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내가 보낸 여름, 내가 보낼 여름 : 김미현 '지금 난 여름에 있어' [도서/문학]

내가 남기고 싶은 여름, 그 빛깔에 대하여
글 입력 2021.03.07 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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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_ 저자 김미현 블로그 [우리 여름을 살자]

 

 

바이러스 탓에 참으로 고달픈 여름이었다. 찌는 듯한 더위는 마스크 탓에 유난히 답답했고, 파란 하늘을 올려다보기도 어려운 계절이었다. 나는 끝이 안 보이는 일들에 많이 지쳐 있었고, 때마침 좋은 기회로 1박 2일 영월여행을 떠나게 되었다. 도착한 숙소는 푸른 나무로 둘러싸인 북스테이였다. 영월에서 참으로 소중한 시간을 보내고 서울로 돌아와, 그 북스테이와 함께 운영되는 독립서점을 찾았다. 나와 독립출판 세상의 첫 만남이었다.

 

공기를 따뜻한 색으로 물들이며 공간을 채우는 음악 소리와 미세한 책 냄새. 그 속에서 처음으로 내 마음에 들어온 책이 김미현 작가님의 '지금 난 여름에 있어'다. 표지의 진초록색이 포근했고 아름드리나무가 든든해 보였다. 손에 꼭 쥐고 몇 장 넘겨 보다가 충동구매는 싫어 책을 내려놓고 나왔지만, 인터넷 구매처를 알게 된 뒤로 홀린 듯 바로 구매했다. 나는 잠깐 본 이 책이 많이 애틋했던 것 같다.

 

사실 독립출판물은 취향을 타는 경우가 많다. 누구나 작가가 될 수 있는 만큼 작가의 범위가 넓다. 운이 좋게도 이 책의 작가님과 나는 굉장히 잘 맞았다. 혼자 있고 싶다가도 사람들과 나는 부대끼고 싶은 마음과 사랑이 많은 친구들 사이에서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다 느끼는 미안함에 공감했고 자기 내면의 변화를 알아차리는 것, 마음 깊은 곳 가지고 있던 강한 방어기제를 인정하는 것에 마음이 울렸다.

 

책에는 네 가지 계절이 쓰여 있다. 여행이 그렇게 좋지도 않지만 일단 떠난 제주, 제주에서 막 돌아와 지친 몸과 마음이었지만 11년지기 친구와 떠난 몽골, 51대 49의 마음으로 출발 전까지 울상이었던 프라하, 4년 전 여름 방문했던 이후로 좋아하지 않는 여행지가 되었던 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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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여름의 제주 세화

 

 

내가 가 본 경험이 있는 곳은 제주뿐이었기에, 제주 부분에서 특히 오랜 시간을 보냈다.

 

스무 살, 처음으로 부모님 없이 떠나 본 제주여행 마지막 날에는 소나기가 내렸다. 하필 마지막 날이라 무거운 캐리어와 함께였고 친구와 나는 마땅한 계획도 없었다. 어린 시절 다들 즐겼다는 촉감 놀이마저 거부할 정도로 찝찝한 상태를 싫어하는 나인데도, 슬리퍼를 신은 채 흙탕물을 밟으며 마음껏 돌아다녔다.

 

투명 우산을 쓰고 길거리를 배회하다 들어간 식당의 밥 냄새, 캐리어와 발바닥에 마구 묻었던 흙 냄새, 비를 피하다 발견한 작은 서점의 눅눅한 냄새까지 아직도 생생하다. 마지막으로 그때 내 귀까지 들려 왔던 내 웃음소리까지. 제주에 가면 다들 이런 경험을 하게 되는 건지, 꼭 제주 여행기를 읽으면 비 온 날의 기록이 담겨 있다.


 

나도 언젠가 그 밤의 바깥에서 

한심해 보인다고 생각했던 때가 있었다.

막상 그 밤 안에 들어가자 

한심으로 엮어낼 수 없는 게 있었다.

바깥은 한창 여름을 가리키고 있었고, 

우리는 여름과 꼭 닮아 있었다.

여름은 좀 그래도 되지 않는가. 

아니 그래야 하지 않는가.

 

지금 난 여름에 있어_69p

 

 

나의 바깥에 있는 것들을 한심하게 보던 때가 있었다. 한 발짝만 나서면 찬란한 여름의 순간을 즐길 수 있는데 그 한 발짝의 변화가 무서워 머뭇거렸다. 그런데 정말 그 안에 들어간 순간, 나는 그 세상에 취했다. 덥고 비가 많이 와 꿉꿉했던 내 여름은 마침내 시원해졌다.

 

 

가끔 우리조차 꺼내 보기 

부끄러운 장면들이 있다.

흔히 흑역사라고 말하고, 

청춘이라 하고 싶기도 한 장면들이다.

언젠가 얘랑 내가 때로 

얼마나 바보 같고 순진했는지, 

그치만 얼마나 반짝이고 진실했는지,

무엇을 꿈꾸고, 

얼마나 간절했는지를 쓰고 싶다.

뭘 몰라 위태롭고 자주 휘청였던 

우리의 젊은 날을 쓰고 싶다.

 

지금 난 여름에 있어_101p


 

좋은 걸 보거나 맛있는 걸 먹으면 생각나는 사람이 있다. 순간의 마음을 선물하고 싶어지는 사람이 있다. 함께 어디론가 떠났을 때 계획적인 MBTI J 유형인 나를 즉흥적인 P 유형으로 만들어 버리고, 겁이 많은 나를 대담한 도전으로 이끄는 사람이 있다.

 

생소한 몽골로 떠난 두 친구의 이야기를 읽으며 내가 누군가와 함께 보냈던 여름들이 생각났다. '청춘'이라고 입 밖으로 소리내기에는 머쓱하지만, 함께 보낸 시간은 '청춘'이라는 단어 없이는 설명할 수 없는 충만함이었다. 함께이기에 가능했고, 나와 다른 너였기에 가능했던 감사한 시간들.


 

벽을 두는 건 나 좋자고 하는 일이었다.

덜 힘드려고 닫아 버리니까 되려 그게 쉬웠다. 

이상하게 허했지만 말이다.

힘들지라도 상상 이상의 것을 얻기도 하는 게 

마음을 주는 일이었다.

 

지금 난 여름에 있어_108p

 

 

마지막 장의 제목은 '행복이 말이 되는 순간'이다. 어떻게 보면 당연한 말이지만, 내게 행복이 말이 되는 순간은 정말, 정말 행복한 순간이다. 책에 쓰인 바와 같이 나는 '행복'이라는 말을 많이 아꼈기 때문이다.

 

조금 강해 보이고 싶을 때도 있었다. 만만하게 보였다가 뒤에서 당할까, 쉽게 보일까 겁이 났다. 혹은 섣불리 행복했다가 쉽게 무너질까 무서웠다. 하지만 굳이 애쓰지 않아야 했다. 나는 혼자 있고 싶으면서도 함께이고 싶어 불안했고, 함께 하니까 비로소 내 행복은 말이 되었다. 마음속에만 있던 게 말이 되니 오히려 분명해졌다. 그리고 행복한 나 자신이 더 좋아졌다.

 

매년 여름의 새 아름다움을 느낀다. 그리고 난 그 안에서 더 아름다운 빛깔로 여름의 한순간 한순간을 남기고자 한다. 내게는 아직 느껴 보지 못한 여름이 많다. 마침내 나는 여름을 기대하게 됐고, 여름을 후회 없이 보낼 준비가 되어 있다. 이 책으로 마침내, 내 여름의 예열이 완료되었다.

 

 

[이건하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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