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아무도 남지 않았다고 생각한 곳에 ‘내가 남았다’ – 영화 ‘내가 죽던 날’ [영화]

‘죽음’을 경유하여 ‘삶’을 그리는 매력적인 여성 서사
글 입력 2022.09.13 1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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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영화 <내가 죽던 날>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태풍과 함께 거센 비가 이어지는 날들 이후에 맞이한 맑은 하늘이, 놀랍기도 감사하게도 느껴지는 요즘이다. 태풍은 하루에도 안도와 탄식이 여러 번 교차되는 나날들을 데려왔고, 여러 사람들에게 소중한 많은 것들을 휩쓸어 가고 망가뜨리며, 우리가 서 있는 다양한 위치와 현실을 절실하게 마주하도록 했다.

 

그러나 이러한 현실 속에서도 다시 우리 앞을 비추는 야속할 정도로 반짝이는 햇살과 허무할 정도로 맑은 하늘을 보면, 그럼에도 태풍이 지나간 자리에 남은 것은 무엇인지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생각 끝에 결국 우리의 삶도 다시 돌아보게 된다.

 

‘태풍’으로 은유되는 수많은 형태의 고통과 시련이 다양한 위치에 있는 우리의 삶을 흔들 때, 심지어 모든 것을 휩쓸어간 것 같을 때, 여전히 이어지는 우리의 삶 속에 그럼에도 남은 것은 무엇일까? 이유도 찾을 수 없이 갑작스럽게 덮쳐온 태풍에 무력한 몸으로 벼랑 끝까지 밀려났을 때, 그럼에도 우리를 붙잡는 것은 무엇일까?

 

박지완 감독의 영화 <내가 죽던 날>은 아무 것도 남은 것이 없다고 느껴지는 그 때, 그럼에도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내가 남았다’는 사실임을, 담담하지만 섬세한 연출과 이야기로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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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남지 않았다고 생각한 곳에 ‘내가 남았다’


 

영화 <내가 죽던 날>은 태풍이 작은 섬마을에까지 거센 비바람을 데려온 어느 날, 거친 파도 속으로 사라진 소녀 ‘세진’에 얽힌 사건을 풀어가는 경찰 ‘현수’의 이야기를 담았다. 현수는 일련의 사건으로 몸과 마음 모두를 다치고 휴직한 이후, 복직 전에 세진의 사건 보고서를 마무리하는 일을 맡았다.

 

세진은 아버지가 규모 있는 밀수 사건에 휘말린 이후, 사건의 중요한 증인으로 ‘보호’와 ‘감시’를 받으며 작은 섬마을에 기약 없이 머물게 된다. 세진의 아버지는 사건이 일어난 지 얼마 안되어 세진의 곁을 떠나게 되고, 마약범으로 수감생활을 하던 세진의 오빠는 세진의 안위보다는 세진이 관리하던 아버지의 재산에만 관심을 가진다. 그나마 세진과 사이 좋게 지냈던 새어머니 ‘정미’도 세진과 법적인 가족이 아니라는 이유로 세진과 함께 할 수 없게 되고, 혼자 섬에 보내진 세진은 섬 생활 중 의지했던 형사 ‘형준’과도 만나지 못하게 되면서 더욱 고립된다.

 

사건을 마무리 하기 위해 세진의 흔적을 되짚어 가던 현수는, 이렇게 의심과 감시를 받으며 마음대로 섬 밖으로 나가지도 못하고 외롭게 생활했던 세진의 모습에서 자신과 닮은 모습들을 점점 발견하게 된다. 세진과 현수 모두 자신의 잘못이 아닌 일에 얽혀 너무 큰 고통과 상처를 홀로 견뎌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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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여기서 이 아이가 어떻게 지내는지,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더 이상 아무도 묻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 아이의 표정을 안다.
지난 1년동안 내가 거울 속에서 봤던 표정이다.

자신의 잘못도 아닌 일로 홀로 남겨졌던 아이는

파도 사이로 사라져 모두에게 잊혀질 것이다.”

 


영화 중반부까지 세진에게 있어 모두에게 잊혀지고 혼자가 되는 것은 ‘죽음’에 가까워지는 일처럼 보인다. 영화 안에서 가족으로서도 증인으로서도 세진을 제대로 존중하거나 보호하지 않은 사람들을 현수가 하나 둘 마주할 때마다, 세진이 느꼈을 무력함과 외로움이 더 크게 와 닿았다. 하지만 ‘아무도 안 남았다’고 절망하는 세진에게 ‘니가 남았다’라는 말을 해준 ‘순천댁’의 존재로 세진의 상황은 뒤바뀐다.

 

세진은 그런 ‘순천댁’을 통해 아무도 남지 않았다고 생각한 곳에 ‘나’라는 스스로의 존재가 남아 있음을, 그 존재를 구할 사람은 결국 자신임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자신을 포기하지 않기 위해 모두에게 잊혀지고 혼자가 되는 것을 ‘선택’함으로써, 즉 ‘죽음’에 스스로 다가감으로써 오히려 삶을 이어갈 수 있게 된다. 현수 역시 믿고 의지했던 사람에게 배신당하고, 악의적인 소문과 사고로 소속감을 느끼던 조직 안에서 발 붙일 곳을 잃으면서 ‘죽음’의 문턱 앞에 몰렸지만, 자신과 닮아있는 세진을 통해 자신을 돌아보며 자신도, 세진도, 순천댁도 지키는 선택을 한다.

 

이렇게 영화 <내가 죽던 날>은 ‘죽음’을 경유하여 오히려 삶의 조건을 이야기한다. 결국 지켜야 할 스스로를 인지하고 그 스스로를 구하기로 결심했을 때, 자신에게 손 내미는 사람을 발견할 수도 자신과 비슷한 상황의 누군가에게 손을 내밀 수도 있게 된다. 이렇게 이루어진 연대로 우리는 스스로를, 또 서로를 구한다.

 

 

[꾸미기]스틸컷_세진_순천댁.jpg

 

 

“아무도 안 구해줘. 니가 너를 구해야지. 인생이 니 생각보다 훨씬 길어."

 


순천댁이 세진에게 전한 이 말에는 순천댁이 살아내야 했던 그동안의 삶과 그의 진심이 담겨 있었다. 그렇기에 세진에게도 우리에게도 이 말은 뻔하거나 매정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오히려 ‘죽음’의 문턱이라고 여겨지는 곳 앞에서도 스스로를 꼭 붙잡고 ‘삶’을 향해 나아갈 수 있는 내면의 힘과 연대의 가능성을 생각하게 한다.

 

이는 현실의 벽을 간과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현실 안에 단단히 발붙이고 서서 그럼에도 이어질 미래를 온 힘을 다해 제대로 마주하는 일이다. 결국 세진과 현수, 순천댁이 그랬듯 말이다. 그리고 영화 안에서 이들이 내민 손은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향해 있다. 이들처럼 우리도, 때로 무력하게 흔들리는 삶 속에서 스스로를 포기하지 않고 그럼에도 이어지는 미래를 그릴 수 있기를, 닮은 얼굴로 현재를 버텨내는 서로에게 손을 내밀 수 있기를 바라본다.

 

 

 

영화 <내가 죽던 날>에 담긴 ‘여성 서사’에 대한 고민


 

앞서 언급했듯, 영화가 담아내는 연대는 죽음 앞에 내몰린 영화 속 인물들에게도, 이를 보는 우리들에게도 삶을 향해 나아갈 수 있는 힘이 되어준다. 특히 이들의 연대가 사는 곳도, 나이도, 살아온 배경도 모두 다르지만 비슷한 아픔을 지닌 여성들 간의 연대라는 점에서 더욱 소중하고, 이를 그린 이 영화가 더욱 보물같은 작품이라 여겨진다.

 

비록 다양한 사건들에 얽힌 인물들의 이야기를 한정된 시간 안에 다루다 보니 스토리에 빈 곳이 보이기도 했지만, 그게 중요하게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캐릭터들 각각이 지니는 이야기와 그들 간의 관계성이 조화롭게 어우러져 몰입감을 더했다. 이를 가능하게 했던 것 중 하나는 극의 처음부터 끝까지 영화가 다루는 장르와 사건에 어울리는 텐션을 유지해내는 모든 배우들의 연기와 세심한 연출이었다.

 

특히 돋보였던 것은 등장인물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여성 캐릭터들이었다. 여성 캐릭터들의 등장이 적은 미스터리 장르에서 심지어 경찰을 직업으로 하는 캐릭터의 상당수를 여성 캐릭터로 구성했다는 점뿐만이 아니라, 이들을 모두를 입체감과 현실감을 갖춘 캐릭터로 만들어냈다는 점이 놀라웠다. 이를 보며 영화 <내가 죽던 날>에 다양한 차원에서 계속된 ‘여성 서사’에 대한 고민이 담겨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작품에 담긴 여성 서사가 다양한 위치에 있는 여성들의 이야기를 가시화하는 매개로서 작동하고, 또 그 자체로 매력 있고 공감되는 이야기로 다가오기 위해서는 여성들이 마주한 다양한 현실을 제대로 바라보고 이를 섬세하게 그려내는 것이 필요하다. 이러한 점에서 영화 <내가 죽던 날>은 여성들이 마주하고 있는 억압을 자연스럽게 드러내고, 이를 대하는 캐릭터 각각의 이야기와 이들의 연대에 집중하며 이를 현실감 있고 세심하게 그려낸다.

 


[꾸미기]스틸컷_현수_순천댁.jpg

 

 

현수, 세진, 순천댁 모두 가정과 사회 안에서 여전히 작동하는 젠더질서와 여성 억압 아래에서 벼랑 끝으로 몰린다. 현수의 남편은 본인이 불륜을 저질렀으면서 현수와 후배에 대한 악의적인 소문을 내고, 현수는 이 때문에 직장에서 발 붙일 곳을 잃는다. 주변에서 너무 쉽게 들을 수 있는 이 소문은 특히 여성인 현수에게만 치명적으로 다가온다. 또한 사고 때문에 말을 하지 못하게 된 순천댁은 거동하지 못하는 조카를 오빠 대신 혼자 돌보며 평생 섬 안에서 외롭게 살아왔다. 어쩌면 그렇기에 이들은 범죄를 저지른 아빠와 오빠 때문에 섬 안에 홀로 남겨진 세진에게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 손을 내밀었을 지도 모른다.

 

영화는 죽음 앞에 몰린 인물들이 서로의 아픔을 알아보고 손을 내미는 과정을 그리면서도, 이들이 짊어진 고통을 표현하기 위해 과도하게 폭력을 부각하거나 자극적인 사건이나 스캔들로서 이들의 아픔을 다루지 않는다. 오히려 이들의 생활과 삶에 단단히 자리잡아 계속해서 영향을 미치는 억압과 이로 인한 고통에 대해 담담하게 그려낸다.

 

또 영화는 편견 섞인 클리셰들을 절묘하게 비껴가는 방식으로 서사의 신선함과 매력을 더한다. 특히 세진과 새어머니 정미의 관계는 그동안 클리셰로 여겨져 왔던 여성 간의 갈등 구조를 잔잔하게 비틀며 다양한 여성들이 연대를 이루는 과정을 섬세하게 그려낸다. 현수 캐릭터 역시 기존의 미스터리 장르에서 (여성) 형사 캐릭터가 자주 보여줬던 모습들을 뒤집는다.

 

기존의 미스터리 장르에서 ‘여성 형사’ 캐릭터는 ‘여성임에도’ 엄청난 신체 능력을 지니는 모습으로, 혹은 부족한 신체 능력을 보완할 수 있는 또 다른 능력(주로 고정관념에서 비롯된 ‘여성성’에 부합하는)이 부각되는 모습으로 캐릭터의 우수함이나 필요성을 증명했다. 즉 ‘여성’임을 아예 지우거나 이를 과도하게 내세우는 방식으로만 주로 캐릭터성을 드러낸 것이다.

 

하지만 영화 안에서 현수가 직업적인 임무를 수행하는 데 있어, 또 형사로서 현수의 캐릭터를 드러내는 데 있어 (사실은 정말 당연한 것이지만) 현수의 성별은 크게 부각되지 않는다. 이는 다른 형사들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혼자 모든 것을 해결하고 정의를 실현하는 영웅도, 무능력하거나 비리를 저지르는 악인도 아니고, 그저 자신의 정의 안에서 고민하는 한 인간이자 전문적인 능력과 경험에서 우러나온 시선과 방식으로 사건을 대하는 직업인으로서 형사의 모습이 그려진다.

 

 

[꾸미기]스틸컷_현수_노을.jpg

 

 

어쩌면 정말로 당연한 이러한 관점을 굳이 '특별'하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이러한 시선으로 여성 캐릭터들을 그리는 작품이 아직도 너무 드물고, 여러 사회와 조직 안에서 자신의 역할을 수행하는 다양한 여성에 대한 편견은 여전히 존재한다. 그렇기에 이 영화가 담아낸 여성 서사에 대한 고민과 이를 통해 그려낸 캐릭터들이 더욱 신선하고 소중하게 다가온다.

 

그러므로 영화 <내가 죽던 날>이 담아낸 여성 서사와 여성 캐릭터를 재현하는 방식에 대한 고민이 더 다양한 장르와 분야에서 이루어지고, 현실의 여성을 바라보는 시선과 젠더질서에 대한 고민으로까지 이어졌으면 한다. 그래서 더 다양한 여성의 모습을 그리는 작품들, 또 이들 간의 연대를 그리는 여성 서사를 담은 작품들을 더 많이 볼 수 있기를, 이를 통해 더 많은 이야기를 해나갈 수 있기를 바라본다.

 

 

 

김효중 컬쳐리스트 태그.jpg

 

 

[김효중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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