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대중예술에 관한 단상 [문화 전반]

글 입력 2016.12.22 1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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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의 발전에 따라 가장 크게 변화된 부분 중 하나가 바로 예술이 아닐까 싶다. 시간의 예술성. 즉 시간을 자유롭게 움직이고 조작할 수 있게 되면서 나타난 것이 바로 영화와 사진이다. 이러한 시간예술이 나타나면서 우리는 더 완벽한 상태의 대중예술을 접하게 되었다. 수채화나 유화로 그리는 손의 예술을 벗어나 현실을 완벽에 가깝게 모방하는 시간예술은 비판과 비난이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이제는 순수예술보다도 더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 받고 있다. 특히나 영화의 경우, 우리 삶에서 뗄래야 뗄 수 없을 만큼 친숙한 것이 되었고 관련한 대회나 영화제가 많아지고 주목 받게 되면서 우리는 더 이상 함부로 시간예술을 비난하거나 비판할 수 없다. 시간예술, 그러니까 영화나 사진 등의 예술들이 가지고 있는 가치를 무시하기에는 너무나 크고 방대해졌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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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마크 로스코 作, 우에다 후우코 作)


 마크로스코는 색(色)에 그의 상징성을 두었다. 삽화가로 유명한 일본의 작가 우에다 후우코는 자신의 화폭에 순수를 상징하는 여학생과 찢어진 스타킹, 붉은 금붕어를 통해 성폭행이라는 주제의식을 강조했다. 영화도 비슷하다. 우회적인 상징성은 직접적으로 말하는 것보다 더 큰 감정을 불러온다. 영화 『빌리 엘리어트』 의 경우 주인공 빌리가 사는 거친 탄광촌 사회와 우아한 발레라는 상징성을 통해 Gender적 남성성을 파괴하고 멘토의 역할을 통해 성 계몽의 의식을 보여준다. 발레수업과 권투수업이 함께 이루어지는 체육관의 모습을 보여주며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섞이지 않는 두 조합은 그들이 가진 Gender가 얼마나 견고한지 보여주는 장면이기도 하다. 『친절한 금자씨』의 경우 “금자”라는 인물을 통해 복수가 무엇인지, 복수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지 고찰할 수 있도록 관객을 이끈다. 이처럼 상징은 어쩌면 배우의 대사나 장면효과보다 더 큰 의식을 드러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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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케빈에 대하여』 中)


 가장 좋아하는 영화를 이야기하고 싶다. 린 램지 감독의 『케빈에 대하여』는 우울하고 외롭지만 끝내 등을 돌릴 수 없는 영화다. 감독 특유의 섬세한 연출과 극적인 색을 통한 감정선의 변화 같은 것들은 『그랜드 부다 페스트 호텔』 보다 더 강렬한 색감을 보여준다. 많은 사람들은 임신과 출산을 희망 혹은 기적이라고 말한다. 새로운 생명을 잉태하고 세상으로 그 아이를 내놓는 것. 그런 다음에 좋은 아이로 만들기 위해 교육하고 가르치는 것. 우리는 이것을 모성애라고 불러왔다. 이 모성애는 아이를 잉태하는 순간부터 생기는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램지는 이러한 편협적인 시각에 대해 의문을 던진다. “모성애 말이야, 정말로 천부적인 걸까?” 하고.

 에바는 여행가이자 모험가이다. 그녀는 도전을 사랑하고 열정을 즐긴다. 집에 박혀 영화를 보는 것보다 밖으로 나가 직접 영화를 만드는 것을 더 즐기는 그런 여성이다. 축제의 열기보다 뜨거웠을 밤을 보낸 그녀에게 탄생과 함께 상실이 찾아온다. 바로 케빈의 존재이다. 그녀는 부른 배가 어색하고, 부담스럽다. 한 아이의 엄마로 지내기에 그녀는 하고 싶은 것도, 해야 할 것도 많다. 그런 그녀가 아이 때문에 모든 것을 포기하는 상황은 그녀에게 있어 악몽과도 같을 것이다. 그녀에게 케빈은 축복이지만 동시에 그녀 자신을 잃는 상실의 매개체다. 그래서 그녀는 케빈을 케빈으로서 사랑할 수 없다. 그녀의 인생을 상실하게 만든 주범이기 때문에.

 에바는 케빈을 사랑하기 위해 “노력”한다. 자신의 아이를 사랑하기 위해 노력하는 엄마가 세상에 어디 있을까? 이 의문은 영화를 관통하는 첫 번째 화살이다.

 그녀는 부단히 노력한다. 케빈과 공을 가지고 놀고 케빈을 안아 다독이기도 한다. 그리고 케빈은 알아차린다. 엄마가 자신을 사랑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것을. 아이에게 있어 자신을 사랑하기 위해 노력하는 엄마라니. 아이가 에바를 엄마로 받아들이고 그녀의 노력에 맞춰 그녀를 사랑할 수 있을까? 장담컨대 아이는 본인을 목적으로 하는 사랑과 애정을 갈구할 것이고, 그녀는 그 사랑과 애정을 만들기 위해 또 다시 노력할 것이다. 결국 둘의 관계가 틀어진 데에는 둘의 잘못이 아닌, 모성애 자체를 천부적인 것으로 치부하는 사회와 인식에 있다. 어쩌면 케빈이 여동생의 눈을 잃게 한 것도, 아빠와 동생의 목숨을 잃게 한 것도 모두 그녀에게 사랑 받기 위해서 일지도 모른다. 에바가 너무나 사랑하는 두 사람을 없앰으로써 자신이 사랑 받을 수 있다는 생각 때문에. 아니, 애초에 케빈은 그녀가 사랑하는 모든 사람을 없애고 그녀에게 미움 받기를 원했을 지도 모른다. 케빈 자신이 평생을 그렇게 살아왔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영화는 시종일관 우울하다. 이 영화를 본 기분은 고등학교 시절 박형서 작가의 『노란 육교』를 읽었던 때와 비슷하다. 담담한 슬픔, 참을 수 있는 고통스러움, 외면할 수 없는 불쾌감. 영화는 소설과 다른 의미를 전하지만 비슷한 감정을 준다. 시간예술이 사람들에게 익숙하게 받아들여진 데에는 이런 이유가 있을 지도 모른다.

 영화는 사진보다 더 많은 “순간”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다양하고 그림보다 더 직설적인 세계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불쾌하다. 김기덕 감독의 영화가 논란의 중심에 서는 이유는 외면하던 세계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데에서 오는 불쾌함일 것이다. 대중예술은 세상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점에서 기존의 순수예술과 다른 점을 갖는다. 순수예술을 세계를 그대로 보여주기 보다는 왜곡시키기를, 드러내기보다는 감추기를 주로 보였다. 그러나 대중예술은 그 틀을 깨고 우리가 외면하던 세상을 주시하고 거부했다. 틀을 벗어난 예술은 또 다시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회귀하더라도 결국 타자(他者)의 입장을 고수한다. 우리가 대중예술을 사랑하는 이유 역시 이것이다.

 대중예술이라는 이름에는 굉장히 많은 종류가 존재한다. 단언할 수 있는 것은 시간이 지나고, 기술이 발전할수록 대중예술은 더 넓은 대지로 나아갈 것이라는 점이다.




[김나영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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