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코 히구치 특별전을 처음 접한 것은 SNS를 서핑하던 도중 만난 화려한 포스터 이미지를 통해서였다. 세밀한 펜 작업이 돋보이는 그림체와 사실적이고도 독특하게 표현된 고양이의 모습이 절대 지나칠 수 없도록 시선을 이끄는 묘한 힘이 있었다.
전시의 부제인 ‘비밀의 숲’과 너무나도 잘 어우러지는 포스터 속 귀엽고도 어딘지 섬뜩한 매력이 있는 캐릭터들로부터 마치 은밀한 초대장을 건내 받은 것처럼 거부할 수 없는 이끌림에 결국 나는 평소 인파를 피해 방문을 꺼렸던 더 현대 전시장을 제 발로 방문하게 되었다.
운이 좋게도 이번 전시는 특히나 한국 최초로 열리는 유코 히구치의 대규모 전시인만큼 엄선된 1000 여 점의 작품을 작가가 직접 디렉팅한 특별한 전시 공간에서 즐길 수 있었다. 일본에서 이미 열 차례 성공적인 투어를 마친만큼 검증된 작품 세계에 한국 전시를 위한 특별 제작 작품까지 더해진 이번 전시는 올해 10월부터 내년 1월까지 더 현대 6층에 위치한 전시장에서 진행된다.
Section 숲의 입구. 초기 드로잉을 통해 살펴보는 탄탄한 캐릭터 구축 과정
전시장 입구로 들어서는 순간, 우리는 현실의 경계 선을 넘어 작가가 구축한 판타지 세계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기묘한 분위기를 품은 숲에 발을 들이게 된 빨간 망토가 된 것처럼, 비밀스러운 분위기가 자욱하게 깔린 이 공간에서 유코 히구치는 자신의 초기 드로잉 작품을 통해 방대한 작품관의 첫 소개를 시작한다.
무엇보다 인상 깊었던 점은 작가가 구태여 자신의 작품관에 인위적인 의미 부여를 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유코 히구치는 특정 주제나 메시지를 의식적으로 그리기 보다 자신이 자연스럽게 관심을 가지게 된 몇 가지 모티프들을 이용해 작가 본연의 독특한 상상력에 기반하여 방대한 작품을 그려냈다.
작가 스스로도 아직 자신이 왜 그런 모티프들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인지 몰라 탐색 중이라고 밝혔는데, 이러한 한 겹의 겉치레 없는 진솔한 모습이 참 매력적이었다. 그토록 자연스럽고 꾸준한 작업 방식의 영향이었을까, 작가가 탄생시킨 캐릭터들은 탄탄한 스토리와 설정에 기반한 확실한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
ⓒYuko Higuchi
이 초기 드로잉 공간에서는 그들이 탄생하게 된 일련의 과정을 속속들이 살펴볼 수 있었다. 작가는 자신의 관심 영역에 있는 모티프들을 이리저리 조합해보는 과정을 통해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독특한 형상을 만들어냈다.
버섯과 아이의 신체, 고양이 얼굴과 금붕어 지느러미 등 전혀 연관 없을 것 같은 모티프들은 작가 특유의 세밀한 표현력과 만나 점차 완성도 높은 세계관을 만들어 간다. 무엇보다 전시 공간에서 작가의 필체가 담긴 러프한 스케치, 작업 과정을 만화 형식으로 풀어낸 독특한 작품 등을 통해 이 단계적인 과정을 생생하게 목격할 수 있다는 점이 이 공간의 가장 큰 매력이지 않았나 싶다.
Section 컬러버레이션. 형식과 장르를 넘나들어 정체성을 잃지 않는 작가의 작품관
ⓒYuko Higuchi
이렇게 탄생한 작가의 캐릭터들은 단단한 정체성을 뿌리에 두고 자유자재로 모습을 바꾸며 다음 섹션에서 변화 무쌍한 모습을 보여준다. 특히 작가의 실제 반려묘인 ‘보리스’에게서 영감을 받아 고양이의 얼굴과 뱀의 머리 모양을 한 손, 문어 다리를 가진 캐릭터 ‘구스타브’의 활약을 이 공간에서 눈 여겨 볼만하다.
유코 히구치는 다양한 브랜드, 기업과의 컬레버레이션을 진행하였는데, 해당 섹션에서는 그의 독특한 작품 특성이 묻어난 콜라보 작품들을 만나볼 수 있었다. 이 공간에서 주목할 만한 점은 어떠한 브랜드를 만나더라도 작가의 손에서 탄생한 캐릭터와 작품은 특유의 정체성을 잃지 않는 다는 점이었다.
가령 모스 버거와의 콜라보 작품에서 구스타브의 다리가 여러가지 색으로 변모하는 모습, 디즈니 콜라보 작품에서 디즈니 캐릭터 ‘마리’의 대표 소품을 착용한 고양의 모습에서도 우리는 앞서 익히 보아왔던 캐릭터들의 기시감을 느낄 수 있다. 장르와 형식을 넘나드는 콜라보 작업 속에서도 이토록 뚜렷한 작품 특성과 정체성이야말로 유코 히구치가 가진 강력한 무기일 것이다.
Section 비밀의 방. 전통의 색을 입고 폭넓은 형태로 존재하는 작가의 모티프들
마치 길을 잃고 헤매던 숲 속에서 우연치 않게 오솔길을 발견하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관람 동선 사이에 비밀스러운 방과 같은 공간이 있다. 이곳에는 일본 전통 문화에 대한 작가의 애정이 묻은 다양한 형식의 작품이 알차게 배치되어 마치 어느 오래된 일본 가정집에 방문한 것만 같은 감상을 준다.
구스타브를 포함하여 작가의 작품에서 꾸준히 등장한 캐릭터를 담아 재해석한 고전 작품들이 이 공간에서 무드등, 방석, 족자 등 평면을 벗어나 다양한 형태의 구성요소로 존재한다. 한쪽 귀퉁이에 마련된 주인 없는 손님상 뒤로 어스름한 어둠이 내린 창문, 그 위로 드리우는 캐릭터의 그림자가 이번 전시 특유의 으스스한 분위기를 연출하는데, 이 또한 이 공간의 매력 포인트이다.
무엇보다 눈에 띠었던 작품은 한 쪽 벽면을 장식하고 있는 익살스러운 표정의 고양이들이었는데, 이 작품은 고전 작품인 ‘풍신뇌신도’의 험상궂은 신들의 모습을 유코 히구치의 작품관 속 귀여운 고양이들의 모습으로 대체하여 공간에 특유의 아기자기한 매력을 더해주지 않았나 싶다.
Section 그림책. 확고한 캐릭터성과 따스한 감성이 만나 펼치는 스토리
ⓒYuko Higuchi
앞선 공간에서 서서히 친밀감을 쌓아온 작가의 캐릭터들은 이 공간에서 세밀한 스토리 라인을 만나 포텐을 터트린다. 유코 히구치는 그림책 작가로 활동하기도 했는데, 이 섹션에서는 그가 지금까지 발간한 그림책의 원화들이 액자 속에 담겨 관람객을 기다리고 있었다.
신기한 점은 원화에는 어떠한 텍스트도 없었지만 액자에 걸린 순서대로 원화 속 캐릭터들의 표정과 관계성에 주목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이들이 처한 상황과 그 속에서의 감정이 읽혀진다는 것이다. 앞서 독자적인 매력을 뽐낸 캐릭터들은 이 공간에서 함께 얽히고 상호작용하며 보기만 해도 따스한 이야기들을 만들어 낸다.
Section 호러. 해맑지 않은 소녀의 부시시한 정체성을 담다
ⓒYuko Higuchi
유코 히구치 작품관의 가장 큰 특성은 귀여움과 섬뜩함이라는 양면적인 요소가 동시에 존재한다는 점인데, 앞선 작품들에서는 두 요소들이 적절하게 배분되어 있었다면 이 공간에서 작가는 조금 더 다크한 미학에 집중한다.
꾸준히 등장해온 작가의 모티프들 중에서도 이 섹션에서 유독 존재감을 드러내는 것은 ‘소녀’이다. 유코 히구치는 3~7세 정도의 소녀들에게서 발견할 수 있는 독특한 자아에 주목한다. 그것은 매체에서 주로 표현되는 발랄함이나 순진함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어 생경한 감각을 불러 일으킨다.
어디를 향하는지 알 수 없는 확장된 동공, 부시시한 머리 모양과 무표정한 표정의 소녀들은 달팽이, 버섯, 문어 등 숲 속의 모티프들과 어우러져 공포스러운 분위기를 연출한다. 어쩌면 이 종잡을 수 없는 모습이야말로 정체성의 혼란을 겪을 수 밖에 없는 그 시절 소녀들에게서만 찾아볼 수 있는 특성일 것이다.
Point 1. 섬세한 작품 세계를 완성하는 디테일한 전시장 구성 요소들
1000 여 점이 넘는 방대한 작품 수 만큼이나 이번 전시를 특별하게 만들어주는 요소는 당연 작가의 섬세한 손길이 담긴 전시장의 소소한 구성 요소들이 아닐까 싶다. 전시 공간 곳곳에서 이러한 세밀한 포인트를 찾아 볼 수 있었다.
가령 액자가 걸린 벽면은 단순한 벽지가 아닌 작품의 연장선으로 이루어져 있다. 비밀의 숲을 연상케 하는 나뭇잎들과 미디어 아트를 접목한 깜빡이는 고양이의 눈이 표현되어 있는가 하면, 작품 속 드로잉이 그대로 반영된 배경은 분명 평면임에도 작품에 생동감과 입체감을 불어 넣어 준다.
특히 섹션 6 비밀의 숲과 섹션 7 호러 사이에 존재하며 비밀의 숲 테마를 부각해주는 판넬 통로, 초입 바닥에 미디어 아트로 표현된 반딫불이와 나비 문양들은 이곳이 전시장이라는 사실을 잊게 만들어 정말로 작가의 작품 속 미지의 숲에 불시착한 것만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Point 2. 2D와 3D를 넘나드는 매력적인 작품 세계
ⓒYuko Higuchi
유코 히구치만이 구현할 수 있는, 이번 전시의 빼놓을 수 없는 또다른 매력 포인트는 평면과 입체를 넘나드는 작가의 폭 넓은 작품 세계가 아닐까 싶다. 일러스트, 드로잉을 지나 그림책, 대형 포스터를 넘어 그는 펠트, 목각 인형 등의 조형물, 그리고 일본 특유의 감성이 엿보이는 아날로그 영상까지 형식을 가리지 않고 다양한 작품을 선보인다.
ⓒYuko Higuchi
특히 벽면이 아닌 수평 공간에 위치한 평면 작품들 사이에는 특이하게도 작품 속 캐릭터들의 피규어들이 배치되어 있었는데, 이러한 구성에서 작가의 똑똑한 전략을 체감할 수 있었다. 작품 수가 워낙 많은 만큼 특히 존재감이 적은 수평 공간 작품에는 눈이 덜 갈 수 밖에 없었는데 이 피규어들이 시선을 잡아 끌어주는 역할을 하고 있었다.
더불어 2D 작품 속 평평한 캐릭터들이 피규어라는 3D 형태로 구현되어 바로 옆에 배치되어 있는 구성에서 마치 그림 속에서 살아난 것처럼 생동감을 느낄 수 있었다는 점도 이 전략적인 구성의 매력이지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