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가을을 기다리며 - 500일의 썸머[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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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당 글에는 작품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을 수 있습니다.
* 글을 읽기 전 영화 <500일의 썸머>를 감상하고 오시길 권합니다.
겨울의 시작
찬바람이 불고, 사람들이 롱패딩을 꺼내입는 계절이 되었다. 나도 따라서 롱패딩을 샀다. 올해는 유독 추위를 많이 타는 것 같다. 겨울이다. 겨울이 끝난줄도 모르게 한 해가 지나고 다시 겨울이 찾아왔다. 추웠던 날들에서, 다시 추워지기까지 그 사이의 날들은 어디로 가버린 걸까. 왜인지 나에게는 요즘의 날들이 기나긴 겨울의 연장선만 같다.
벌써 12월의 막바지에 접어들었다. 곧 다가올 크리스마스가 지나면 또 한 해가 간다. 시간이 정신 없이 흘러가는 동안 많은 일들이 있었다. 1년을 살았다는 안도감과 빠르게 흘러가는 시간에 대한 불안감, 다가올 내일의 기대가 뒤섞인다. 그간 바빴던 일들을 마무리하고 전기장판 위에서 귤을 까먹고 있으려니 왠지 아쉬운 기분이 든다. 한 해를 마무리하며 돌아보니 계절에 대한 감각이 없다. 따스한 봄의 기억도, 뜨거웠던 여름의 기억도, 서늘했던 가을의 기억도 없다. 계절의 변화를 느끼지 못할만큼 바빴던 날들이었다.
책과 영화는 언제나 내가 세상을 만나는 창이다. 바빴던 한 해를 달래는 마음으로 오늘은 계절과 관련된 영화 한 편을 골라본다. 계절을 떠올리다보니 문득 이 영화가 떠오른다. 로맨스 영화의 명작 <500일의 썸머>다.
그 여름을 돌아보며
좋은 영화일수록 여러번 돌려보게 된다. '여러번 돌려보게 만드는 영화인가?' 하는 질문은 좋은 영화를 판단하는 기준 중 하나일 것이다. 콘텐츠가 끊임없이 흘러나오는 요즘 같은 시대에서 사람들의 이목을 끌고 여러 번 보게 만들 수 있다면 대단한 일이다. 감동을 줬거나, 형식적으로 잘 만들어진 영화라는 의미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같은 장면에서 다른것을 보게 만드는 영화들이 있다. 이 영화가 바로 그런 영화다. 누구의 시선으로 보느냐에 따라 장면들의 의미가 달라지는 영화이기 때문이다. 썸머와 톰의 사랑이야기를 그려내는 이 영화에서, 어떤 관점에서 그녀는 나쁜X으로 보이고, 어떤 관점에서는 그렇지 않다. 영화 개봉후 한동안 '썸머는 나쁜X인가 아닌가'하는 주제의 토론이 각종 커뮤니티에서 일었던 것도 이러한 사실을 방증한다.
로맨스 서사는 언제나 유효한 장르이지만 이미 해당 장르를 섭렵하고 있는 대상층에게는 뻔하고 예상가능한 클리셰로 첨절된 장르이기도 하다. <500일의 썸머는>이런 상투성을 깨기 위해 노력한다. 첫 장면으로 등장하는 488일이 대표적이다. 둘은 즐겁게 대화를 나누는 듯 보이고, 반지낀 손이 겹쳐져 보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둘이 관계에 어려움이 있더라도 결말에는 잘될거라는 오해를 가지고 작품을 바라보게된다. 그러나 서사가 진행되며 조금 다른 양상이 펼쳐진다. 로맨틱 코미디 장르에 익숙해져서 일반적으로 작품의 서사를 쉽게 예상할수 있게 된 관객들에게 혼란을 줘서 최대한 스토리 이해를 지연시키고 낯설게 만드는 전략이다.
이 작품은 주인공 남자인 톰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연애를 그려낸다. 순서가 뒤죽박죽으로 재배치된 장면은 톰이 연애를 자기가 보고싶은 관점에서 보고 있다는 것을 암시해주는 장면들로 이루어져 있으며 톰의 입장에서 그들의 연애를 따라가며 관객이 무엇이 잘못됐는지 깨닫기가 어렵도록 즉, 인과관계 형성을 지연하는 방식으로 만들어져있다.
결과적으로 이 영화는 둘의 연애를 톰의 시점에서만 바라보는 오류를 만들고 관객이 톰에게 이입하도록 만든다. 감독이 의도한 대로 톰에게 이입해서 서사를 따라갈 경우 '썸머는 나쁜X'이라는 주장을 하게 된다. 그러나 영화를 여러번 돌려보는 동안 복잡하게 꼬여있는 둘의 연애 이야기 속에 여러 조각으로 흩뿌려져있는 단서들을 발견하게 되고 관객은 점차 썸머의 시점, 제 3자의 객관적인 시선에서도 둘의 이야기를 재구성하게된다. 그때서야 우리는 이 영화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이동진 평론가는 이 영화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
<500일의 썸머>는 매우 감성적이면서도 놀랍도록 이성적이고, 견딜 수 없이 사랑스러우면서도 서늘할 정도로 성숙하다. 만일 이 영화가 맘에 들지 않는다면 당신은 어쩌면 로맨틱 코미디 장르 자체를 싫어하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영화는 두 번 시작된다 - 이동진, p.478)
<500일의 썸머>는 몇 년 만에 찾아온 탁월한 로맨틱 코미디다. 이 영화의 창의적인 형식과 신선한 내용은 이 오랜 장르에 아직도 미답지가 있었음을 결과적으로 확인시켜준다. (영화는 두 번 시작된다 - 이동진, p.479)
500일의 썸머는 뛰어난 로맨스 영화이다. 이동진 평론가의 말처럼 장르 문법이 확고하고 똑같은 형식이 반복되기 쉬운 로맨스 장르에서 새로운 방식으로 신선한 충격을 준 작품이기 때문이다. 작품의 표현기법적인 측면은 다음 글에서 살펴보기로 하고 오늘은 서사와 주제를 중심으로 살펴보자.
가을을 기다리며
영화 <500일의 썸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주인공 썸머과 톰의 사랑에 대한 관점을 이해해야 한다. 톰은 운명적인 사랑을 기대하는 인물이다. 톰을 설명하는 초반 나레이션은 이렇다. “뉴저지주에서 자란 톰 한센이라는 소년은 진정한 사랑을 찾기 전까진 행복할 수 없다고 믿었다.”초반의 설명 외에도 이런 모습은 톰의 행동과 대사에서 드러난다. 여동생과의 대화에서 별거 아닌 이야기를 20분 했다는 이유로 천생연분이라고 생각하는 장면이 그렇다.
반면 썸머를 설명하는 나레이션은 이렇다. “미시간주에서 자란 썸머 핀이란 소녀는 그와 달랐다. 부모님이 이혼한 뒤부터 두 가지에 집착하게 됐다. 첫째는 검은 긴 머리였고, 둘째는 머리카락을 자를 때마다 느끼는 무덤덤함이었다.” 썸머는 부모의 이혼 이후로 운명적인 사랑을 믿지 못하게 된 인물이다. 그가 집착하는 머리는 남자를 상징한다. 애인이든, 데이트를 하는 친구사이이든 그는 계속해서 남자를 만난다. 그러나 동시에 남자에게 운명적인 사랑이라느니 하는 말이나 마음을 주지 않고, 무덤덤하게 떠나간다.
사랑에 대한 둘의 관점차이는 둘의 관계를 독특한 형태로 만들고, 결국에는 둘의 이별을 만든다. 중요한 지점은 사랑과 운명에 대한 이 둘의 관점이 변화하는 지점이다. 둘은 오래전에 함께 데이트를 하던 장소에서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게 된다. 톰은 썸머와의 이별 이후 운명과 진정한 사랑에 대해 회의감을 느낀다. 반면 썸머는 톰과 헤어진 후 새로운 사람에게서 진정한 사랑을 느끼고 결혼한다.
썸머의 설명은 이렇다. “내가 식당에서 책을 읽고 있는데 어떤 남자가 다가와 책 내용을 물었고 그이가 내 남편이야. 내가 영화를 보러 갔더라면? 다른 식당에 갔다면 어떻게 됐을까? 10분만 늦게 식당을 갔다면? 우리는 만날 운명이었던거야” 톰은 진정한 운명이라고 생각했던 썸머와의 이별때문에 사랑을 믿지 못하게 되었고, 썸머는 톰이 아닌 다른 사람에게서 진정한 사랑을 발견한다. 둘의 관점이 뒤바뀌는 이 아이러니한 상황은 이 영화의 안타까움이 극대화되는 절정부분이라고 할수있다.
썸머는 진정한 사랑을 발견했다. 톰은 어떨까? 나레이션은 이렇게 설명한다. “톰은 기적이 없다는걸 배웠다. 운명 같은 건 존재하지 않는다. 정해진 건 아무것도 없다. 그는 깨달았고 이제 확신이 생겼다.” 그리고 톰은 면접에서 만난 여자에게 데이트 신청을 한다. 그녀의 이름은 “가을” 썸머가 지나가고 찾아오는 계절이다.
운명이 없다고 생각하던 썸머는 진정한 사람을 믿게 됐고, 진정한 사랑을 믿다가 이별하게 된 톰은 운명의 상대 혹은 진정한 사랑을 찾지 못하면 행복하지 못할거라는 착각과 운명의 상대라고 믿었던 ‘썸머’가 아니면 행복해질수 없을거라는 환상에서 벗어나게 된다.
사람마다 사람의 대한 관점은 다를수 있고, 어떤 관점이 정답이라거나 더 성숙한 관점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그러나 기존의 편견과 환상에서 벗어나게 된 그들의 사랑은 한층 성숙해진것으로 보인다. 사랑에 정답은 없다. 그저 삶을 통해 성숙해질 뿐이다. <500일의 썸머>는 ‘성숙해지는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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