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인생 첫 퀴퍼에 다녀오다 [문화 전반]

빠질 수밖에 없는 공존의 축제, 퀴어퍼레이드
글 입력 2022.07.23 1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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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차 다시 진행되는 축제들을 보며 ‘이번엔 어느 곳이든 꼭 가겠다!’라는 다짐을 반복했다. 하지만 굳건한 마음이 무색하게 대부분은 거리와 비싼 가격으로 포기할 수밖에 없어 상심이 컸다. 그러던 중 친구와의 대화를 통해 떠올린 축제가 있었으니, 바로 ‘서울 퀴어퍼레이드’(이하 퀴퍼)다. 이걸 생각해내다니, 무조건 가겠다는 마음이 바로 차올랐다.

 

퀴어는 어디에나 있지만 대부분 그 존재를 꽁꽁 감추고 살아갈 수밖에 없기에, 일상에서 ‘같이 존재함’을 또렷하게 느끼긴 쉽지 않다. 퀴퍼는 그 무수한 존재들(비단 퀴어만이 아닌 여러 소수자)이 잠시나마 해방되어 재미와 연대감으로 함께 엮일 수 있는 공존의 축제이다. 인생 첫 퀴퍼인 만큼 큰 기대를 품고 여정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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퀴퍼를 다루면서(특히 가장 먼저) 하고 싶은 얘기는 아니지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혐오 세력’이다. 말로만 듣던 혐오 세력을 직접 마주했을 때 느꼈던 건 위협감이었다. 자칫 퀴퍼가 열리는 날이라는 것이 헷갈릴 정도로 엄청난 규모의 혐오 세력이 행사장 옆에 자리하고 있었다.


그들은 대형 스피커와 북, 고함 등으로 불쾌한 소음을 유발해 축제를 방해하고, ‘동성애 반대’라고 적혀 있는 부채를 들고 거리를 돌아다녔다. 이 사실을 알고는 있었으나 그것이 엄청난 규모와 합세하니 실제의 위협으로 다가왔다. 이런 혐오는 씁쓸하게도 우습고 익숙하지만, 예상치 못한 충격은 초등학생 정도의 아이들을 데리고 온 가족 단위 참가자가 많았다는 것이다. 심지어 그중 일부는 단체복을 입은 채 춤을 추며 동성애 반대를 외치고 있었다.


참가한 어린이들의 주체성을 존중해야 하는 것과는 별개로, 이 현장은 편파적이고 왜곡된 정보와 종교를 가장한 세뇌를 통해 오히려 그들의 주체적인 탐색과 선택의 기회를 무시하고 혐오를 대물림하는 곳에 지나지 않았다. 남자아이가 치마를 입고 싶다고 하자 그 선택을 존중하며 다양성의 상징인 퀴어퍼레이드에 참여한 가족의 일화와는 확연히 대조적이다.

 

그들의 발언과 존재가 퀴어에게 분명한 실체가 있는 물리적·제도적·정신적 위협을 가하고 있고, 동시에 본인 아이들의 다양성과 존재 자체를 말살하고 있음을 밝히며 그들을 향한 일말의 관심을 돌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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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광장 안은 그야말로 알록달록했다. 이곳이 평소 알고 있던 한국이라는 게 생경할 정도로 다양한 인종과 국적의 사람들이 모였고, 자신이 원하는 모습으로 편하고 당당하게 존재했다.

 

사실 특별한 날인 만큼 굉장히 개성적인 스타일링이 많을 것이라고 예상했는데, 길거리 어디에서나 마주할 법한 이들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아 그렇지, 누가 뭐래도 퀴어는 어디에나 존재하는 평범한 이들이지!’라고 속으로 생각하며 편협한 생각을 지워냈다.


그 후에 많은 수의 체험 부스가 눈에 띄었다. 여러 나라의 대사관, 불교를 비롯한 다양한 종교, 타투, 콘돔, 가구 브랜드 이케아, 드랙 아티스트, 비건 음료 카페 등 그 종류가 굉장히 다양했다. 여러 소수자 단체와 각국 대사들, 초청 아티스트들이 무대 앞에서 공연과 연설을 통해 사랑과 지지의 에너지를 전달하기도 했다.

 

3년 만에 열리는 오프라인 행사인 만큼 정말 많은 사람이 자리했는데, 다양한 개성이 예외 없이 편안한 표정을 띠는 것을 보는 게 참 좋았다. 김초엽·김원영 작가의 저서 <사이보그가 되다> 중에서, 장애는 개인의 기능 결여가 아니라 사회적 상호 작용을 하는 순간 발생하는 것이라는 말을 인상 깊게 읽었다. 간단한 예로 휠체어를 탄 이가 지하철을 이용할 때 적절한 승강기와 경사로와 화장실이 있고, 지하철 사이 틈이 좁다면 그곳에서만큼은 그에게 발생하는 장애가 없다고 볼 수 있다. 즉 장애는 그것이 속해 있는 사회적 요소와 공간의 인지 결여로 인해 만들어지는 개념이다.


비슷한 맥락에서 퀴어를 비롯한 소수자가 이 공간에서 편안히 존재할 수 있는 것은, 퀴퍼가 열리는 서울광장이 그들을 이상하고, 죄로 가득하고, 쓸모없는 이들로 대하고 있지 않다는 단순한 사실 때문이다. 최대한 다양한 이들을 동등한 구성원으로 인식하여 공간을 베리어 프리(barrier free)하게 구성하고, 그 속의 구성원들이 서로의 다름을 다채로운 개성으로 인식하고 존중하며, 혹여 마련한 공간이 불만족스러워도 의견을 제시했을 때 그것이 적극적으로 고려될 것이란 신뢰, 그것에서 기인하는 자아 존중과 정치적 효능감으로 편안하게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벽 하나를 두고 똑같은 존재가 죄인이 되거나 지극히 평범한 존재가 된다. 만약 죄가 있다면 과연 그 존재가 죄일까, 그를 죄인으로 만드는 존재가 죄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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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에는 퀴퍼의 백미라고 생각하는 서울 도로 행진이 진행됐다. 안온한 공간을 마련하는 것 자체도 충분히 의미 있는데, 자신을 감추고 살 수밖에 없는 이들을 본연의 모습으로 당당하게 드러내는 행사라니 굉장히 상징적이었다. 심지어 서울 시청 도로 한복판에서 말이다! 약 4km를 이동하는 행진은 다양한 존재가 올라타 각자의 퍼포먼스를 보여주는 트럭의 리드에 따라 진행된다.

 

원하는 트럭의 뒤를 따르며 큰 소리의 노래와 함께 각자의 방식으로 즐기면서 수많은 동료와 도로를 거닐면 된다. 퀴어와 여러 소수자가 ‘여기 이곳에 있다’라는 것을 명확하게 보여주는 기념비적인 행사임과 동시에 서울 한복판을 신나고 자유롭게 걸어 다닐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굉장히 해방적이었다.


이번 퀴퍼 행진에서는 폭우가 함께 했는데, 굉장히 힘들었지만 더 큰 해방감과 재미를 느낄 수 있었다. 필자는 이날을 자연이 내린, 자연이 허락한 퀴퍼밤(‘퀴퍼’와 ‘워터밤’을 합성한 말)이라고 명명하고 싶다.

 

이날만큼은 은은하고도 압도적인 힘으로 나를 옥죄었던 타인의 시선을 비와 함께 씻어낼 수 있었다. 그렇게 ‘퀴퍼’와는 멀어져 ‘보통의 공간’으로 돌아가는 와중에도 홀딱 젖은 몸과 입고 싶은 옷을 시선에 개의치 않고 유지하며 집으로 돌아왔다. 퀴퍼는 과정도 의미가 있지만, 그 순간이 끝나 ‘보통의 삶’으로 복귀하면서 마주하는 차이를 목격하는 것에도 큰 효용이 있다고 느꼈다.

 

서울광장에서는 아무 제한 없이 당당했던 우리가, 그곳에서 벗어나 점진적으로 외부의 시선을 신경 쓰며 스스로를 제한하고 있다는 사실을 일상으로의 복귀에서 발견한다. 앞서 말한 것처럼 나는 변하지 않았는데 공간에 따라 차이가 나타나는 것은, 자신이 아닌 공간에 결함이 있을 가능성을 어느 때보다 설득력 있게 받아들일 수 있게 한다. 그렇게 하루를 살아갈 용기를 스스로 피워낼 수 있게 한다. 다음 축제를 향해 1년을 살아갈 이유를 발견할 수 있게 한다.


사실 이런 낭만적인 말만 늘어놓기에 퀴퍼는 한순간에 불과하다. 그 순간이 주는 힘은 물론 무시할 수 없을 만큼 강력하지만, 현실은 순간이 아닌 연속이므로 이날을 제외한 모든 날이 지옥과 같다면 그 또한 적절한 삶이라고 하기 힘들 것이다. 그렇기에 이 순간에만 만족하면 안 되고, 이 순간에만 만족하라고 해서도 안 된다. 이날 느꼈던 감정들이 모든 순간으로 퍼져나가기 위해 실질적인 제도적 문화적 변화가 일어나야 한다. 그렇게 삶은 ‘당연한’ 순간의 연속이 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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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새 존재 자체가 죄가 되는 이들이 불어나고 있는 요즘이다. 그 죄는 누가 규정하는가. 누가 규정할 수 있는가. 언급했듯 퀴퍼는 비단 성 소수자만을 위한 축제가 아니다. 장애, 젠더, 인종, 국적, 종교 등의 유형뿐만 아니라 어떠한 이유로든 타인의 시선에 의해 위축되고 납작해지고 위협을 느낀 경험이 있는 이들, 즉 ‘모두’를 위한 축제이다.


사회는 이런 소수자, ‘모두’를 흔히 오류라고 규정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미 형성해놓은 틀에 맞지 않은 것이 문제라는 논리다. 조금만 생각해도 이는 얼마나 오만하고 퇴행적인 태도인지 알 수 있다. 프로그래머가 일정한 수식 아래에서 오류를 발견했을 때, 실존한 오류 자체를 탓하고 이를 외면하거나 없애려 한다면 아무런 발전을 하지 못할 것이다.

 

이는 포악하고 ‘틀린’ 태도다. 오히려 그 오류를 통해 현재 형성된 수식의 문제점을 찾으려 부단히 움직이고, 그 오류를 무리 없이 포용하는 궤도를 확장해 낼 때 진일보할 수 있다. 당연한 상식이다. 오류를 골칫거리가 아닌 성장의 기회로 여기고 이해하고 받아들이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사회라면, 개인적인 의견이지만 난 당당히 오류라고 불릴 것이다. 기꺼이 실존하는 ‘오류’로서 존재할 것이다.


이 세상의 어떠한 오류도 지배자의 폭력에 의해 쉬이 제거되지 않기를 바란다.

 

존재하는 모든 이상한 괴짜분들 살고 함께하고 나아갑시다. 그리고 매년 퀴퍼에서, 삶 속에서 다시 만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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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해영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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