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실패하는 이해 속 거듭나는 우리 - 서울국제대안영상예술페스티벌

이해한다는 것에 대하여
글 입력 2023.08.20 14: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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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한 것들이 피어나고 난무하는 세상 속에서 나는 기쁨과 혼란 사이를 어지러이 돌아다닌다. 새로움이란 기존의 것을 흔드는 전복이자 다른 가능성으로의 확장이므로 해방적인 동시에 나를 구성해왔던 역사를 한순간에 낯설거나 가치 없는 감각으로 바꿀 수도 있는 위협적인 전환이기 때문이다.


다양성은 나의 안정을 내어놓고 불안정해지다가도 누군가가 자신의 안정을 내어놓음으로써 다시 안정을 되찾는 순환의 반복이라고 할 수 있다. 안정과 불안정, 보편과 낯섦의 정의가 끊임없이 교환되는 것. 그렇게 모두가 교환의 주체가 되는 것. 그렇게 서로가 섞이고 깊어지는 것. 그렇다면 다양성의 또 다른 이름은 공평함이다.


공평하다고 했지만 다양성의 순환이란 가만히 앉아 바란다고 이뤄지는 것은 아니다. 이것이 가능해지려면 ‘보편적인’ 것과 어긋나는 ‘낯선’ 것이 자기 모습을 드러내야만 하고, 그렇게 대안적인 상상력이 제공되어야만 한다. 이것은 때론 투쟁이라고 불릴 정도로 어려운 일이다. 기꺼이 안정을 포기하려는 인간은 많지 않고 그들은 대개 거대한 힘을 가졌기에 안정의 자리를 쉽게 내어놓지 않기 때문이다.


결국 다양성을 지향한다는 것은 일종의 설득이 된다. 안정과 불안정 사이를 오가는 불안한 운동이 어떻게 기어이 우리를 사랑과 우정 앞에 데려다 놓는지에 대한.


내가 어렴풋이 발견한 다양성의 가치는, 알지 못했던 형태의 사랑을 발견하게 한다는 것이다. 정확히는 사랑과 우정이 얼마나 다양한 경로에서 유래할 수 있는지를 깨닫게 되는 것이다. 어리석었던 순간, 이기심과 질투에 불타올랐던 순간, 무력했던 순간, 환희했던 순간, 절망했던 순간. 그저 어떤 순간.


단편의 순간에 불과했던 사건은 다양한 존재와 이야기를 접하고 나면 또 다른 이야기로 쓰일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단순했던 나의 지난 역사를 어지러이 재구성하다 보면 결국 그것들을 조금이라도 더 너그러운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됐다. 그래도 된다는 것을 다른 이야기로부터 배웠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내가 다양한 이야기, 이왕이면 주류에서 벗어난 ‘낯선’ 이야기에 끌리는 이유다. 그것은 물론 복잡하고 어렵고 아프기도 한 과정이지만 결국 나의 이상하고 낯선 면모를 조금은 애정 어리게 관조하도록 돕는다. 타인의 낯섦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그것은 대개 나와 너를 사랑으로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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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학습의 일종으로 서울국제대안영상페스티벌, 네마프에 다녀왔다. 그 이름부터 ‘대안영상’ 페스티벌이므로 내가 알 수 없는 이야기와 상상으로 가득할 것만 같은 공간이라고 생각해서다.


나는 ‘기억하는 우리’라는 주제로 엮인 6개의 영상을 관람했다. 영상은 각각 죽은 트랜스젠더 딸과 대립하는 이슬람 종교의 관습, 할아버지의 죽음과 세대 간 트라우마, 페루의 가장 오래된 항구 파이타, 장애와 플라밍고를 통한 신체의 확장, 영사기사였던 할아버지의 생애, 태국과 전쟁의 역사를 소재로 했다.


익숙하기도, 낯설기도 한 소재를 다룬 감독들의 방식은 말 그대로 다양했다. 흔히 볼 수 있는 매끄러운 영상미와 흐름의 이야기부터 빛의 노출을 조절하며 만들어낸 특이한 색감, 애니메이션, 낯선 카메라 무빙까지. 지금의 나로서는 ‘낯설다’, ‘특이하다’, ‘새롭다’라고 밖에 표현하지 못하는 영상들이 이어졌다.


직관적이기도, 아리송하기도 한 화면 앞에 머리를 싸매는 경우가 많았다. 그럴 때마다 앞선 모호함을 이해시켜줄 결정적인 포인트가 나오길 바랐지만 끝내 기대를 저버린 영상도 있었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던 영상 앞에선 모종의 긴장을 느끼기도 했다. 결국 이해하지 못했다는 패배감과 무능함 따위가 올라온 것이다.


지속되는 긴장을 느끼다 문득 생각한다. 대체 내가 이해하는 게 어떤 쓸모와 의미가 있을까. 이해한다는 것은 단순히 나의 박식함과 포용력을 입증하기 위함인가. 아니면 보다 ‘이타적인’ 차원에서 나의 이해는 곧 저 영상에 얽힌 존재에 대한 허락과 인정인가. 둘 중 마음에 드는 선택지는 없다. 나는 어떤 욕심과 걱정으로 이해하지 못함에 불안을 느낀 것일까. 


알 수 없는 불안의 출처 속에서, 이해하겠다는 마음이 연결의 동기가 되면서도 때론 단절의 이유가 되기도 한다는 것을 떠올린다. 이해했다는 감각은 앞으로 어떤 상상과 이야기도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는 포화의 상태, 자만심의 상태일지도 모른다. 이해했으니 더 이상 알아갈 것이 없고, 다른 것들로 시선을 돌리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과연 이해인지 나는 확신할 수 없다.


차라리 이해와 비非이해의 사이에서 갈팡질팡 위치를 찾는 것이 우리 인식의 한계가 되길 바라는 욕심이 생긴다. 모든 것을 알지 못함을 인정하는 것이 더 어렵고도 용기 있는 능력이라고 생각해본다. 그러니까 이해를 필요로 하는 공백과 여지를 계속해서 남기는 것이 어쩌면 더 나은 이해의 방식 같다. 완전히 이해된 것과 완전히 낯선 것 모두 쉽게 상상의 대상에서 박탈되기 마련이므로. 


실패를 통해 발견한 이 인식이 더없이 소중하다. 더 편안하게 낯선 것을 접할 수 있음은 꽤나 귀한 능력이기 때문이다. 이 페스티벌에 참가한 동기는 이해가 아니라 인식이었다. 내가 사는 세상에 이런 존재도 있다는 것을 깨닫고자 하는 것. 거기서 다시 나와 너의 이야기의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해 보는 것. 그렇다면 내 목표는 이미 이뤄진 셈이다. 나는 그저 조금의 호기심과 이해를 남겨놓은 채 그들의 또 다른 이야기를 궁금해할 수 있게 됐다. 어쩌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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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영 후엔 할아버지의 죽음과 세대 간 트라우마를 소재로 한 <제사>의 감독 조나단 승준 리가 관객과의 대화 시간을 가졌다. 영상 너머 생생한 얼굴과 소리를 목격할 수 있는 반가운 시간이었다.

 

그의 영상에서 오래 기억에 남은 것은 남은 가족들이 멋쩍게 포옹하는 장면이다. 평상시에는 시도할 생각조차 하지 않아 보였던, 그래서 그토록 서툴렀던 쭈뼛쭈뼛한 포옹의 울림이 잔잔히 다가왔다. 페스티벌 당시에는 쑥스러움에 감독에게 던지지 못한 질문을 모두에게 돌리며 글을 마친다.


 

포옹은 소리 없이도 직관적이고 직접적으로 많은 것을 나눌 수 있는 아름다운 제스쳐라고 느꼈습니다. 혹시 포옹 외에도 본인이 생각하기에  서로가 교감하고 교류할 수 있는 좋은 제스쳐 혹은 방법들엔 어떤 것이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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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해영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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