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위선과 권태

글 입력 2022.12.14 17: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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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위선



모든 게 다 위선이다.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어.’

‘하고 싶은 것을 하고 살 수만 있다면, 없이 살아도 상관없어.’


순 다 거짓말이다. 제대로 해본 것이 없으니 죽어도 아쉬울 건 없지. 딱 그뿐. 본전이라도 건지자는 온정주의적 마인드. 최소한의 생활은 해야 하니까 내키지 않아도 한다. 연출부 막내. 제작부 막내, 미술부 막내. 현장에서 막내라고 호명되는 일들은 다 한다. 궂은일 아니냐고?


잃을 게 없어 편하다. 잘 보일 사람이 너무 많아서, 잘 보이지 않아도 되는. 이런 위치에서는 책임지지 않아도 되니까, 일만 잘하면 된다. 어차피 말이 되는 일은 없다. 그냥 받아들일 뿐, 적당히 귀를 막으면 된다.


오늘은 제작부의 막내로 현장에 왔다. ‘제작부’의 일은 촬영 전까지의 일을 도맡아서 하는, 즉 장소를 섭외하고 스케줄 잡고 스태프들 식사 등을 미리 생각하는 일들이라 촬영 당일날에는 잠시 뒤에 빠져 있어도 된다. 리허설을 몇 번 했는데도, 감독님 마음에 안 드는지 계속해서 씨름을 하는 듯한 촬영 현장. 촬영이 길어질수록 배우들의 표정이 초조하다.


연기? 무엇이 저렇게 절실할까? 신인 배우는 항상 저자세이다. 간혹가다 빽을 등에 업고 객기를 부리는 양반도 있지만 사람들은 다 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마음속에만 담아둔다. 도화선에 불이 붙기 시작하면 그때서야 다들 라이터 하나씩 댄다. ‘아니 땐 굴뚝에 연기날까'라는 무적의 격언을 방패 삼아.


체화. 몸에 배어서 자기 것이 된다. 가끔 어떤 배우를 보면 그가 인물을 연기하는 건지, 이야기 속 인물이 배우인 건지 넋을 놓고 볼 때가 있다. 그런 배우는 작품 간의 텀이 꽤 길다. 공백 기간에는 무엇을 하는지, 어떤 배우는 재야에 묻혀 사는 도인이라 함께 작품을 하려면 거취를 수소문해야 한다고 한다. 체화. 꽤 감정적인 단어이다. 무엇이든 알고리즘으로 처리하는 나와는 거리가 멀다.


그때, “수진씨!” 라는 외침에 반자동적으로 몸부터 나간다. ‘그거 어디 있어요…?’ 라는 자동 완성형 질문이 뒤따라 들린다. 체화. 나와 과연 거리가 먼 단어이다.


욕하면서 현장을 뛰어다니다가도 밤늦게 모텔 침대 위에 온몸이 저릿한 채로 뻗으면 기분이 이상하다. 온 기운이 우주로 뻗치면서 불나방처럼 타서 없어진다. 후루룩. 중독이다. 빡셈에 몸을 맡긴 자들은 이런 경험을 해버릇 하면, 절대 돌아갈 수 없다. ‘버릇’은 버리기가 쉽지 않다. 좋고 편한 것에 물들기 쉬운 만큼, 절박함을 놓치 못하는 것 또한 습관이다.


내가 좋아한다고 해서, 남들도 좋아했으면 하는 마음. 본능이지만 오만이고 자만이다. 내가 좋았던 만큼 당신도 좋아했으면 좋겠어. 인간의 이기적인 속성을 일찌감치 인정했으면 이 지경까지는 안 왔을 것이다. 영화는 왜 시작해서 현장에 몸을 맡기고 보이는 것만 좇게 되었을까. 현장 사진, 현장 이야기. 당장 보이는 것들에 취해서 더 나아가지 못한다는 생각을 한 지는 꽤 되었다. SNS에 글을 올릴때마다 ‘너 대단하다’라는 말을 자위 삼아 외면하고 있는 나 자신을 지워버린다.


감정 없이 의무만 남은 관계. ‘나처럼 하는 인간도 드물어’라며 끊임없이 합리화하고, 남을 헐뜯는 제스처, ‘할 때까지는 해보겠어’라며 언제 터질지 모르는 대박을 향하여 끊임없이 채찍질하는 의무만 남은 관계.


며칠간 외박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왔다.


새벽의 기운이 끝나가고 여명이 틀 무렵. 눈을 감고 부유하는 이미지를 쓸어본다. 이미지에 속지 말자. 철저히 눈꺼풀 안의 눈동자로 정면을 응시한다. 뭐가 보이는가. 창밖에서 뚫고 들어오는 도심 속 불빛이 눈꺼풀 안으로 흩어진다. 칠흑 같은 어둠이 아니다. 너무나 밝다.


망상에 젖어 들고, 잠에 젖어 든다.




2. 권태



새벽같이 눈을 떴다. 방 밖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이전까지 매일 새벽에 일어나야 해서 자연스럽게 눈이 떠졌지만⋯. 집에 돌아와 있음을 깨닫고 이내 다시 잠을 청한다.


늦은 점심. 약을 먹기 위해 대충 구운 토스트를 입에 구겨 넣는다. 옆방 사는 선아가 남자친구와의 불만을 탁자 위에 늘어놓는다. 입 안으로는 토스트 조각을 질겅거리며, 손가락으로는 펜을 돌리며 스도쿠를 푼다. 옆방 커플은 7년째 연인 사이다.


닿지도 않은 말들을 조잘조잘 들리지도 않는 벽을 향해 내뱉는 선아. ‘우리만큼 오래 만나는 사람도 없어’라고 되뇌며 감정도 없이 의무만 남은 관계. 결과만 좋으면 아무래도 상관없는 건가? 사회적 상황이니, 솔직한 말은 잠시 접어두자.


‘아⋯ 이거만 채워 넣으면 되는데’


스도쿠의 채워지지 못한 빈칸을 바라보며 적당히 귀를 막는다.


모처럼 만의 휴식. 취하거나 피곤하면 정신이 없다. 반대일 수도 있겠다. 오히려 정신이 과도하게 각성되면 본능이 튀어나온다. 가면이라고 씌워진 것들이 ‘나 가짜요’ 이실직고하고, 내 안의 솔직함이 방언처럼 튀어나오기 시작한다. 어제의 내가 그랬던 것 같은데⋯. 블랙 아웃된 것처럼 불투명해진 기억. 쌓인 단톡방을 일부러 외면한다.


선아가 뒤늦게 집을 나가고. 매일 반복되는 일상에 '권태'란 것이 찾아왔다.


해야 할 일을 끊임없이 미루면서도, 열심히 일했다 잠시의 여유를 기꺼이 즐기는 당연한 상황이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나의 눈동자는 어느새 스도쿠에서 노트북 화면으로, 그리고 핸드폰으로 옮겨간다.


봐야지 봐야지했던 영화, 드라마들. 하지만 직업상 마음 편히 즐기지 못한다. 따지고 분석하고 뒷 이야기를 검색해보느라 피곤해지기만 한다. 그 다음으로 염탐하는 남의 이야기, 사생활. 그러나 가짜, 가짜의 이야기에 범벅된 SNS 피드에서도 결국 눈을 뗀다.


이윽고 평온해진 뇌. 모든 것을 내려놓는다. 아날로그만 작동하는 방 안, 어젯밤 모텔 침대에서와는 다른 차분히 가라앉은 감정선. 무엇 하나 끝내지 못하는 상황이 권태일까. 너무나 많은 시작들에, 또 의무들에, 상황에 의해 어쩔 수 없이 나아가는 것들이 계속될 때.


노년의 끝에 다다를 때. 꼬박꼬박 약을 챙겨먹고, 더이상 이룰 것이 남아있지 아니할 때 권태란 것이 찾아오는 걸까.


아픈 할머니가 떠올랐다. 할아버지도 떠나고, 뒤늦게 막내딸도 시집가버린 빈집에 혼자 남겨진 그녀. 적막과 권태로 뒤덮인 그녀의 집이 떠올랐다. 보일러값이 아까워 냉랭해진 대리석 바닥에 오래된 김치냉장고 기계음 소리만 윙윙대는⋯. 그러나 캄캄한 집 안에 우두커니 앉은, 보청기를 낀 할머니의 귀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다.


신문 보기를 좋아하던 그녀, TV도 끄고 신문 구독도 다 끊고 모든 것을 내려놓는다. 수많은 사회면, 문화면의 이야기들이 그녀와는 꽤 상관없는 일이라 느껴졌기에. 사회적인 역할을 잃어버린 할머니의 마음의 길도 잃어버렸다.


권태.


'공허'라는 단어에 비해서는 꽤 긍정적인 단어같다. 이 권태로움만 이겨내면, 다음이 있을 것 같으니까. 권태로움을 허공에 뿌려본다. 옹알이를 하는 것 마냥, 입 밖으로 단어를 뽑아내 본다. 말이란, 바람에 지워지는 것이라 기록의 가치가 있을진 모르겠지만 핸드폰 녹음 버튼을 눌러 기록을 시작한다. 내가 유일하게 힘들이지 않고도 사용할 수 있는 도구 말, 말, 말⋯.


말로써 권태로움을 정의해본다.


“모든 일에 싫증이 나거나 피로해 게을러짐, 을 일컫는다 한다.


그러나 무엇에 싫증이 났단 말인가.


싫증이 날 만큼 무얼 하기는 했단 말인가.


남들에게 잘 보이고 싶은 욕구도 이제 피로하다. 그렇다면 나에게 남은 건, 나 스스로

잘보이고 싶은 욕망.


나에게 잘 보이고 싶은 욕망을 인정하면 끝나는 문제일까? 무엇이 문제인가.”


생각의 꼬리가 꼬리를 물었을 때쯤 옹알이를 그만둔다. 말은 배설에 지나지 않는다. 말로 먹고사는 사람들이 신기할 따름이다. 녹음 버튼을 중지하려 하는데 핸드폰 화면에서 선아 남자친구 이름이 뜬다. 이번엔 저녁의 테이블에서, 데칼코마니같은 넋두리를 들어야 하나 피곤해지려는 찰나, 카톡이 하나 뜬다. 오래된 친구의 안부이다.

 

'만날 때 된 것 같다. 얼굴 한번 보자'


나의 입가에 미소가 지어진다. 그리고 실수로 녹음한 권태로움을 지워버린다.



-끝-

 

 


컬쳐리스트 명함.jpg

 

 

[민지연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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