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전혀 원치 않았던 여정 [영화]

아직 엄마가 될 준비가 안 돼서요
글 입력 2024.02.02 1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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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6월, 미 연방대법원이 로 대 웨이드 판결을 폐기한 지 일 년 반 정도가 지났다. 최소 14개 주에서 임신 중지가 제한되거나 전면 금지되어 다시 불법이 되었고, 지난해 12월에는 먹는 임신 중지약 ‘미페프리스톤’의 가용 범위 또한 검토 대상이 되었다. 올해 11월에 있을 미국 대선의 캠페인이 시작된 현재, 현 대통령 바이든 쪽은 임신 중지권 보장을 강조하고 있고, 로 대 웨이드 판결이 폐기된 상태인 만큼 다시 임신 중지권이 각 정당의 주요 의제 중 하나가 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2019년 4월 헌법재판소가 형법상 ‘낙태죄’ 조항을 헌법불합치라고 결정했다. 하지만 임신 중지로 처벌받지는 않아도, 아직 ‘모자보건법’으로 임신 중지에 관한 권리를 제한하고 있다. 더해서, 세계보건기구에서 필수 의약품으로 지정한 임신 중지약 또한 공식적으로 도입하지 않은 상태이다. 그러니까, 임신 중지 수술은 여전히 정책적인 뒷받침이 없는 상태이다.

국내의 여전히 모호한 상황과, 과거로 돌아간 상태인 기이한 현재 미국의 상황을 떠올리면 생각나는 영화가 몇 개 있다. 그중에서도, 영화 <전혀 아니다, 별로 아니다, 가끔 그렇다, 항상 그렇다> (Never Rarely Sometimes Always, 2020)는 주인공이 임신 중지 수술을 하기까지의 며칠을 차분하게 따라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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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펜실베이니아주에 사는 17살 ‘어텀’은 동네 여성 진료소에서 임신 사실을 확인한다. 이곳에서는 먼저 편의점에서 누구나 살 수 있는 자가 진단 테스트로 양성 여부를 확인하고, 다음 진료일에 초음파 검사를 한다. 의사는 어텀에게 ‘살면서 가장 경이로운 소리’라며 초음파 소리를 들려주지만, 어텀에게는 그저 불편하고 무거운 소리일 뿐이다. 의사는 임신 중지를 고려한다는 어텀에게 출산을 계속 권하고, 어텀은 결국 혼자 인터넷으로 임신 중지에 대해 검색해 볼 수밖에 없다. 그는 펜실베이니아의 임신 중단 관련 법규를 찾아보고는, 유산을 바라며 약 몇 알을 끊임없이 삼키고 자신의 배를 주먹으로 치며 위험한 방법을 시도하기도 한다. 결국 어텀은 임신 중지 수술이 가능한 뉴욕의 병원을 찾아가기로 한다. 그리고 친한 사촌 ‘스카일러’가 뉴욕행에 동행한다.

제대로 잘 곳도 없고 돈도 충분하지 않은 상태에서, 그들은 힘들게 뉴욕 브루클린의 병원에 도착한다. 하지만 동네 병원에서 10주 진단을 받은 것과는 달리 18주 진단을 받았기에 그날 수술도 받지 못하고, 심지어 다른 지역의 병원으로 가서 수술을 받아야 하는 상황이 된다. 예상치 못하게 여정이 길어지게 되고, 어텀과 스카일러는 꼬박 밤을 새우며 어쩔 수 없이 또 맨해튼으로 이동한다.

어텀이 임신 중지 수술을 받기까지의 과정은 너무나도 힘겹다. 그리고 영화는 이를 건조하고 차갑고 조용하게 담아낸다. 우리는 영화의 초반부터 어텀과 스카일러가 성희롱을 일삼는 점장이 있는 마트에서 일하는 것, 어텀이 임신 중지에 관한 정보를 제대로 얻을 수 없는 것까지 보면서 그가 쉽게 도움을 받을 수 없는 현실에 있음을 느끼게 된다. 또, 어텀을 계속 설득하며 출산을 권하고 정확한 주수를 진단하지도 못한 동네 진료소는 어텀이 사는 곳의 지자체는 그를 돕지 않을 것이며, 그렇게 임신 중지 수술에는 제대로 된 보건 의료서비스를 보장받지 못할 것이라는 현실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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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텀은 어쨌든 맨해튼 병원에서 수술을 잘 받는다. 비록 부모님이 모르게 하기 위해 건강 보험을 적용하지 않아 더 비싼 돈을 지불해야 했고, 10주가 아닌 18주 차이기 때문에 수술은 이틀을 걸쳐 진행해야 했지만, 그에게는 달리 방법이 없었다. 어떻게든 임신은 중단해야 하니까. 

수술 전 하는 상담에서 상담사는 수술에 관해 설명하고, 어텀의 결정을 다시 한번 확인한다. 그리고 기존 병력에 관한 질문부터, 성생활 상태 등에 관한 질문, 그리고 마지막으로 ‘관계(relationship)’ 관한 질문을 한다. “이것도 선생님의 건강에 미치는 요소니까요, 알고 계셨나요?”

전혀 아니다, 별로 아니다, 가끔 그렇다, 항상 그렇다 중에서 하나를 골라 대답하면 되고, 질문들은 이러하다 : 상대가 콘돔 착용을 거부한 적이 있다, 상대가 원치 않는 상황에서 피임을 방해하거나 임신을 유도한 적이 있다, 상대가 위협하거나 겁을 준 적이 있다, 상대가 치거나 때리거나 하는 물리적인 상해를 입혔다, 상대가 내가 원하지 않을 때 성관계를 강요했다.

마지막으로, 살면서 누가 내게 성적인 행위를 강제한 적이 있는지는 예, 아니오로 대답하기.

 

어텀은 질문을 들으며 점점 마음이 조여온다. 그는 처음에는 별로 아니다, 전혀 아니다 등의 대답을 하다가, 점점 대답을 하지 못할 만큼 눈물이 나온다. 그는 질문에 답을 하지 못하다, 마지막 질문에 가까스로 ‘예’라고 대답한다. 


“그 얘길 지금 하고 싶으세요? 괜찮아요. 오늘 하실 필요 없어요. 그 얘길 하고 싶으시면 언제든 연락 주세요. 아니면 도움이 필요하실 때라도요, 알겠죠?”

 

영화는 어텀이 어떻게, 누구와의 관계로 임신을 하게 되었는지에 관한 이야기는 하지 않는다. 우리는 그가 이 여정을 시작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가 원치 않는 임신을 하게 되었고, 임신 중지를 원한다는 걸 알 수 있다. 이 이야기에 필요한 건 그것뿐이다. 어텀이 임신 중지 수술을 한다는 사실은 그가 어떤 사람인지, 누구와 만나는지, 평소의 일상이 어떤지와는 상관이 없다. 그리고 이 설문 장면은 어텀이 건강하지 않은 관계를 경험했다는 것을 부가적으로 설명해 주며 이러한 부분이 여성의 건강과 직결됨을, 그리고 당연히 어텀의 현 상황과 임신 중지 결정에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그렇게 영화는 그저 오로지 처음부터 끝까지 이 원치 않았던, 힘들고 불안한 여정을 묵묵히 보여준다. 묵묵히 어텀과 함께 하는 스카일러처럼.

*

 

스카일러는 어텀을 옆에서 돕는 역할이지만 동시에 그 나이대의 여성이자, 망설임 없는 어텀의 친구로서 존재한다. 그의 표정은 어텀의 불안한 표정과 크게 다르지 않다. 둘이서 뉴욕에 가야 하고, 옆에서 어텀을 잘 도와줘야 한다는 생각에 그 역시 불안하고 마음이 무겁다.

 

스카일러는 예상보다 길어진 과정에 피곤한 상황에서, 어텀이 예상보다 큰 수술비를 쓰게 되어 잘 곳은커녕 버스비조차 없는 상황에 처했는데도 계속 그 누구에게도 도움을 청하지 않고 오히려 자신에게 짜증을 내는 어텀에게 마음이 상해 잠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피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는 어텀을 두고 떠나지는 않는다. 그저 계속 버스비를 구할 방법을 생각할 뿐이다.

 

맨 처음 어텀의 임신 사실을 알게 된 후에 파트타임으로 일하는 마트에서 서슴없이 돈을 훔쳐 어텀의 주머니에 넣어주었던 스카일러는, 집으로 돌아갈 버스비를 위해 자신을 이용한다. 뉴욕행 버스에서 자신에게 계속 관심을 보이던 또래 남자 ‘재스퍼’를 만나서 시간을 보내며 약간의 친근감을 쌓아, 적당한 시간이 되면 버스비를 빌릴 작정이었던 스카일러는 계획적으로 돈을 빌리는 것에 성공했지만, 그걸 위해 재스퍼가 자신에게 보인 관심과 본인을 이용할 수밖에 없다.

 

이렇게 스카일러는 영화에 어두운 현실감을 더해준다. 수술을 받는 어텀의 보호자로서 친구로서 든든하게 존재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같은 나이의 어린 여성으로서 함께 불안하게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똑같이 미성년자이고, 돈이 없고, 여성이라는 점은 그들이 서로에게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자신감을 주진 않아도, 어쩌면 이 불안한 여정에서 가장 중요한 연대감이라는 걸 준다. 어텀이 재스퍼와 결국 불편한 키스를 하는 스카일러를 발견하고 그의 뒤에 가만히 서서 손을 찾아 잡는, 그렇게 그들이 서로 새끼손가락을 건 채 서있는 장면은 그래서 더 아프다. 둘 다 기댈 곳이라곤 똑같이 위태로운 서로밖에 없는 현실이니.

 

어텀이 마침내 이틀에 걸친 수술을 받고 난 후에야 그들은, 뭔가를 먹으면서 다시 농담도 하고 웃을 수도 있는 상태가 된다. 어텀은 이 힘든 과정에서 스카일러에게 한 번도 아프다거나 힘들다는 이야기를 하지 않는데, 스카일러도 어텀에게 별다른 질문을 하지 않는다. 그저 수술이 끝나고 나서 기분이 어땠는지, 사람들은 잘해줬는지 물을 뿐이다. 그들은 이렇게 그저 처음부터 끝까지 묵묵히 함께하고, 마지막에 지친 표정으로 어두운 새벽에 버스에 올라 짐을 끌며 길을 걷고, 그렇게 집으로 돌아온다.


*


영화는 이 이야기를 그들이 탔던 어둡고 불안한 새벽 버스 안의 공기처럼 차갑고 조용히, 담담하게 담아낸다. 그렇게 그들의 경험이, 이 영화를 보고 있는 우리와 상관없는 이야기가 전혀 아님을 보여준다. 현실적이라서 무거운 이 영화에서 무엇보다도 소중하게 느껴지는 건, 그들이 같이 이 과정을 함께하고, 똑같이 불안한 그들이 서로의 눈을 바라보고 손가락을 걸고 처음부터 끝까지 연대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공포스럽게 느껴지는 건, 어텀과 스카일러가 이 여정에서 겪는 일들이 여전히 지금의 이야기라는 사실이다.

 

미국은 여성의 몸에 관한 권리와 직결되어 있는 임신 중지에 관한 권리를 외치던 사람들의 반대에 서서 여성의 몸에 대한 권리를 규제하려는 사람들이 임신 중지에 관한 법을 조금씩, 빠르게 더 제한적으로 바꾸고, 그러다 아예 그 권리를 빼앗던 과거, 로 대 웨이드 판결 이전으로 다시 돌아가 있다. 한국은 여전히 임신 중지가 정책적으로 소외되어, 여러 면에서 안전한 의료 시스템을 기대하기 어려운 상태이다.

 

어텀에게 ‘헤픈 년 (slut)!’이라는 단어를 내뱉는 남자부터 시작해서, 그 남자와 다를 바 없어 보이는 어텀의 아버지, 성희롱하는 마트 점장, 동네 병원, 임신 중지 수술을 하는 뉴욕의 병원 앞에서 시위하는 기독교 단체, 혹시 모르는 위험에 대비해 방문자의 가방을 검사해야 하는 병원, 돈이라는 권력을 스카일러에 이용하는 재스퍼. 영화의 이런 장면들 속에 놓인 어텀과 스카일러, 그리고 이와 비슷한 상황 속에 놓인 현실의 여성들은 여전히 보호받지 못한다. 그저 불안함과 두려움에 던져질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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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가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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