 많은 돌봄에 빚지고 있고요.

 

 

[국립극단] 은의 혀(2024) 홍보사진05.jpg

 

 

“돌보는 사람 곁에 서 있는 사람. 또 그 사람 곁에 서 있는 사람...

스크럼을 짜듯이 ‘곁’들이 늘어나는 게

결국 저는 사회적 연대의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말씀을 듣다 보니 서로를 돌보는 일은 결국 우리가 민폐 끼칠 것을 감수하며 서로에게 다가갈 때 가능한 게 아닌가 생각도 하게 돼요.


: 옆집 숟가락 개수까지 알던 시대에 큰 반감이 쌓인 탓에 언제부터인가는 서로 묻지 않고 거리를 두는 게 상대방을 존중하는 것으로 여겨지는 듯해요. 물론 타인의 삶에 지나치게 간섭하는 건 자제해야 하지만, 연대라는 것은 결국 저 사람의 일을 내 일로 느끼는 것에서 시작된다고 생각해요. 저 사람의 삶을 내 뜻대로 바꾸려는 게 아니라 내가 저 사람이라면 무엇이 필요할까 고민하고, 그 사람의 곁에 있어 주는 게 출발점이 될 수 있겠습니다.

 

 

그럼 사회적 연대는 어떻게 가능할까요? 두 분의 자유로운 생각을 듣고 싶습니다.


: 일대일 관계는 무너질 수밖에 없어요. 누군가 기대고 있던 한 사람이 무너지면 그 사람 곁에 다른 누군가가 있어야 하죠. 돌보는 사람 곁에 서 있는 사람. 또 그 사람 곁에 서 있는 사람... 스크럼을 짜듯이 '곁'들이 쌓이고 늘어나는 게 저는 결국 사회적 연대의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 혼자인 것보다는 한 명 더 같이 있는 게 생존에 도움이 되기에 인간이 사회적 동물이 되었다고 생각해요. 연결된 고리를 계속 끊고 고립시키는 것은 효율성을 따지는 일부인 것 같아요. 연결의 감각을 계속 차단하고, 우리가 믿을 건 돈밖에 없다고 프레임을 씌우려는 움직임이 있어요. 그것을 끊임없이 의심하고 거기에 새로운 질문을 던지는 일. 그게 사회적 연대의 첫걸음 아닐까요.

 

 

이런 세상에서 두 분이 생각하는 ‘같이’의 의미는 무엇인가요?


: ‘같이’는 저 자신을 위한 것이에요. 저는 늘 삶의 전제 조건이 죽음이라고 생각하는데, 그 죽음으로 가는 길에 누군가와 같이 무언가를 하면 제 삶의 색깔이 더 풍성해진다고 믿거든요. 즉 ‘같이’와 ‘혼자’는 서로 엄격하게 분리된 게 아니에요. 혼자 잘 있기 위해서는 같이 있는 것도 잘해야 합니다. 그래서 제가 같이, 함께 무언가를 하려는 건 그것이 특별히 이타적인 행동이라서가 아니라 결국 나에게 좋기 때문이죠. 내게 필요한 것이니까요.


: 개인이 독립적으로 살 수 있다는 믿음이 허상이라고 생각해요. 예를 들어 카페에 앉아 커피 한 잔을 마시더라도 이 커피 원두가 재배되어 한국에 오기까지 수많은 사람의 손을 거쳤고, 원두를 커피로 만드는 것도 카페 직원의 노동이잖아요. 내가 번 돈으로 '독립적으로' 사 먹는 것 같지만 세상 모든 것에 기대어 나에게로 온 것이에요. 

 

돌봄 문제를 다룬 제 전작 <정희정>을 만들며 많은 도움을 받은 책, 『새벽 세 시의 몸들에게』를 보면 우리는 서로에게 몸을 빚지고 있다는 말이 나오는데 그 말에 공감합니다. 우리는 결국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예요.

 

 

인터뷰를 마치며, 마지막으로 하실 말씀이 있다면 해주세요.


: 작품을 읽어본 분들은 어떻게 무대화가 될지 많이 궁금해하실 정도로 쉽지 않았던 대본을 연출님이 멋지게 만져주셨어요. 구현하기 힘든 부분까지요. 오셔서 즐겁게 보고 가시면 좋겠습니다.


: 타인을 그냥 지나치지 않고 오지랖일지라도 한 번 더 말을 건네볼 수 있는 세상이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만든 작품입니다. 주제가 무거워 보이지만 유쾌하고 엉뚱한 매력이 있는 극이기도 해요. 편안한 마음으로 극장에 오셔서 재미있게 보고 가시면 좋겠습니다. 부모님과 함께 보셔도 좋을 거예요.

 

 

[김소원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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