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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pinion] '희랍어 시간'을 읽고 [도서/문학]

by 강민경 에디터
2024.04.22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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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랍어 시간을 다 읽었다. 이로써 한강 작가의 저서는 《채식주의자》, 《희랍어 시간》,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 총 3권을 읽게 된 것이다. 우선 그가 쓴 소설 두 권은 모두 재미가 있었다. 공통적으로 고요한 일상을 배경으로 하지만, 주인공들은 그 고요함 속에서 누구보다 격렬하게 고뇌하고 있었다.


읽는 도중에 든 생각은 왜 한강의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이유 모를 부채감을 그렇게도 느끼고 있는 것일까? 그들은 각각 "언어"를 사용하는 것에, "생명을 입에 넣는 것"에 부채감을 느끼고 있다. 《채식주의자》에 등장한 채식주의자는 입 안으로 음식물을 넣는 것 자체에 거부감을 느끼고, 종국에는 나무가 그러하듯 빛만으로 생존하기를 소망한다. 한편, 《희랍어 시간》에 등장하는 주인공은 말을 사용하는 것을 두려워 한다. 입을 열어 말을 꺼내고, 감정이나 생각을 표현하는 것 자체를 소스라치게 끔찍히 여긴다. (물론 여기에는 자신의 트라우마가 개입되어 있긴 하지만)


언어(말)를 사용하는 것과 음식을 섭취하는 것.

 

두 인물의 행위는 무의식적으로 행하는 일상적 행위와, 통상적으로 인간스러움의 범주-어쩌면 생명의 범주-에 들어설 수 있는 것들에 맞선다. 이들은 인간(생명)이라는 굴레가 그렇게도 역겨웠던 것인가? 어째서 이러한 주인공을 두 작품에 걸쳐 내보인 것인지 궁금증이 생긴다. 아무 이유도 없을 것 같지는 않은데. 말. 그리고 생명을 영양분으로 삼는 것. 말은 무형적으로, 생명 섭취는 유형적으로 폭력과 연관지을 수 있는 소재이기에 그런 건가?

 

다시《희랍어 시간》에 대한 감상을 말해보자면, 이 소설 속 구도는 상당히 흥미롭다. 내가 책을 고르게 된 이유도 그것 때문인데, 우선 소설에 등장하는 여성은 "말"을 잃었다. 그리고 희랍어 강사인 남성은 "시력"을 잃어간다. 말이 존재하지 않을 때 남성은 손바닥에 글씨를 쓰거나, 점자를 만지거나, 혹은 숨소리, 일렁이는 형체 같은 '기척'으로만 소통할 수 있다. 일상적 표현 수단을 잃어버린 둘은 그렇게 가장 기초적인 수단으로 소통한다. 그것은 간편하지는 않을지언정, 말이나 바라봄을 통한 접촉보다 강렬하다.

 

그러나 끝까지 여성은 목석 같았고 남성은 자신의 불안 속에서 최후의 발악을 한다. 사실 그럴 수 밖에 없었던 게 남성은 "말"을 잃은 자와의 소통 창구(필담, 수화 등)라 할 수 있는 기관을, 여성은 "시력"을 잃은 자에게 표현을 전달하는 기관을 잃은 것이다. 다른 곳을 향한 서로는 결국 어긋나 버린다.


한편, 마음 한켠에 작게 드는 의구심은 그 둘이 처음 만난 희랍어 시간에서 마지막으로 나눈 기척까지. 마지막에 크게 어긋나 버리고서는 그냥 끝나는 건가? 두 명이 잃은 말과 시력은? 여기서 끝이 나는 것인가? 사실 그렇게 마무리 짓는 게 《희랍어 시간》이라는 주제에 부합하는 것 같긴 하지만, 내 안에는 해소되지 못한 무언가가 애매모호하게 남아있는 기분이다. 생각해보면 소통 수단을 잃은 두 사람이 마지막으로 겹쳐지는 그 국면이 이 소설의 목표가 달성되는 순간이기도 하니 충분히 납득이 가는 결말이긴 하다.


여튼 소설을 정말 오랜만에 읽은 것 같은데, 문학 속에 등장한 낯선 표현과 비유를 내 안에서 짐작해보는 과정이 무척 흥미로웠다. 특히 내가 상상치도 못 한 비유들을 읽어내릴 때는 기존에 사용하지 않던 새로운 감각 기관(오감을 넘어선 제 6의 감각기관... 뭐 그런 건가)을 개발한 것마냥 마냥 생경하고 또 재미있었다. 필사의 목적은 그런 순간을 표현하는 방법을 배워나가기 위한 것인가... 종합적으로 《희랍어 시간》은 비유가 가진 강력한 힘을 배울 수 있었고, '희랍어', '말', '시력' 등의 독특한 소재가 주는 재미를 알게 된 소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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