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한강 「내 여자의 열매」, 『채식주의자』 다시 읽기 [도서/문학]

식물로의 변신을 통해 자유로워지기
글 입력 2023.05.27 1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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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시작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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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의 소설 「내 여자의 열매」와 『채식주의자』는 여성 인물이 자신의 신체를 식물로 변형하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문학 속 ‘변신’ 모티브는 오래전부터 자주 등장했다. 특히 ‘여성’과 ‘식물’은 빈번하게 연결되어 왔다. 작품을 읽다보니, 이러한 변신을 통해 이들이 무엇으로부터 벗어나고 무엇을 지향하고 싶은지에 대해 관심이 생겼다. 물론 ‘변신’이 자신의 의지로 발생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두 작품에서는 공통적으로 자의로 '변신'이 이루어지기에 이에 주목하고자 한다. 

 

한강 작가는 두 작품에 걸쳐 반복적으로 몸을 식물로 변형하는 혹은 변형을 원하는 여성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두 작품은 유사해보이지만, 그 변신이 다른 모습으로 나타난 점이 흥미롭다. 한강의 소설 속 ‘몸’ 이미지와 ‘식물성’, ‘변신’에 주목하며 작품을 다시 읽어본다.  

 

 

 

'병'과 '비정상'


 

병은 거부감과 두려움을 일으키며 비정상적인 것으로 취급된다. 건강과 현재의 안정된 상태를 위협하는 것이고 불안정하게 만드는 문제로 간주된다. 질병은 오염, 더러움의 이미지와 연결된다. 우리는 병에 걸린 사람들을 격리한다. 이는 그들을 격리된 공간에서 집중적으로 치료하도록 하기 위함이기도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그러한 병, 오염이 사회 전체적으로 퍼져 사회를 혼란에 빠트리지 않게 하기 위해서다.

 

한강 작품 속 ‘몸’들은 병을 앓고 있다. 이러한 병 혹은 병적 증상에는 위장장애나, 거식증, 망상장애 등 뿐만 아니라 기존 사회질서나 규범에 어긋나는 것들, 병의 이미지(오염, 혼란 등)를 갖거나, 극단적이거나 불쾌감을 일으키는 행위들 역시 포함된다. 『채식주의자』 속 영혜의 행동(브래지어를 입지 않음, 햇빛을 보면 옷을 벗으려 함 등)은 주변 사람들로 하여금 불쾌감을 주거나 거부감을 일으킨다. 또 그래서는 안 된다는 금기의 이미지를 갖는다. 그것들은 어떤 사회적 규범이나 예의를 어기는 행위로 여겨지고 마치 어떤 병적 증상의 특징을 갖는다.

 

이러한 모습을 보이는 여성들에게 작중 인물들은 마치 병이나 오염, 혹은 전염병 환자를 대하듯 거부감과 혐오감을 보인다. 이들은 정상 위치에서 벗어난 존재들처럼 여겨진다. 불안과 망상, 트라우마와 꿈으로 인한 극단적 채식의 선택, 몸에 멍이 들거나 식물처럼 신체가 변화하는 것, 치료 혹은 장수를 위한 선택으로서의 채식이 아니라 정신적 이유로 선택한 채식 등도 병으로 간주된다.


 

“배도 고프지 않아. 물은 예전보다 많이 마시는데…… 하루에 밥은 반 공기도 못 먹어. 그렇게 안 먹으니까 위액이 잘 분비되지 않는 것 같아. 억지로 먹어도 소화가 안되고 자꾸만 아무데서나 토악질을 해.” (182쪽) 


“병원에 가봐.”

아내의 얼굴을 들어올리며 나는 말했다. 

“내일 당장 내과에 가봐.”

아내의 얼굴은 볼썽사납게 젖어 있었다. 마른 시래기 같은 그녀의 머리채를 손갈퀴로 빗어내리며, 나는 이를 드러내어 웃어 보였다.

“그리고, 제발 나다닐 때 조심 좀 해라. 다 큰 사람 몸에 이 멍이 다 뭐냐? 어린애도 아니고.” (183쪽)


……시름시름 앓다가 죽어갈 것 같단 말이야. 그 십삼층에서 내려오지 못할 것 같단 말이야. 빠져나올 수 없을 것 같단 말이야.

(중략)

이곳 상계동 아파트에 집을 얻어 살기 시작한 첫해에 아내는 과연 자주 잔병을 앓았다. (184쪽)


여기서는 답답해서 살 수가 없어. 콧물도 가래침도 새까매.

(중략)

나는 더 이상 견딜 수 없다고 느꼈다. 

뭐가 답답하다는 거야?

내 짧고 아슬아슬한 행복을 함부로 깨뜨리는 아내의 예만함을, 자신이 말한 대로 낡은 우울질의 피가 흐르는 그녀의 깡마른 몸뚱이를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188쪽)


아내의 문제는 무엇일까. 어떤 괴로움이 심인성의 장애까지 불러일으킨 것인지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이 여자가 이렇게 나를 외롭게 해도 되는 것인지, 무슨 권리로 나를 외롭게 하는 것인지 의아해질 때마다 막막한 염오감이 오래된 먼지처럼 켜를 이루어가는 것을 느낄 뿐이었다. (189쪽)


6박 7일 간의 해외 출장을 하루 앞둔 일요일 아침, 거의 살갗 전체에 푸른 피멍이 앉아 흰 부분이 반점처럼 보이는 두 팔로 베란다에서 빨래를 털고 있는 아내를 보았을 때 나는 숨이 막히는 것을 느꼈다. 

(중략)

“병원에 가, 알았어? 피부과에 가, 아니, 그럴 게 아니라 종합병원에 가봐.” (189~190쪽) 

 

(한강, 「내 여자의 열매」 中)

 

 

“골고루, 못 먹는 것 없이 먹는 사람이 건강한 거 아니겠어요?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원만하다는 증거죠.”

아까부터 아내의 젖가슴을 흘끔거리고 있던 전무 부인이 말했다. 마침내 그녀의 화살은 아내에게 직접 날아왔다. 

“채식을 하는 이유가 어떤 건가요? 건강 때문에…… 아니면 종교적인 거예요?”

(중략)

“집사람은 오랫동안 위장병을 앓았어요. 그래서 숙면을 취하지 못했죠. 한의사의 처방대로 육식을 끊은 뒤 많이 좋아졌습니다.”

그제서야 사람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이네요. 저는 아직 진짜 채식주의자와 함께 밥을 먹어본 적이 없어요. 내가 고기를 먹는 모습을 징그럽게 생각할지도 모를 사람과 밥을 먹는다면 얼마나 끔찍할까. 정신적인 이유로 채식을 한다는 건, 어찌됐든 육식을 혐오한다는 거 아녜요? 안 그래요?” (262쪽) 

 

(한강, 『채식주의자』 中)

 


누군가가 병에 걸렸다면, 즉 ‘정상’의 범주에서 벗어난 존재가 되었다면 사회와 신체는 그것을 치료하려고 하거나 정상의 범주에 다시 위치시키려고 한다. 작품 속 주인공은 우리 혹은 소설 속 사회와 다수가 ‘비정상’이라고 생각하는 위치에 있다. 두 소설은 공통적으로 남편을 서술자로 하여 변해가는 아내의 모습을 서술한다. 남편의 눈에 그려지는 아내는 환자 같고 또 위협적이다. 그녀는 병적이고, 병에 걸린 것 같으며, ‘비정상적’이고 ‘비정상’이 되어간다. 주인공은 아내를 치료하려고 한다.

 

「내 여자의 열매」속 남편은 아내의 신체에 생기는 멍을 보고 어떤 병에 걸렸거나 어딘가에 부딪쳐서 그것이 생겼다고 이해한다. 아내의 부주의를 책망하기도 한다. 신체의 멍은 그렇게 이해할 수 있지만 아내가 음식을 제대로 먹지 못하고 계속 토하거나 이런 곳에서는 살 수 없다고 말하거나 햇빛을 보면 벗고 싶어하는 욕망 등은 해석할 수 없고 이해할 수 없다. 의사도 병을 진단하는 기계도 그 증상을 알지 못한다. 그는 그녀의 상태를 “노말”이라고 진단한다. 

 

 

노말인데.

쯧, 하고 입맛을 다시며 의사가 중얼거렸지요. 

지금 보이는 게 위장인데…… 아무 이상 없어요.

모든 것이 ‘노말’이라고 그분은 말했어요. 

위, 간, 자궁, 콩팥 모두 정상인데. (196쪽) 

 

(한강, 「내 여자의 열매」 中)

 


그러나 외적으로 그녀는 점점 변화한다. 멍은 어떤 외상으로 인해 발생하는 증상인데, 작품 속에서 어떤 물리적 외상은 등장하지 않는다. 아내는 어떤 것에 물리적으로 충격을 받지 않았는데도 몸에 멍이 든다. 그는 아내의 문제를 이해하지 못하고 그 신체 변화를 그저 바라보기만 한다.

 

『채식주의자』 속 ‘채식’은 병처럼 다뤄진다. 아내는 극단적인 채식을 하며 꿈으로 인해 거의 잠을 자지 못하고, 브래지어를 풀면 덧입던 조끼도 입지 않는다. 평소에 고기를 잘 먹고 먹성 좋던 영혜는 점점 변해간다. 남편은 이것을 문제라고 생각하고, 가족들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가족들은 영혜에게 억지로 고기를 먹이려고 한다. 주인공은 후반부에 옷을 벗고 물어뜯긴 자국이 있는 동박새를 쥐고 있는 아내를 보며 모르는 여자라고 말한다.『채식주의자』속 남편은 아내를 타자화한다. 그는 그녀를 이해하기를 포기한다. 그저 강요할 뿐이다. 

 

두 작품 속 서술자와 세계는 주인공을 ‘비정상’으로 규정하고 그렇게 그려낸다. 또한 작품 중간 중간 삽입되는 주인공의 내면은 환상적이고 몽환적인 언어로, 의식보다는 무의식에 속하는 것처럼 서술된다.

 

원래의 상태를 ‘정상’으로 둔다면「내 여자의 열매」속 ‘아내’와「채식주의자」 속 영혜는 점점 ‘비정상’ 쪽으로 향한다. ‘아내’는 몸에 멍이 들기 시작하고, 영혜는 꿈과 트라우마 때문에 고기를 전부 버리고 브래지어를 풀고 다니며 잠을 자지 못하고 계속 야위어간다. 이들의 병적 증상은 그들 자신만의 괴로움이나 변화가 아니다. 그 병적 증세는 번진다. 다른 이들 역시 식물이 되어가거나 채식을 선택하거나 멍이 드는 것이 아니다. 그 병적 증세로 인한 여파가 생기는 것이다. 서술자들은 일상을 잃어버리게 된다.「내 여자의 열매」 속 서술자는 다시 사무치게 외로워지고, 「채식주의자」속 서술자는 일상의 평온을 잃어버린다. 어떠한 병적 행위, 이들이 보이는 증상은 그들만의 문제가 아니게 된 것이다. 이들은 병든 자를 격리하거나 치료하려고 한다. 이들로 인해 초래되는 혼란을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 여자의 열매」속 증상은 치료가 불가능하게 그려진다. 주인공은 식물이 된다. 서술자는 아내와 소통하기를 포기하고 아내가 아니라 식물, 소통할 수 없는 사물로 그를 대한다. 「채식주의자」 속 증상은 마치 치료가 가능할 것처럼, 현실의 증상처럼 그려지며 『채식주의자』라는 소설집 전체에서 영혜는 「내 여자의 열매」처럼 완전한 나무가 되지 못한다. 완전한 신체 변형은 불가능하다. 영혜는 끝내 인간의 육체를 완전히 버리지 못한다. 「내 여자의 열매」는 완전히 식물의 삶을 체화하고 실제로 식물이 완전히 되지만, 『채식주의자』는 연작 소설집 전체에서 식물이 되는 것은 실패하며, 영혜에게는 다른 생명체를 해치지 않는 것도 채식주의도 어렵다. 영혜는 끝내 자기 자신을 해치는 것을 선택한다. 스스로를 죽음에 빠트려 식물로 다시 태어나고자 한다. 영혜의 가족들은 영혜를 이해하지 못한다. 그를 치료하려고 하고 입안에 고기를 밀어넣는다. 

 

현실 세계는 직접적으로 무언가를 죽이고 잡아먹는 구조가 은폐되어있다. 정확히 피해자와 가해자로 구분지어 인과성을 파악하기에는 살해의 과정에 너무 많은 것들이 관련되어 있다. 그와 달리 영혜는 꿈속에서 가해자와 피해자가 뚜렷한 살육의 이미지를 계속해서 접한다. 무언가를 잡아먹으며 살아가야하는 사회 구조는 영혜의 꿈 속에서 직접적으로 누군가를 살해하고, 목을 자르고, 혹은 목이 잘리고 날고기를 먹는 장면으로 나타난다. 영혜의 꿈은 현실에서 행해진 구조적 폭력의 민낯과 본질의 모습을 하고 있다. 

 

채식을 선택한 영혜는 육식주의인 회식 문화에서 몰이해의 대상이 되고 없는 사람 취급되며, 브래지어를 착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배척과 혐오의 대상이 된다. 또한 영혜의 가정은 가부장적이며, 아버지는 영혜를 비롯한 가족에게 지속적으로 폭력을 행사해왔다. 영혜의 동생 영호는 아버지의 폭력을 그대로 답습해 타인에게 행사하고, 언니는 아버지의 비위를 맞추며 외면하고 묵인했다. 영혜는 계속 폭행을 당했다. 월남전에 참전해 “베트콩 여럿을 죽인” 것을 자랑으로 떠벌리는 아버지, 아버지의 폭력을 묵인하고 감당하고 폭행당했던 가족들은 모두 폭력의 굴레에 있다.

 

누군가가 누군가를 때리고, 위협하고 죽이거나 지배해서 자신의 안위를 지키고 생존을 보장받는 이러한 약육강식의 구조는 '동물적'이다. 현실 세계 속 직접적 폭력 뿐만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구조적 폭력은 모두 영혜의 꿈 속에서 그 원형으로 등장한다. 내가 누군가를 잡아먹고, 죽이고, 또 나는 누군가에게 죽임을 당하는. 그러나 내가 가해자였는지 피해자였는지, 누구를 죽였는지 영혜는 알 수 없다. 영혜는 자신이 누군가를 해칠까 봐 잠에 들지 못한다. 영혜는 자신이 어떤 가해자이며 가해자가 될 수 있음을, 육식의 세계에서 완전히 분리될 수 없음을, 또 피해자임을 꿈을 통해 익숙한 세계의 민낯을 깨닫는다. 

 

이와 반대로 영혜의 남편 ‘나’ 역시 영혜와 비슷한 꿈을 꾸지만 그는 꿈 속에서 누군가의 피해자로 등장하지 않고 가해자로 등장할 뿐이다. 그는 자신이 어떠한 폭력을 행사하는지 인지하지 못하며 자신이 어떠한 세계에 있는지조차 알지 못한다. 그는 사회적으로 기득권의 위치에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장인 어른이 영혜에게 고기를 먹이려 드는 장면을 보며 부성애를 떠올리고 가슴이 뭉클해지는 것을 느낀다. 그에게는 장인 어른이 영혜에게 억지로 고기를 먹이는 폭력적 행위보다, 영혜의 자살시도가 더 잔인하고 이해할 수 없게 다가온다. 영혜의 가족들도 유사한 태도를 보인다. 영혜의 아버지가 영혜의 뺨을 때린 것 역시 충격이지만, 영혜가 자살시도 한 것을 더 심각하게 받아들인다.

 

 

 

해결책으로서의 식물-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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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 베르니니, <아폴론과 다프네(1625)>)

  

두 작품 속 멍과 극단적 채식은 다른 인물들에게는 병, 혹은 병의 증상처럼 보인다. 그러나 주인공들에게 그것은 병이 아니라 어떤 치유의 과정 혹은 새로운 가능성의 탐구, 자유, 해결책으로 가는 길 등으로 등장한다.  

 

「내 여자의 열매」 속 주인공은 도시 문명에 대한 거부감보다 자유를 향한 욕망이 변화의 원인으로 보인다. 아내는 외로움을 견딜 수 없어 사람이 많은 유흥가나 번화가에 일부러 자취방을 마련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주인공은 어디에 정착하고 싶지 않지만, 자신이 떠나면 혼자인 남편을 떠나지 않고 정착하기로 한다. 주인공은 남편의 곁, 아파트를 떠날 수가 없다. 그래서 나무가 된다. 주인공은 더 이상 외롭지 않다. 자연과의 연결이 있기 때문이다. 그는 모든 것들의 움직임을 느끼고, 자연의 일부가 되어 햇볕이 드는 쪽으로 몸이 자연히 움직인다. 인간의 몸을 탈출해 그는 식물이 되고 죽어서 열매를 남긴다. 

 

「채식주의자」 속 영혜는 『채식주의자』 말미에서 나무가 되려고 한다. 영혜의 나무-되기 시도는 그를 둘러싼 약육강식, 살기 위해 무언가를 죽이고 잡아먹어야하는 세계와 반대에 놓여있다. 무언가를 해치고, 잡아먹는 행위에는 살고자 하는 욕망이 있다. 살고자 하는 욕망에는 무언가에 잡아먹히는 것, 죽음, 즉 끝에 대한 두려움이 있다. 나무가 되는 것은 무언가를 죽이고 잡아먹는 연쇄적인 구조에서 벗어나있다. 물과 햇빛만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또한 한 장소에 붙박인 나무는 직접적인 살해의 위협, 생존 경쟁과 투쟁에서 멀리 떨어져있다. 영혜가 생존 경쟁 구도에서 벗어나고자 선택한 채식, 더 나아가 나무가 되고자 하는 것은 이러한 폭력의 구조에서 탈출할 수 있는 해결책처럼 등장한다. 그러나 영혜는 완전히 나무가 되지 못한다. 그는 작품 후반으로 갈수록 음식을 거부한다. 완전히 나무가 되지 못하지만 영혜는 병적으로 계속 음식을 거부해 소화기관이 퇴화하고 기아상태의 몸이 된다. 몸은 완전히 나무가 되지는 못할지언정 육식을 비롯한 소화를 할 수 없게 변한다. 마치 나무처럼 변하는 것이다. 영혜의 몸은 그렇게 아무것도 해칠 수 없게 되고, 무언가를 해쳐서 자신의 생존을 이어가야하는 생존경쟁과 폭력의 세계에서 탈출하게 된다.


 

 

식물로의 변신



인간의 신체를 변형시키거나 탈출하고, 아예 인간의 동물적 관성을 이어가지 못하게 자신의 신체를 망가트리는 행위는 상당히 병적이고 ‘비정상적’이다. 이러한 ‘비정상적’ 행위를 통해 오히려 그들이 변화하기 이전의 안주하고 있던 세상, 우리는 사회의 ‘정상성’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된다. 도대체 왜 이들은 이렇게까지 신체를 탈출하고자 하는가에 의문이 생기기 때문이다. 우리 신체는 무엇이며 무엇에 물들어있는지, 변형하기 전의 상태에 대해 다시 골몰할 수 있게 된다. 인간의 신체를 변형시켜서 어떠한 우리 사회의 굴레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것은 우리 신체가 이미 완전히 구조적 폭력을 비롯한 굴레나 관습에 완전히 물들어 떨어질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할지도 모른다. 

 

여성과 식물 혹은 자연은 자연과 여성의 ‘생산성’이라는 공통점을 갖고 있어 문학 속 그 이미지가 쉽게 연결되는 편이다. 두 소설은 여성의 식물-되기를 다루고 있지만, 여성의 ‘생산성’에 집중하고 있지 않다는 지점이 인상깊다.「내 여자의 열매」 속 아내가 뱉어낸 열매들은 아내가 낳은 아이를 의미하는 것보다는 잠재성을 가진 어떤 또 다른 시작점처럼 보인다. 이들은 오히려 한 자리에 붙박인 식물-되기를 통해 탈출과 자유를 꾀한다. 물리적인 부분에서 이것은 수동적이거나 자유의 이미지와는 반대에 놓인 것 같으나 누군가가 누군가를 해하는 폭력으로 굴러가는 사회의 생존경쟁에서 탈출할 수 있는 해결책이다.

 

 

[박하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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