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육지에서 온 우리들

제주 동쪽 마을, 세화의 풍경에 녹아들다
글 입력 2021.08.29 1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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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에는 제주도로 떠나요]

세 번째 이야기

 

육지에서 온 우리들

 

글. 임정은


 

 

Today’s BGM

Astrud Gilberto - Beach Samb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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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의 고단함을 씻겨내 주려는 듯 하늘은 고맙게도 청명한 빛을 띠고 살랑살랑한 바람을 보내주었다. 덕분에 그동안 꿈꿔왔던 낭만적인 하루를 보냈다.


숙소에서 제공하는 조식을 먹기 위해 아침 일찍 일어나 1층 카페로 내려갔다. 투숙객들이 자유롭게 머물 수 있는 공용 카페는 아늑한 분위기였다.


구석 선반에는 오래된 LP음반이 가득 채워져 있었고, 잔잔한 재즈 음악이 공간을 채웠다. 조식은 식빵, 계란 프라이, 시리얼 정도로 간단하게 제공됐지만 먹고 나니 아주 든든했다. 입가심으로 귤을 먹으니 이보다 좋을 순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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든든히 챙겨 먹고선 숙소 근처에 있는 세화 해변을 향해 걸었다.

 

이미 11월 중순이기에 서울이었다면 두툼하게 코트자락을 여며야 했겠지만 이곳은 아직 따뜻하다. 아직까진 쌩쌩하다는 듯 뜨거운 열을 내리쬐는 태양에 머리는 점점 따뜻해졌다. 얇을 줄 알았던 짧은 재킷이 덥게 느껴진다.

 

9월도, 10월도 아닌 11월이라는 어중간한 계절에 여행을 온 것 같아 조바심이 났는데 제주는 여전히 밝은 기운을 내뿜고 있다. 여긴 야자수와 귤이 자라는 열대기후라고, 겨울에도 영하로 내려가지 않는다며 육지에서 온 나를 보며 여유 가득한 미소를 보내는 기분이다.

 

고개를 돌린 시선의 끝엔 늘 바다가 푸르게 보였다. 길가의 식물은 꾸밈없지만 누구보다 당차고 곧았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어여뻤다. 곳곳에는 다육이가 즐비해 있었는데, 작지만 도톰하고 잎사귀가 제주의 풍경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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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항엔 사람이 참 많았는데 여기엔 사람이 별로 없는 것 같다. 아직 조금 이른 시간이라 그런가, 아니면 다 서쪽으로 가버린 걸까?

 

우리는 제주의 동쪽을 여행한 다음 서쪽을 구경하기로 계획을 세웠다. 애월이 있는 서쪽을 먼저 가고 싶었지만, 머물만한 숙소가 마땅치 않았기에 엉겁결에 동쪽을 먼저 오게 됐다. 애월을 다녀온 주변 친구들이 너무 좋았다고 입이 마르도록 칭찬했기에 나도 모르게 그 지역을 기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기대하지 않던 곳에서 만난 풍경은 아주 근사했다. 아침바다가 어찌나 예쁘던지. 섬나라 특유의 분위기가 도처에 퍼져 있었다. 부산과 강릉의 바다와는 완전히 다른 느낌으로.

 

세화 해변은 동쪽 바다 특유의 고요한 잔잔함을 간직하고 있었다. 모래는 아주 희고 고왔다. 쭈그려 앉아 손으로 만져보니 조개가 부식되어 만들어진 알갱이 형태가 고스란히 보였다. 오묘한 빛깔에 매료되어 한참을 들여다보고, 귀엽고 동그란 조개껍질을 몇 개 주워 주머니에 넣었다. 바다의 아름다움을 몰래 훔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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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엔 요즘 즐겨 보는 드라마의 촬영 장소였던 서점 겸 카페로 향했다. 평대리 해변 근처 조용한 골목에 있는 카페는 가정집 3개가 연결된 형태였다. 한쪽은 독립서점으로, 나머지 공간은 카페로 이용되고 있었다. 돌담으로 둘러싸인 넓은 마당엔 주황색 그네도 있었고 그 너머론 푸른 바다가 보였다.

 

그동안 제주도에 몇 번을 왔었나, 문득 떠올린다. 한 번은 5살 무렵, 두 번째는 초등학생 시절, 그리고 열여덟 수학여행이 마지막이었다. 6년이나 시간이 흘러 기억은 희미해졌고 모든 게 새롭고 낯설게 느껴진다.

 

마치 이 섬에 처음 발을 디딘 사람처럼, 눈앞에 펼쳐지는 그림같이 아름다운 풍경을 바라보며 어색하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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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에서 살아가는 삶은 어떤 모양일까. 오늘 저녁으로 먹었던 순두부 뚝배기집 사장님은 “반찬으로 나온 아귀포 반찬, 너무 맛있어요. 제주도 산이예요?”라는 엄마의 질문에 “아니지, 그건 다 육지에서 건너왔지”라고 하셨다.

 

육지. 육지에 살고 있는, 이십몇 년 간을 육지에서 쭉 살아온 나로선 ‘육지’라는 말을 도통 사용할 일이 없었다. 그러나 이곳 사람들에게 세계는 둘로 나눠진다. 섬, 그리고 육지. 환경은 사람의 언어와 사고방식을 바꿔놓는다. 제주에서 나고 자란 이들의 입에서 나오는 ‘육지’라는 단어가, 어쩐지 새삼스러우면서도 왜 그리 정답게 느껴지는지 모르겠다.

 

어딜 가나 귤이 있다는 것도 참 신기했다. 어제저녁 갔던 카페에서도, 아침 조식에도, 오늘 오전에 들른 책방에서도 귤이 있었다. 덕분에 귤을 마음껏 먹는 기쁨을 맛봤다.

 

그렇다. 우리는 귤의 계절에 온 것이다. 서점에 놓인 귤 바구니를 보곤 신기한 얼굴로 사장님께 물으니, 귤은 이제부터 시작이라고 한다. 주변에서 하도 많이 나눠주는 덕에 겨울엔 귤을 사 먹을 일이 없으시다고. 순간 부러운 마음이 스쳤다. 새콤하고 달콤한 정이 오고 가는 풍경을 떠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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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에서 활동하는 작가님도 두 분이나 뵐 수 있었다. 귀여운 고양이 그림에 이끌려 들어간 월정리의 소품샵도 작가님이 직접 운영하는 곳이었고, 숙소 근처의 ‘세화씨 문방구’ 또한 작가님이 직접 운영하는 소품샵이었다. 자기 그림으로 가득한 공간에서 머물며 그림을 그리는 모습이 참 멋졌다.

 

세화씨 문방구의 작가님은 작지만 정감 있는 이 동네가 좋아 매번 그 풍경을 그림에 담는다고 했다. 종종 손님들이 유명한 관광지를 그려달라고 요청하기도 하지만, 자신은 이 동네를 그리는 일이 가장 재밌고 즐겁다고 말하셨다. 작가님의 그림에선 오늘 만난 세화의 아기자기한 풍경이 고스란히 녹아들어 있었다.

 

제주는 참 좋은 곳이다. 왜 예술가와 창작자가 이 섬으로 떠나올 수밖에 없는지 새삼스레 깨닫는다. 발길을 딛는 도처마다 영감이 샘솟는 곳이니까. 언제나 한결같은 자연이 마음을 깨끗하게 씻겨주니까.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이며 마음껏 표현할 수 있는 곳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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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무언가를 만드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언제쯤 내 기록을 망설임 없이 밖으로 꺼낼 수 있을지 오늘도 고민한다. 재능보다 중요한 건 결국 꾸준함과 성실함이라는 걸 알면서도 왜 모르는 척하는지.

 

그럼에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언가를 쓰고 기록하는 일 밖에 없어서, 속절없이 흘러가는 하루를 붙잡고 싶은 마음만 굴뚝같아서, 오늘도 이렇게 의자에 앉아 일기를 쓰고 있다. 여기저기서 모아 온 영수증과 스티커, 명함 같은 걸 이리저리 배치해보며 붙여본다. 또 하나의 작은 세계를 만들어 본다.

 

 


 

  

15박 16일 

제주 여행기는 계속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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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정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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