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당신은 매일 수많은 우주를 마주친다 – 낯선 사람에게 말을 걸면 [도서]

우리는 왜 분열되었을까
글 입력 2024.07.29 1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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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서며, 현대는 단절을 조장했다


 

당신은 하루를 보내면서 얼마나 대화를 나누는가? 수다가 많은 사람이라면 가족과, 친구와, 애인과 시간을 보내면서 입에게 쉴 틈 조차주지 않고 이야기를 나눌 것이다. 그렇다면 질문을 조금 바꿔보자.


당신은 하루를 보내면서 낯선 사람과 얼마나 대화하는가? 직업 상 이야기를 나눠야 하는 경우를 제외하곤 대부분 대화를 하지 않거나 다섯 손가락 안에 꼽을 수 있을 정도로 희박할 것이다.


지극히 당연하다. 모르는 사람에게 말을 걸고 잡다한 이야기를 늘어놓는 것은 사회 통념상 민폐를 끼치는 행위라고 오래 전부터 인식되어 왔으니. 하지만 현대로 접어들며 사적인 대화를 배제하고서라도 타인에게 도움을 얻기 위한 대화마저도 현저히 줄어들고 있다.


일상을 보내며 당신이 접하는 것들을 떠올리면 위 주장에 쉽게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식당에 가면 음식을 키오스크(무인단말기)를 통해 주문을 하고, 초행길을 거닐때에도 행인에게 길을 물어보지 않고 지도 앱을 통해 길을 찾는다. 심지어 장을 보러 마트나 시장에 갈 필요가 없다. 아침에 눈을 뜨면 음식 재료들이 어느 샌가 현관문 앞에 배송되어 있다. 배달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이러한 서비스에 사람이 실종되었을 뿐이다.


이러한 생활양식의 변화는 소비자의 니즈와 공급자의 일방적인 강요가 결합되어 만들어진 것이다. 소비자는 타인과 불필요한 접촉을 원하지 않고 직원을 고용해 지속적인 지출을 감수하는 것보다 기계로 이들을 대체하는 것이 값싸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현대인은 사람 대신 AI 챗봇과 대화를 나누고 눈이 아닌, 화면의 불빛을 바라보며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노동자 소외도 중요한 문제이지만, 이 글에서 주목할 부분은 사람들이 타인과의 대화를 꺼리고 있다는 점이다. 심지어 요즘은 꺼리는 정도가 아니라 경계하는 수준까지 이르렀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현상에 대한 원인과 문제점. 그리고 해결 방안에 대한 힌트를 베테랑 저널리스트 출신 작가 조 코헤인이 쓴 책 에서 얻을 수 있다.

 

이제부터 타인들 간 최소한의 연결마저 단절된 사회의 원인과 그것이 유발하는 것들에 대해 저자가 설명한 개념을 통해 간략히 설명해보려 한다. 물론 한국인의 시선에 맞게. 한국인의 통념을 깰 정도의 용기는 필자가 갖추지 못한 수많은 것들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경계가 아닌, 맺음이 인간의 본성이다.


 

작년 여름, 한국을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던 수차례의 흉기난동 사건. 그리고 사회를 뒤흔드는, 낯선 사람을 상대로 한 성폭행과 살인 등 강력 범죄들. 이러한 이슈들은 발생 즉시 순식간에 여러 창구를 통해 대중들에게 전달된다. 그렇기에 현 시대에서 낯선 사람은 어색함의 대상보다 공포의 대상이 된다.


분명히 보도되어야 하고 가해자에 대한 엄벌이 필요하기에 언론의 행태와 수용자의 인식을 지적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저자는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통해 낯선 사람에 대한 경계심이 강화되는 것은 인간의 본성을 거스르는 것이며 사람들이 원하는 결과가 아니라고 보았다.


저자는 다양한 연구결과를 근거로 인간은 타인과의 대화를 통해 행복을 느낀다고 주장했다. 그 중 하나의 예시로 보노보라는 유인원을 소개하며 기존의 통념을 뒤엎는 기발한 이야기를 꺼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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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눈동자, 침팬지와 비교했을 때 유순해 보이는 얼굴형은 인간과 보노보의 유사성을 잘 나타내는 특징이다.

 

 

인간이 다른 집단과 우리 집단에 소속되지 않는 개인을 경계하는 것은 본성에 의해서 행해지는 것이 아니라 학습된 것이라는 주장이다. 낯선 개체를 배척하는 것은 침팬지에게서 주로 나타나는 특징인데 이는 인간의 본성과는 다르다. 인간은 보노보와 유사한 방식으로 타인과 관계를 맺는다. 이에 대한 근거로 인간이 타인과 대화하며 관계를 맺을 때와 보노보가 낯선 개체와 만날 때 두 종족 모두 행복 호르몬인 세로토닌이 증가하고, 공격성을 유발하는 테스토테론이 감소하기 때문이다. 저자는 이러한 과학적 사실을 근거로 들어 타인과의 연결에 대한 중요성을 주창했다.

 

또한, 여러 문화권에서 공통적으로 낯선 이에 대한 환대를 중요하게 여긴다는 점도 저자의 주장에 힘을 실어주었다. 정체불명의 방문객을 집에 들이는 행위. 현대의 관점에서는 상상도 못할, 위험한 행동이겠지만 우리나라를 포함한 대부분의 나라에서는 마땅히 행해져야 할 예의라고 여겼다. 그리고는 환대를 대접한 대가로 방문객과 이야기를 나누며 다른 세상에 대한 이야기. 즉, 각자의 우주를 공유한다. 그러므로 과거에는 낯선 사람과의 관계 맺음을 통해 행복을 향유하는 것이 당연하게 이뤄졌다.

 

 

 

낯섦과 다름을 배제하는 현대의 공동체


 

이런 사실에 비추어볼 때 행복해지기 위해, 혹은 외로움을 해결하기 위해 타인과 관계를 맺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그러나 현대로 접어들며 고립된 인간이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게 되었다. 이는 과거 마을 공동체, 씨족 공동체를 이뤄 서로를 돌봤던 인간이 현대로 접어들며 가족이라는, 최소 단위에 의지하며 살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족에게 의지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 아니다. 가족 구성원 중 마음을 터놓는 존재가 있다면 그것만으로 축복 받은 삶이라 할 수 있다. 그렇기에 의지할 곳도, 속한 곳도 없는 현대인은 커뮤니티나 SNS 등 온라인 세상에 쉽게 빠져들게 된다. 그곳에 존재하는 인간은 실체가 없기에 물리적인 위해를 걱정할 필요가 없으며, 무엇보다 나와 같은 생각, 가치관을 지닌 사람들로만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종종 온라인 공간에서 싸움이 벌어지곤 하지만, 그것은 온라인이라는 공동체 내부의 충돌이 아니다. 온라인은 투기장으로 존재할 뿐 명백히 다른 두 집단 간의 충돌이다.


다른 생각이 존재하지 않는 것은 다름을 인정하지 않는 부정적인 결과를 초래한다. 게다가 이는 내가 속한 집단을 더 높게 평가하는 착각을 불러일으키는데 이를 심리학 용어로 ‘내집단 편애’라고 한다. 그렇기에 나의 배경과 큰 차이를 보이는 타인과 접촉할 때 상대의 생각을 어림짐작하여 깎아내리고 거리감을 느낀다.


이는 현 사회에서 나타나는 관계 단절 문제의 주범이다. 인간은 각자 무궁한 우주를 지니고 있지만, 만연한 내집단 편애로 인해 각자의 우주가 맞닿을 기회를 점차 잃어가고 있다. 아이러니 한건, 현 사회는 외로움이 사회문제라는 것을 인지하고도 내집단 편애를 강화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렇기에 밑 빠진 독의 구멍이 더욱 커져가는 것이다.


책의 후반부에서는 낯선 사람과 대화하는 법을 배울 수 있다. 실제로 낯선 사람과 대화를 나눌 때 불쾌하기보다 긍정적인 경험을 나눴다고 답한 사람이 훨씬 많았다고는 하지만 필자나 여러분이 한국에서 실천하기에는 현실적으로 힘들지 않을까.

 

그렇기에 타인과의 대화를, 생각을 나눌 기회를 마다하지 않았으면 한다. 이야기를 나누기 힘들 것 같은 사람이라도 미리 제단하지 않고 상대의 우주를 천천히 맛보았으면 한다. 즉, 빳빳한 주관을 잠시 내려놓고 타인을 대해보자는 말이다. 이내 예기치 않은 행복이 당신 마음 안에 들어앉을 것이다.

 

 

 

마무리하며


 

궁극적으로 외로움 문제는 공동체를 통해 해결되어야 한다. 그러나 사회는 그 역할을 전혀 수행하지 못하고 있기에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려 해결책을 찾아야 한다.

 

[낯선 사람에게 말을 걸면]의 저자는 종교가 공동체 활성화를 위한 하나의 수단이 될 수 있다고 하였다. 종교가 없다는 저자의 주장에 종교가 없는 필자가 격한 공감을 느꼈다.

 

과학과 기술의 발전으로 인한 사회 변화로 전지전능해 보였던 신은 죽었다. 그러나 종교는 죽지 않았다.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을 규합하고 이끄는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그러나 신의 실종으로 많은 신도를 잃었다. 더 이상 신의 존재를 부르짖는 방식으로는 과거의 위상을 되찾을 수 없다.

 

이런 상황에서 불교의 행보가 눈에 띈다. 불교 관련 물품을 상품화하여 박람회를 열거나 지역상생축제, EDM 공연. 심지어 미혼 청년들을 모집하여 짝을 지어주는 소개팅 행사도 벌인다. 이러한 새로운 움직임에 대해 옳다 그르다를 평할 수 없지만 종교의 본질, 종교 공동체를 회복하려는 보이는 것은 확실해 보인다.

 

불교의 예시를 들었지만 종교만이 능사가 아니다. 사회도 충분히 공동체를 회복하려는 노력을 펼쳐야 한다. 그러나 괜한 기대는 금물이다. 그저 자신의 행복을 챙기면 된다. 움직이고, 관계를 맺고, 대화를 나누고. 그렇게 얻은 행복을 타인에게 다시 나눠주는, 근거가 빈약한 희망을 펼쳐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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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한솔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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