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세계 바깥, 비극 - 출입국사무소의 오이디푸스 [공연]

글 입력 2024.04.26 14: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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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들은 언질을 주며 탄원자를 받아들인 만큼

나를 구해주시고 끝까지 지켜주시오. 그대들은

보기 흉한 얼굴을 보고 나를 멸시하지 마시오.

나는 신성하고, 경건하고, 이곳 시민들에게 복을

가져다주는 자로 왔기 때문이오.

그동안에는 결코 내게 나쁜 사람들이 되지 마시오.

 

-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 中

 

 

연극 <출입국사무소의 오이디푸스>의 말미에서, 배우들은 조명을 등진 채 그림자들이 우뚝 선 듯 어스레한 실루엣의 형태로, 관객석의 코앞에 어깨를 나란히 하고 한 줄로 늘어선다. 그리고 소포클레스의 고전 비극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에 나오는 구절을 번갈아 읊는다. “내게 나쁜 사람들이 되지 마시오,” 기원전 401년 그리스 언덕에 울려 퍼졌을 직언이 2024년 혜화의 어느 소극장을 채울 때, 세계의 역사가 울퉁불퉁하게 구겨져 무대 위에 올라온다.

 

본디 비극이 매끈한 역사의 우화 형태를 띤다고 개념화돼 온 것을 생각하면 이 불연속적이고 지엽적인 파편들로 기워진, 중심 서사가 부재한 연극은 비극을 관통하는 정신의 반영을 깨부수는 작업이다. ‘-의 오이디푸스’라는 말의 조합을 그대로 따와서 지은 제목이나, 현대의 배경에서 진행되는 장면 사이로 거듭 불쑥 끼어들어 평행의 세계를 지시하는 듯한 고대 비극의 조각난 장면은 이 작품이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의 언어를 비추고 있음을 직설적으로 보여준다. 그러나 그 언어들의 조합으로 발설되는 문장은 신성한 콜로노스와 출입국사무소의 대비만큼이나 원형의 비극과는 동떨어져 있다.

 

연극은 “월계수와 올리브나무와 포도덩굴이 우거지고, 그 안에서 깃털 많은 꾀꼬리들이 고운 목소리로 노래하”는 콜로노스에 도착한 오이디푸스와 안티고네가 대화하는 비극의 시작 부분을 여섯 배우들이 나누어 읊으며 시작된다. 몸을 뉠 자리를 찾아 헤매던 두 이방인은 이 낯설고 신성한 도시에 받아들여지고 싶어 한다.

 

이윽고 동일한 배우들은 출입국사무소의 배경으로 옮겨져, 엄장함을 걷은 세속의 말씨로 연기하기 시작한다. 고대인이 따뜻한 채도의 부드러운 조명 아래 극적인 삼각의 구도로 제시된 것과 달리 현대인은 쨍하게 머리 위에서 떨어지는 시린 백색 조명 아래 무대의 격자무늬에 따라 점점이 흩어져 있다. ‘미등록’이라는 단어를 십수의 언어로 반복해 말하며 이들은 스스로를 정의한다.

 

undocumented, belgesiz, 未登录者, indocumentado,бездокументований, ไม่มีเอกสาร, undokumentiert, χωρίς έγγραφα, non-inscrit - 대다수 관객이 읽을 수 없기에 무의미한 문자들이 무대 위 작은 스크린 위에 둥둥 떠다닌다. 또 이들은 H-2나 E-9 등이 아닌 무려 F-2라든지의 원대한 꿈을 꾸는 사람이 우습고 재밌다는 듯 잡담을 나누기도 한다. 각각 방문취업/비전문취업/거주의 체류 자격을 나타내는 비자 코드인데, 이는 극 중에서 설명되지 않기 때문에 관객에게는 아리송한 암호처럼 느껴진다.

 

 

명암.jpg

 

 

콜로노스에 입성한 고대인과 출입국사무소를 전전하는 현대인의 상황은 평행하지만, 묘사되는 무게는 두 상황을 스펙트럼의 양극에 가져다 놓는다. 두 눈이 멀고 걸인이 되어 헤맬지언정 오이디푸스는 높은 의지의 현현이며, ‘고결하나’ 추락한 영웅이다. 핀라이트가 그를 쫓아 거리를 함께 헤매고, 또 다른 고귀한 인간 테세우스는 결국엔 숭고하게 추앙되는 그의 마지막 숨을 똑똑히 지켜본다. 반면 출입국사무소의 인물들은 마땅히 기입할 자리가 없는 현대의 유령 기표 같은 존재들이다. 하마르티아(hamartia, 비극적 결함)를 논하기에 이들의 존재는 너무나 범상하다. 비극 철학의 일반적인 논리대로라면 이들은 심지어 관객 일반보다도 가벼운 무게의 존재들일지도 모른다.

 

따라서 이들 각각의 인물을 중심에 둔 조밀한 서사는 준비되지 않는다. 관객들은 인과 없이 성기게 연결된 미등록 외국인들이 서로를 그저 스쳐 가는 어지러운 극의 흐름 속에서 덩달아 설 자리를 잃고 헤매게 된다. 이렇게 표류하는 기표의 외연을 거쳐서야 출입국사무소는 세계의 바깥이라는 함의를 마침내 드러낸다.

 

우리가 내세워 온 이성, 과학, 정의, 인도주의적 가치 등이 통용되지 않는 곳이 바로 발밑에 버젓이 존재한다는 것은 근대 이후 세계의 역린이다. 조금 더 연극의 소재에 걸맞게 이야기하자면, 우리는 인권이 반인권보다 이롭다는 것을 순환적 논리에 빠지지 않고 증명하는 것에 성공한 적 없다. 천부인권은 연약한 발명품이다. 인간이 인간이라는 이유로 가지는 최소한의 권리는 이를 보호할 의무가 주권 국가에 위탁되는 국제 질서에서 당신의 인간됨을 증명하라는 불가능한 요구를 수반한다. 우리는 증명하지 않고도 인간이거나, 미등록된 유령일 수밖에 없다. 증명은 정당한 발언권이 있고서야 가능하고, 발언권은 동등한 주체에게만 주어진다.

 

따라서 출입국사무소는 유령의 수용소, 세계의 내부에 산재하는 세계의 바깥이다. “네? 저는 안티고네가 아닌데요?”라고 말하는 난민이 되지 못한 딸은 난민이 되지 못한 아버지의 목을 조른다. 아버지를 연기하는 배우는 없다. 병상 앞에 신발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을 뿐이다. ‘부은 발’만 이승에 붙어있는 유령은 죽고서야 겨우 애도할 인간으로 화한다(Oedipus가 ‘부은 발’을 뜻한다). 오이디푸스의 지팡이가 되어 신성한 콜로노스로 그를 이끌어 줄, 고고한 가치의 화신 안티고네는 가치가 구멍 난 곳과 같은 이곳엔 존재할 수 없다. 안티고네가 있을 수 없어서 ‘오이디푸스를 안아주는 오이디푸스’가 된 자는 신에게 비웃음을 날린다.

 

그렇게 <출입국사무소의 오이디푸스>는 세계 바깥에서 일어나는, 범상한, 비극이 될 수 없는 비극에 대한 증언을 무대에 올림으로써 비극의 역, 비극의 부정을 수행하고 있다.

 

 

포스터_출입국사무소의 오이디푸스.jpg

 

 

[이명화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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