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인류의 종말 앞에서 ‘너’를 기다리며 ‘나’를 더듬는다 - 도서 ‘키스마요’

당신의 시간은 얼마나 남았을까?
글 입력 2021.12.07 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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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은 지구촌 전등 끄기 캠페인이 있던 날 소행성 충돌이 예견되며 시작한다. 아이러니한 일이다. 더 나은 미래를 위한 희망을 꽃피우고자 이제라도 애써보려는 순간 인류는 갑작스레 코 앞까지 다가온 종말과 마주해야 하는 운명에 처한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 일어난 걸지도 모른다. 우리는 언제나 서서히 다가오고 있는 종말의 위험 신호를 못 본체 해왔으니까. 그 누구도 이 사실을 완전히 부정하지는 못할 것이다.


<키스마요>의 시점을 이끌어 가는 ‘나’는 지구에 혼란이 온 그 순간 사랑하는 ‘너’를 잃어버렸다. 잃어버린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나’는 ‘너’를 소유한 적이 없으니까. ‘너’는 단 한마디 말도 없이 흔적을 남기지 않고 사라져 버렸다. 마치 원래부터 없었던 사람처럼. 죽음만이 존재할 수 있는 관같은 집에 ‘나’를 혼자 남겨두고. ‘나’는 ‘너’를 하염없이 기다린다. 그건 어쩌면 ‘나’ 스스로를 위한 일이다. ‘너’ 없이 ‘나’는 죽은 상태도 살아 있는 상태도 그 무엇도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 ‘나’의 모습처럼 사람들은 어쩐지 종말을 눈 앞에 둘수록 다른 극의 자석처럼 서로를 찾아 나선다. 서로가 서로의 구멍이 되어 깊이 매몰되고 만다. 결국 스스로 존재 의미를 찾고 증명할 수 있는 이들은 많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계의 종말이라는 극단적인 사건을 눈 앞에 두고서야 우리는 솔직한 민낯을 드러낼 수 있는 것 같다. 결국 ‘누군가와의 관계’가 아니면 살아가지 못하는 자신의 모습을 말이다.


 

‘너는 오지 않았고 나는 알 수 없게 되었다. 내가 있는지 없는지. 빈 집 같았다. 네가 없어서 빈집이 되었다. 나 혼자라서. 이곳을 빈집으로 만든 건 나였다. 내가 있어서 빈집이었다. 내가 있는 데마다 나는 없었다.’

 

도서 <키스마요> P. 93 中

 

 

사실 ‘왜 사는 것인가?’에 대한 질문의 답은 수없이 더듬어 봐도 찾기 어려웠다. ‘죽음’을 생각할수록 두렵고 아득해지는 것은 반대로 ‘삶’에 의미를 찾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미지의 영역’이기 때문이라는 생각이다.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다면 죽음이 두려운 이유라도 알 수 있지 않을까? 주인공 ‘나’와 이 책을 읽는 나는 비슷한 면을 지녔다. 어쩌면 그 정도가 다를 뿐 인간은 모두 그러한 면을 지니고 있는 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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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더듬고 더듬어 봐도 ‘다른 사람과의 관계’외에는 떠올릴 수 있는 것이 없다. 누군가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서, 혹은 누군가를 사랑하기 때문에, 누군가와 함께할 미래를 기대하기 때문에 우리는 살아간다. ‘나’에게 있어서 모든 의미는 ‘너’에게 있는 것은 그 이유 때문이다. 결국 인간은 아담과 이브의 속설처럼 미완의 존재일지도 모르겠다. 서로가 있어야 비로소 완성되는.


 

‘개들은 한곳을 바라보았다. 한사람을 기억했다. 한사람을 기다렸다. 한사람을 기억했다. 자신을 버린 사람을.’

 

도서 <키스마요> P. 101

 


소설을 읽어내려 갈수록 어쩐지 ‘나’의 모습이 감염원인 주인을 사랑하여 죽음을 기꺼이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애완 동물’, 이 책의 표현으로는 ‘개’의 모습과 닮았다는 생각이 뇌리를 떠나지 않는다. 물론 ‘반려 동물’이라는 표현이 옳지만 이 소설 속 묘사로서는 ‘애완’이 더 적절한 표현으로 느껴진다. 한쪽으로만 향하는 일방적인 관계이기 때문이다. 놓는 쪽은 놓을 수밖에 없고 붙잡는 쪽은 붙잡을 수밖에 없다.


넘기는 책장이 절반이 넘어가도록 ‘나’는 오로지 ‘너’만을 기억하고 기다린다. 마치 자신의 존재 이유가 그것밖에 없는 것처럼. ‘나’뿐만이 아니다. ‘나’가 너와 듣던 음악 소리를 따라 간 그곳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의미 없이 서로를 붙잡고 있었다. 그들의 눈에 서로가 담기지 않더라도 그들은 서로를 놓을 수 없었다. 그것마저 놓아버리면 정말로 무(無)가 되어 버리기 때문인걸까.


 

‘죽거나 사는 거밖에 없는 게 아쉽다. 하나만 선택해야 하는 게.’

 

‘무의미를 확인하기 위해 산 거 같았다. (…) 어떤 의미가 있는지 찾아봐도 무의미를 확인하게 될 뿐이니까.’

 

도서 <키스마요> P. 120-121

 


소설은 ‘삶’에 대한 비관적인 표현들로 가득 차 있다. 죽음에 대한 누군가의 검디 검은 생각을 엿보는 것만 같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보면 참으로 용감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죽음’에 대해 회피하지 않고 그 생각의 줄기를 더듬어 간다는 것은 경외심이 들만큼 대단한 일이다. 어느 정도는 소설 속 텍스트에 공감하게 된다. 나또한 위와 같은 생각을 떠올리기 직전까지 나를 내몰고 간 적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언제나 그 언저리쯤에서 나는 되돌아 왔다. ‘아직 멀었다’는 안일한 생각들로 나 자신을 다독이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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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만약 소설 속과 같은 상황이 실제로 일어난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소행성의 충돌은 눈 앞에 다가왔고 온 세상은 혼돈으로 가득 차 있다. 그 무엇도 이전과 같이 되돌아갈 수 없다. 그러한 극단적인 상황 앞에서 나는 ‘나’를, ‘너’를 잃지 않을 수 있을까? 아니, 못할 것 같다. 나체의 양아치 시위자들에 섞이는 길을 선택하거나 ‘살인 놀이’의 대열에 끼지 않으리라는 보장을 할 수 없을 것 같다.


이 책을 덮고 이전처럼 마냥 회피할 수만은 없게 된 이유에는 우리의 일상을 덮친 ‘그 상황’이 있다. 소설 속에서도 등장하는 그 바이러스는 서서히 우리를, 나와 너를 극단적인 상황 속으로 몰아가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세상의 종말이 다가왔다거나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그 상황에 대한 생각을 멈추어서는 안된다는 경각심이 들었다.


맞다, 인생은 죽거나 살거나 둘 중 하나이고 그 안에서 우리는 끝없는 고통 속을 부유해야 할지도 모른다. 붙잡을 수 있는 것이 ‘너’말고는 아무것도 없을 지도 모르고, 소설 속 ‘나’처럼 ‘너’마저 잃어버리게 될지도 모른다. 아이러니 하게도 그런 일이 현재 비일비재하게 벌어지고 있다. 바이러스는 점점 사람과 사람을 갈라 놓고 멀어지게 하고 있고, 그러면 그럴수록 우리는 이전보다 더 가까이 있고자 하는 갈망을 할 수밖에 없다.


*

 

결국 정답은 없다. 절대 영원할 수 없는 인간의 삶의 끝자락에서 나는 무엇을 붙들어야 할지, 혹은 어떤 마음가짐을 지녀야 할지 결정하지 못했고 사실 그것에 대해 깊이 생각하기를 미뤄 두었다. 그러나 이 책은 그런 나의 안일함에 일침을 날린다. ‘네 생각보다 시간은 그리 많지 않다’고. 사실이다. 어쩌면 끝이 정해져 있기에 처음이 존재하고, 삶이 때로는 아름답다. 그렇기에 우리는 이에 대한 사유를 멈추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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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다온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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