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트레스와 우리 사이, 불협화음
‘스트레스는 만병의 근원!’ 이 말이 언제 처음으로 세상에 등장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미 너무나 익숙해 정설이 되어버린 스테디셀러 문구다. 무언가를 홍보하고 판매할 때 소비욕을 자극하기 위한 장치로 쓰이기도 하지만, 일상에서 쉽게 주고받는 말이기도 하다. 여기에서 등장하는 스트레스란 것은 무척이나 끔찍한 악당이다. 스트레스로 인해 두통이 발생하고 쉽게 피로를 느끼게 되며, 기억력이 감퇴하기도 한다. 장기적으로 보면 고혈압과 당뇨병 유발 등 무시무시한 질병을 유발하기도 한다. 스트레스가 이끌고 오는 끔찍한 결과를 보고 있으면, 대체 왜 스트레스라는 것은 존재하고 무슨 이유로 우리의 삶에 심심찮게 등장해서 몸과 마음을 불편하게 만드나 싶다.
위와 같이 스트레스가 가져오는 수많은 위험성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논리에 반기를 드는 학자 하나가 등장했다. 독일 프랑크푸르트에 사는 야생토끼를 연구하던 대학원생 마들렌 치게Madlen Ziege는 하나의 생명체가 어떠한 공간에서 살아가며 느끼는 스트레스가 생존에 미치는 연관성을 관찰하던 중, 스트레스에 대한 우리의 상식을 완전히 뒤엎는 신박한 관계식을 주장한다. 그는 수천 년 전 그리스 시대서부터 스트레스에 대한 여러 주장을 펼친 학자들에게서 포착한 색다른 관점으로 우리 시대의 스트레스가 지닌 오명을 벗겨낸다.
스트레스란 무엇일까? 우리가 매일을 살고 활보하는 공간과 스트레스는 어떤 연관이 있을까? 서식지로 인해 유발되는 여러 위협을 우리에게 알리기 위해 몸은 어떤 신호를 보내고 있을까? 주어진 이곳에서 매일을 살아가면서 우리는 어떻게 성장하고 진화할 수 있을까? <숨 쉬는 것들은 어떻게든 진화한다>는 우리가 살아가는 서식지와 스트레스, 생존의 연관성을 기본 주제로 삼아 이러한 질문에 답해나가기 시작한다.
스트레스와 생존의 연관성
먼저 저자는 스트레스에 대한 우리의 선입견부터 바로잡는다. 우리 시대를 대표하는 문구, ‘스트레스는 만병의 근원’에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이 문구는 스트레스가 온갖 근심, 불만과 함께 신체적인 고통까지 야기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러한 논리는 옳지 못하다.
스트레스는 괴로움을 야기하는 원인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를 위협하는 문제가 발생했을 때 그것을 인식하고 즉시 바로잡을 수 있도록 알려주는 신호다. 이를테면 서둘러 길을 비켜달라는 구급차의 사이렌이나, 물이 끓어오르면 쉬쉬 열을 뿜어내며 불을 줄여달라 울부짖는 주전자의 증기 소리 같은 것이다. 스트레스는 일종의 신호로서 우리가 문제 상황을 인식하고 곧바로 대처할 수 있게끔 돕는다.
이는 고대 그리스 사람들이 스트레스를 바라보던 태도와 유사하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히포크라테스는 건강이 균형에 달려있다고 보았다. 그러므로 균형을 무너트리는, 즉 우리의 건강을 위협하는 파괴적인 힘이 쳐들어온다면 우리 몸에서는 기존의 균형을 유지하기 위한 반작용이 일어난다. 그것이 바로 질병pathos이다. 무너진 균형으로 인해 질병이 유발되고, 질병은 온갖 괴로움을 야기한다. 그리고 이와 동시에 질병을 이겨내려는 신체의 항쟁이 일어난다. 이 지점에서 질병이 지닌 긍정적 특성, 포노스ponos가 등장한다. 포노스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고난의 악령이다. 포노스, 질병이 지닌 고난이라는 특성은 고통과 괴로움을 견뎌냄으로써 결과적으로 우리의 신체가 정상으로 되돌아가도록 돕는다. 즉, 포노스는 파괴적 힘에 대항하여 거둔 신체의 승리로서 우리에게 되돌아온다. 여기에서 일컬어지는 포노스가 우리 시대의 스트레스 개념에 해당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시대는 스트레스를 무엇이라 정의할까? 풀이하는 말은 다르지만, 히포크라테스의 관점과 크게 다르지 않다. 저자는 스트레스가 우리의 생물학적 적합성이 떨어지는 현상이라고 보았다. 우리가 어떤 공간에서 적합하게 살아간다는 것은 건강하다는 방증이고, 건강은 우리의 수행 능력으로 증명된다. 수행 능력이란 신체의 각 부분이 주어진 임무를 충실히 수행하는지의 문제이며, 수행 능력이 적절하게 유지되고 있다면 신체 전반의 내적 균형이 성립될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은 또한 우리가 건강하며, 결과적으로는 생물학적 적합성이 적절함을 의미한다. 그러나 우리 몸 곳곳에서 문제가 발생해 수행 능력이 저하되고 신체의 내적 균형이 위협받으면 결과적으로 우리의 생물학적 적합성도 저하되며 스트레스가 등장한다. 이러한 스트레스는 괴로움이라는 형태를 하고 있지만, 우리에게 문제를 인지시키는 신호로서 다가온다. 그리고 이때부터 우리의 몸을 정상으로 회복하는 과정이 시작되는 것이다. 요컨대 저자가 정의하는 스트레스는 우리의 항상성을 유지하게끔 돕는 긍정적인 역할을 한다.
이곳이 우리에게 스트레스가 되는 이유
스트레스와 삶에 대한 모든 이야기는 저자가 프랑크푸르트에 살고있는 야생토끼를 관찰하던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도시의 야생토끼들을 관찰하며 도시 생태를 연구하기 위해 저자는 고향인 베를린을 떠나 프랑크푸르트로 왔다. 그러나 이곳에서의 삶은 그야말로 고통이었다. 프랑크푸르트 특유의 딱딱하고 진중한 분위기는 베를린의 자유로움과 정반대였다. 반듯한 정장을 맞춰 입고 빽빽한 빌딩숲을 거니는 사람들 사이에서, 저자는 이곳이 자신과 어울리지 않는 장소임을 깨달았다. 그것은 신체적인 반응으로까지 나타나, 머리칼이 빠지고 불면증으로 밤을 지새웠으며 심지어 일을 하기 위해 컴퓨터를 켤 수조차 없었다. 온갖 스트레스로 인해 프랑크푸르트에서 저자의 삶은 고통스러웠다. 그런 와중에 도시의 녹지를 이리저리 누비는 야생토끼를 보며 저자는 이런 의문을 품기 시작했다. ‘도시에서 느끼는 스트레스에도 불구하고, 야생토끼는 왜 이곳에 살기로 결정했을까?’ 질문은 이내 다음과 같이 이어졌다. ‘프랑크푸르트가 야생토끼에게 최적의 서식지가 되었듯, 각자의 특성과 잘 맞는 서식지(장소)가 존재할 수 있을까?’ 이러한 질문을 계기로 공간, 즉 생명체의 서식지가 야기하는 스트레스와 생존의 연관성에 관한 탐구가 시작되었다.
서식지는 그곳을 터전으로 삼은 생명체에게 여러 스트레스를 불러일으킨다. 서식지란 단어 대신 ‘공간’ 혹은 ‘장소’라는 친숙한 단어로 바꾸어 생각해보면 훨씬 납득하기 쉽다. 서식지가 주는 스트레스에서 생명체는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다. 그렇지만 생명체가 살기 선호하는 서식지는 존재한다. 가능한 적은 스트레스를 야기하는, 즉 최적의 서식지를 위해서는 크게 두 가지의 요인이 작용한다. 해당 서식지의 기후와 염도 등 ‘모든 공간 요소’와 더불어, ‘서식지를 공유하는 다른 생명체와의 관계’가 결합되어 서식지와 우리 사이의 적합성을 형성한다.
먼저 ‘모든 공간 요소’는 해당 생명체가 살아가는 공간을 구성하는 모든 비생물적 요인이다. 모든 생명체는 생존을 위한 최소한의 조건으로서 저마다의 서식지 요구사항을 지닌다. 물고기를 예로 들자면, 특정 범위 내의 수온이 보장되고 염도가 얼마 이하인 물에서 살아야 한다는 등의 조건을 말한다. 만약 이러한 요구사항이 적다면, 서식지의 환경에 대한 허용범위가 넓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곧, 해당 물고기가 자신의 생물학적 적합성을 지키며 살 수 있는 서식지가 많다는 것을 의미한다. 반면 서식지에 대한 요구사항이 많다면 해당 생명체가 살 곳을 선택하는 데 까다로울 수밖에 없다.
전자와 같이 요구사항이 적어 상대적으로 많은 서식지를 누릴 수 있는 생명체를 ‘광서식지 생물’이라고 부른다. 이들이 그렇게 할 수 있는 이유는 외부의 환경이 변화하더라도 내부 환경의 항상성을 잘 유지하기 때문이다. 외부의 온도가 하락할 경우 움직임을 늘려 스스로 체온을 끌어올리는 뒤영벌이나, 연못의 염도가 바닷물 수준으로 상승해도 체내 염도를 조절하여 일정한 값을 유지하는 줄무늬 대서양송사리가 그러하다. 그들은 내부 환경을 조절함으로써 외부 환경의 변화에도 항상성을 유지할 수 있는 광서식지 조절자이다. 이에 반대되는 개념인 협서식지 순응자는 외부에서 변화가 발생하면 내부 환경이 즉각 영향을 받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서식지를 찾기 어렵다.
다음으로 최적의 서식지를 결정짓는 두 번째 요인, 동료 생명체와의 관계에도 주목해보자. 동료 생명체란 같은 서식지를 공유하는, 생물적 스트레스 요인으로 일컬어진다. 동료 생명체가 스트레스 요인이 되느냐는 문제는 다음 세 가지 기준에 달려있다. 해당 생명체의 존재 자체만으로 생존에 위협이 되는지의 여부, 스트레스 요인의 강도, 그리고 스트레스의 지속 시간이다. 세 조건 중 하나라도 해당할 경우, 그 생명체는 스트레스를 유발하는 요인이 된다.
이 지점에서 흥미로운 점은, 스스로 생물학적 적합성을 증진하기 위해 동료 생명체와 의도적으로 긍정적인 관계를 맺기도 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이른바 협력을 통한 공생 관계를 형성한다. 이러한 관계는 동종끼리 함께 먹이를 찾고 새끼를 돌보는 것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다른 종과 상생하는 것까지 확장된다. 곤충, 조류, 포유류가 꽃식물의 수분을 돕는 것과 같이, 서로 다른 종은 협력함으로써 상호의 이익을 얻고 상생할 수 있다.
정리해보자면 스트레스는 해당 서식지를 구성하는 공간 요소, 그리고 동료 생명체와의 관계라는 두 가지 요인을 통해 발현되어 특정 공간과의 생물학적 적합성을 형성한다. 여기에서 공간이라는 모호한 개념을 도시로 좁혀보자. 저자는 도시에서 인간 자신이 느끼는 불편한 감각에 주목했다. 프랑크푸르트라는 도시와 저자 자신의 이질감에서부터 스트레스가 발현된 것이다. 이처럼 도시 공간과 우리 사이의 이질감에서 느껴지는 스트레스를 설명할 수 있는 논리가 존재한다. 그것은 바로 ‘도시 고유의 논리’이다.
도시 역사의 발전 과정에서 해당 도시만의 고유한 특성이 형성된다. 예컨대 역사적인 사건, 건설, 생태, 경제적 조건 등의 모든 요소가 결합되고, 이를 통해 사람들이 특정한 방식으로 도시를 경험하고 인식하게 된다는 것이 도시 고유의 논리다. 간단히 말해 도시를 이루는 모든 비생물적, 생물적 요인이 결합하여 도시만의 느낌, 분위기를 형성한다는 것이다. 이 이론의 공동 창시자인 브렌다 슈트로마이어는 ‘모든 도시에는 우리가 의식적으로 의존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우리의 일상적 행동을 결정하는 현실이 있다’고 말했다. 우리가 어떤 도시에 대해 생각하고 느끼는 부분은 ‘그 도시에서 기인한 진짜 인식’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사람들이 특정 도시에 대해 구체적으로 묘사하지는 않지만, 도시 고유의 논리는 광고판이나 행사 포스터를 통해 계속적으로 실현되어 이어진다.
이렇게 오랜 시간에 걸쳐 형성된 도시 고유의 논리는 거주민에게 안락함을 주고, 새로운 사람들에게는 이질감 또는 혐오감을 느끼게 한다. 그러므로 저자가 프랑크푸르트에 대해 이질감을 느끼다 못해 혐오감으로 괴로워한 것은 마땅했다. 그것은 저자의 어리광이나 핑계가 아니었다. 도시가 자신을 방문한 사람들에게 주는 감각에 대한 날 것의 인식이었다. 그러므로 저자가 느낀 혐오감은 프랑크푸르트 고유의 논리가 저자와 어울리지 않았기 때문이었고, 그러한 서식지가 부여하는 여러 스트레스 요인(예컨대 도시의 생김새, 사람들의 특성과의 이질감) 탓이었다. 즉, 프랑크푸르트는 여러모로 저자의 생물학적 적합성을 낮추는 곳이었기 때문에 그는 스트레스를 느끼고 괴로웠던 것이다!
스트레스를 다루어내는 생명체의 힘
지금까지의 내용을 정리하면, 서식지가 어떤 생명체에게 스트레스를 유발하는 이유는 비생물적 스트레스 요인과 생물적 스트레스 요인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스트레스 요인들이 도시에서 발현되는 과정을 설명하는 ‘도시 고유의 논리’까지 알아보았다. 이를 통해 프랑크푸르트에서 저자는 스트레스를 느낀 반면, 야생토끼는 도시 생활에 적응하여 살아가는 이유를 알 수 있었다.
한편 여기에서 흥미로운 점이 있다. 그것은 자신을 둘러싼 환경 요소 혹은 동료 생명체가 적합성에 위협이 되더라도 생명체는 자신을 바꿈으로써 적응을 시도했다는 것이다. 예컨대 광서식지 생물은 자신의 내적 환경을 조절하는 방식으로 변화에 대응했고, 동료 생명체와는 공생 관계를 맺으며 항상성을 유지할 수 있었다. 이러한 스트레스 반응을 통해 기존의 스트레스 요인이 차후에는 그렇지 않게 되었다는 긍정적인 변화가 인상적이다.
이러한 스트레스 반응은 일회성이지만, 스트레스 요인과 반복적으로 마주함으로써 해당 생명체는 일종의 교훈을 학습한다. 예컨대 프랑크푸르트의 야생토끼의 경우, 사람들과 마주하는 경험을 반복하면서 ‘인간이 보일 때마다 도주할 필요는 없다’는 교훈을 얻게 된다. 이러한 깨달음을 통해 야생토끼는 프랑크푸르트라는 새로운 서식지에 맞추어 자신이 지닌 습관을 변화하며 그곳에 적응해 나간다. 즉, 일회성의 스트레스 반응은 이후 등장할 스트레스 요인을 처리하는 데 도움을 주는 특성으로 작용하여 결과적으로 생명체의 생존 가능성을 높이고 생물학적 적합성을 고취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기존의 통념을 뒤바꾸는 새로운 인사이트가 발굴된다. 바로 스트레스 반응은 스트레스가 등장하더라도 우리의 생물학적 적합성을 유지하도록 도와주기 때문에, 생명체가 스트레스 요인에 적응하는 데 성공한다면 그 힘은 더 이상 파괴적이지 않고 유익함을 선사해준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스트레스가 우리의 삶을 가로막는 방해물이라고 보는 태도는 더 이상 옳지 못하다. 도리어 변화하는 외적 환경에 맞추어 우리가 이곳에서 계속 삶을 이어나갈 수 있도록 적응을 촉구하고 결과적으로 진화로 이끄는 기폭제가 된다.
그리고 이토록 벅찰 만큼 새로운 변화는 단 하나의 도약에서 시작한다. 바로 환경에 맞추어 자신을 바꾸는 것이다. 주변을 바꿀 수 없다면 자신을 바꾼다. 그것에서 시작된 진화의 단초는 결과적으로 기존의 스트레스 요인을 제거하고 우리 스스로 새로운 능력을 꿰차게 해주었다. 이것이 생명체가 지닌 내면의 힘이다. 환경에 순응하기에 그치지 않고 스스로 변화함으로써 적응을 시도하는 것. 그릇된 장소에 놓인 것 같은 우리를 향한 실질적인 위로가 여기에 있다.
최적의 서식지라는 이상을 향해
책의 마지막으로 향하는 길목에서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냉정하게 말해 진화적 적합성 관점에서 최적의 서식지란 없다’고. 모든 스트레스가 말끔히 사라지는 일이란 있을 수 없을 것이다. 하루에도 수많은 변화가 발생하고 그에 따라 우리의 마음은 쉽사리 요동치기 때문이다. 우리의 균형이 위협받지 않고 평온할 날들이 영원할 일은 아마 없을 것이다.
그러나 저자는 현실적인 대안을 내어준다. 동물과 식물이 그러하듯 우리도 현재에 머무르는 것이다. 동식물은 매 순간 어떠한 결정이 생의 연장에 옳은지 알고 있다. 그리고 선택한 길을 향해 선택적으로 자원을 활용한다. 그렇게 확신할 수 있는 것은 그들의 삶이 향해야 할 목적지를 분명히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과거에 붙잡히거나 미래에 대한 걱정을 사서 하지 않는다. 다만 무슨 일을 해서라도 포기할 수 없는, 자신의 적합성을 높이고 생존 가능성을 높이는 궁극적인 목적으로 향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도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다. 자신이 궁극적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최대의 능력을 발휘하면서 살아갈 수 있도록 자신의 삶을 행복하고 만족스럽게 만드는 것은 무엇인지를 말이다. 저자는 다른 생명체가 그러하듯 인간도 자신만의 신체적, 정서적 욕구를 따르는 것이 마땅하다고 이야기한다. 그것이 궁극적으로 우리 삶의 목적, 즉 적합성을 높여 생존 가능성을 극대화하는 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깨우쳐야 한다. 자신은 어떤 종류의 동물인지 알아내고, 자신에게 필요한 서식지 조건이 무엇이며 최적의 장소는 어디인지 알아내야 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적응하며 살아가야 한다. 야생토끼가 본디 살던 시골을 떠나 도시 한가운데에 자리 잡아 삶을 꾸려나가듯이. 살아있다는 것은 단지 살아있다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의 삶에 충분히 만족하며 살아가고 있다는 방증이고, 행복과 건강을 거머쥔 삶을 의미하며 생존 그 이상의 가치를 확립하였음을 보여준다.
그러니 삶이란 무엇이고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의 문제는 그리 복잡하지 않을지 모른다. 자신을 변화해가며 살아가는 매일 그 자체로 우리의 철학은 답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마음이 불안하고 머리가 복잡할 때는 생물학자의 이야기에 집중해보자. 분명한 신뢰를 주는 명쾌한 조언이 거대한 문제의 돌파구가 될지 모른다. 야생토끼와 같이 우리만의 프랑크푸르트 도심 공원을 발견할 수 있기를 바라며, 불안과 친구가 되는 현재에 집중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