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insight

아트인사이트에게
문화예술은 '소통'입니다.

[Opinion] 물속에 가라앉은 피아노, 타인의 땅 위의 목소리 [영화]

제인 캠피온 '피아노'와 레일라 슬리마니 '타인들의 땅', 그리고 광장

by 서지민 에디터
2026.11.04 11:36
이 브라우저에서 최근 읽은 글입니다.
      이전에 읽던 글입니다.

      가르치는 소리 


       

      11da6a07-f44d-42b4-8fc8-48bb503fc572.jpg

       

       

      유럽 전역에 퍼지고 있는 학생 시위 물결로 교환학생 커뮤니티도 뜨겁다. 프랑스, 포르투갈, 독일, 이탈리아, 스페인 친구들의 인스타그램 스토리는 혁명 관련 게시물로 가득하다. 프랑스에서 큰 시위가 예정되어 있던 10월 17일, 친구들은 지금이라도 돌아가서 시위에 참여해야 하는 거 아니냐며 들썩였다. 시험 기간이라 함께 도서관에 앉아 공부하면서, 시위를 향한 극우 정치인의 무례한 영상을 틀어놓고  그들을 비판하며 농담을 주고받기도 했다. 겉으로는 신나고 밝아 보였지만, 그 웃음 밑에는 분노가 잔잔히 깔려 있었다. 일상적인 동시에 굉장히 폭력적인 장면이라, 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다.


      57966286.jpg

       

       

      모로코 출신으로 프랑스에서 대학을 다니는 친구의 표정도 오래 남았다. 뉴스에서 '모하메드 아웃'이라는 조롱 섞인 말로 자기와 닮은 사람들에게 나가라고 외치는 극우 정치인을 보면서도, 그는 익숙하다는 듯 별다른 반응을 하지 않았다. 그때 나는 마침 다음 날 수업을 위해 공쿠르상 수상 작가 레일라 슬리마니의 『타인들의 땅』을 영어 번역본으로 읽던 중이었다. 프랑스 식민 지배 아래의 모로코를 배경으로, 프랑스 여자와 모로코 남자의 결혼을 그린 소설이다. 책 속의 시대는 이미 오래전에 끝났지만, 그 시대가 남긴 문제는 친구의 무표정한 얼굴 위에서, 뉴스 속 내 또래 프랑스 학생들의 얼굴 위에서 여전히 이어지고 있었다. 프랑스와 모로코의 역사를 잘 몰라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 소설과, 지금 진행 중인 프랑스어 뉴스가 겹쳐 보이면서 기분이 이상했다. 잘 모르는데도 어딘가 우리와 닮아 있어서 알 것 같다는 감각, 이 혼란스러운 상황이 너무나 내 일상과 맞닿아 있다는 감각을 우리의 공용 지대인 영어로 친구들에게 애써 설명해보려 했다.

       

       

      스크린샷 2026-11-03 20.34.42.png

       

       

      친구들의 목소리가 내 알고리즘에도 영향을 준 건지, 유럽 현지 시위 릴스가 잔뜩 뜨기 시작했다. 그러다 프랑스의 한 젊은 고등학생이 학생권 시위를 하는 영상을 보았다. 나는 프랑스의 역사도, 현재 정치 상황도 전혀 모르는 상태로, 거시적으로는 나와 같은 의견을 가진 것 같은, 똑 부러지고 논리적으로 자기 의견을 피력하는 금발 벽안의 소년을 보았다. 그에 대한 내 생각을 세우기도 전에 한국인들의 댓글이 먼저 쏟아졌다. 멋있다, 우리나라 소년들도 저렇게 자랐으면 좋겠다, 역시 시위의 나라 프랑스는 미래 세대를 올바르게 키우고 있구나. 우리나라로 치면 강남 보수 지역에서 진보의 씨앗이 자란 사례라며 그를 칭찬했다.

       

      이 영상에 대해 프랑스 남자아이와 이야기를 나눴다. 그는 프랑스인들은 시위하기를 좋아한다고, 시위는 자기 나라의 전통이라고, 나에게 어떻게 하는지 '가르쳐주겠다'고 농담했다. 전혀 진지할 것 없는 말이었는데, '가르쳐주겠다'는 단어에 꽂혀 뜬금없이 화가 치밀었다. 그래, 우리나라는 시위하던 윗세대가 군대에게 학살당하고 경찰한테 맞아 죽어서 '시위' 하면 한국이라는 타이틀은 딱히 없지만, 우리도 시위해. 하하, 우리를 식민 지배하려고 했던 사람들한테 어떻게 시위하는지 배우긴 어려울 것 같네. 속사포로 잔뜩 꼬인 말을 뱉어버렸다. 학생 시위에 있어서는 분명 프랑스 친구들과 같은 편에 서 있으면서도, 프랑스 시위 뉴스를 보며 어딘가 불편해 보였던, 어쩌면 내가 멋대로 읽어낸 모로코 친구의 표정이 자꾸 떠올랐다.  그는 심각함을 느끼지 못한 채 내 말에 일리가 있다며, 그래도 요즘 자기들 시위에는 코스어도 있고 밈도 잔뜩 나온다고, 세대를 내려오는 전통이라 그렇게 말한 거라고 얼버무렸다.

       


      images-32.jpeg

       

       

      그 말에 왜 그렇게 화가 났는지 집에 와서도 곰곰이 생각해 봤다. 목소리를 낸다는 건 무엇일까. 누군가의 스피커가 된다는 건 무엇일까. 가르친다는 건, 설교한다는 건 무엇일까. 누군가에게 무언가를 가르쳐주겠다고 말하려면, 먼저 내가 더 많이 알고 있다고 믿어야 한다. 그 믿음은 어디서 나오는가. 누군가를 가르칠 때에는 내가 상대보다 위에 서 있다는 감각이 깔려 있다. 가르친다는 행위는 생각보다 자연스럽게 선민의식에서 나온다. 그렇다면 누가 선민이 될 자격을 가지는가. 가르침을 받는 쪽에 선다는 건, 어쩌면 내가 무엇을 알고 무엇을 모르는지를 남이 정하도록 내버려 두는 일이다. 무엇이 옳은지, 어떻게 말해야 하는지, 언제 입을 열어야 하는지를. 그건 지배받는 일과 얼마나 다를까. 식민 지배는 늘 가르침을 명분으로 다가왔다. 더 나은 질서를, 더 문명화된 삶을 가르쳐주겠다는 얼굴로. 그러나 그 질서와 교육이 우리를 위한 것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될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아니라고 말하는 것뿐이다. "잘은 모르겠지만, 이건 아니잖아. 못 참겠다." 시위는 거기서 시작되는 게 아닐까.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위해 싸워야 하는가. 우리가 무언가를 배우는 건 남을 가르치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 목소리로 말할 자리를 되찾기 위해서가 아닐까.

       

       

       

      피아노 소리


       

      images-33.jpeg

       

       

      제인 캠피온의 '피아노'에서 에이다는 말을 잃은 사람이다. 여섯 살 이후로 입을 닫은 그녀는 딸 플로라의 입과 손짓, 그리고 피아노로만 세상과 이야기한다. 19세기, 에이다는 얼굴도 모르는 남자 스튜어트와 결혼하기 위해 딸, 피아노와 함께 뉴질랜드로 건너온다. 그러나 남편은 무겁다는 이유로 피아노를 해변에 버려둔다. 목소리 대신이었던 피아노는 그렇게 그녀에게서 떨어져 나간다.

       

       

      The-Piano-8.jpeg

       

       

      에이다와 플로라는 베인스의 도움으로 해변으로 내려가 피아노를 친다. 벽도 문도 없는 곳, 누구의 땅도 아닌 곳에서 에이다는 처음으로 아무에게도 허락받지 않고 소리를 낸다. 파도 소리 위로 건반 소리가 쏟아진다. 엄마가 건반을 두드리는 동안 딸은 모래 위를 뛰어다닌다. 엄마의 말을 가장 먼저 알아듣는 사람이 그 소리 안에서 논다. 입을 닫고 살던 사람이 오랜만에 재잘재잘 떠든다. 아무도 소유하지 않은 자리에서, 소리들이 자연스럽게 울려 퍼진다.

       


      The Piano.jpg

       

       

      그 소리에 붙들린 건 이웃 베인스다. 원주민들 사이에 섞여 살아 이주민들에게는 거칠고 무지한 사람 취급을 받는 그는, 그 피아노를 사들임으로써 자신의 결핍을 메우고자 한다. 그는 스튜어트에게 땅을 내주고 피아노를 가져가며, 에이다에게 레슨을 받는 조건을 단다. 그러나 이름이 레슨일 뿐, 그 시간 동안 가르치는 사람은 에이다가 아니다. 영화 내내 에이다가 누군가를 가르치는 자리에 설 수 있는 건 피아노를 칠 때뿐이고, 그마저도 피아노라는 땅을 가진 사람이 허락할 때뿐이다. 그래서 딸인 플로라는 그 집 밖으로 밀려나고, 더 이상 엄마의 피아노를 들을 수 없게 된다. 들을 기회를 빼앗긴 아이는 점점 새아버지 쪽으로 기운다. 어머니의 지배자이자 어머니의 목소리를 묵살하는 사람을, 결국 아빠라고 부르며 그 세계로 편입된다.

       


      maxresdefault.jpg

       

       

      하지만 베인스는 피아노를 자기 집 안으로 들이면서, 사실 에이다를 자기 땅 안으로 들인 셈이다. 이렇게 남의 땅 안에 놓인 에이다는 조용히 자신만의 땅따먹기를 한다. 레슨 한 번에 건반 하나. 에이다가 그의 집에 올 때마다 피아노가 건반 하나씩 그녀에게 돌아간다. 무언가를 들이고 가르침을 받을 조건을 걸 때, 혹은 누군가를 가르치려 할 때에는 상대에게 먹힐 각오도 해야 하는 법이다. 베인스는 이 점을 알았을까. 땅따먹기는 시간이 갈수록 에이다 쪽으로 승기가 기운다. 피아노 소리를 듣는 법을 배워가는 사람 곁에서, 에이다는 건반 하나에 목소리 하나를 되찾는다. 그녀가 설 자리가 조금씩 넓어진다. 처음에 베인스가 쥐고 있던 주도권은 어느새 에이다의 손끝에서 연주된다.

       


      The-Piano-13.jpeg

       

       

      그녀의 유일한 목소리는 피아노를 치는 것이다. 그러나 그 피아노는 해변에 버려지고, 팔리고, 거래된다. 목소리를 잃은 사람에게 남은 단 하나의 말하는 방법조차, 누군가의 소유가 된다. 목소리는 이렇게 사람이 무언가를 자기 것이라 외칠 수 있게 하는 힘이다. 그래서 건반 하나씩 되찾아오는 일은 결국 말하는 방법을 되찾는 일과 일맥상통한다.

       

       

       

      광장의 소리


       

      image-c94d114f-19d1-4d01-9744-32c156ee3ccb.png

       

       

      2년 전 우리나라도 탄핵 시위를 겪었다. 대학교 시험 기간이었던 나는 8년 만에 다시 광장으로 나갔다. 시위로 자식과 형제를 잃어본 윗세대의 부모님들에게서 두려운 목소리로 전화가 걸려왔다. 몇몇 친구들의 부모님은 안전 문제로 광장에 나가지 말라고 했다. 우리에게는 먼저 때리면 경찰이 우리를 폭력으로 진압할 정당성을 준다는 공포가 있다. 그래서 촛불을 들기를 택한다. 하나의 촛불은 약하지만 모이면 횃불이 된다는 마음으로. 그 겨울 광장에는 2030 여성들이 큰 비중을 차지했다. 가지고 있는 빛나는 물건을 가지고 나와 함께 흔들며 다 같이 노래를 따라 불렀다.

       

      시위가 끝난 뒤, 슬프게도 여성들의 목소리는 크게 평가받지 못했다. 나는 광장 무대에서 논리적이고 힘 있게 군중을 이끌던 여자 응원단장의 목소리를 기억하는데도, 정치인들은 여자들이 많은 도움을 줬다고 말하며 그들의 의견을 다음 대선에 크게 반영하지 않았다. 여성들은 든든하고 안정적인 지원군, 눈이 오는 와중에도 묵묵히 자리를 지키던 사람들로 묶여 뭉뚱그려졌다. 몇몇 진보 성향의 정치인은 시위에 여성들이 많으니 연애하고 싶으면 시위에 나오라는 말을 했다가 SNS에서 크게 비판을 받고 금세 조용해졌다.

       


      The-Piano-18.jpg

       

       

      광화문에 가면 한국에서 흔히 보기 어려운 공용 피아노가 놓여 있다. 피아노를 칠 줄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앉아서 칠 수 있다. 우리에게 시위는 그런 기회였다. 누구의 것도 아닌 자리에 앉아, 누구든 소리를 낼 수 있는 기회. 그 겨울 우리는 분명 소리를 냈다. 노래를 불렀고, 구호를 외쳤고, 마이크를 잡았다. 그런데 우리가 집으로 돌아가자, 그 소리는 배경음이 된 것도 아니었다. 그냥 아무도 듣지 않았다. 해변에 놓였던 피아노가 베인스의 집에서 잠깐 에이다의 것이 되었다가, 끝내 바다 밑으로 가라앉은 것처럼.

       

       

       

      누구의 목소리를 듣는가


       

      스크린샷 2026-11-03 20.54.53.png

       

       

      다시 스크롤 창에서 빠르게 넘어간 프랑스 남학생의 얼굴로 돌아간다. 똑똑하고 지성 있고 맞는 말을 하는 그 학생의 얼굴로, 우리나라로 치면 부유층이 모여 사는 동네에서 진보적이고 논리적으로 기성세대를 비판하는 그 학생을 향한 칭찬 세례로. 이 글은 그 학생을 끌어내리려는 게 아니다. 그 또한 인터뷰에서 미디어의 시선을 비판했다. 자신이 백인이고 문화 자본을 가진 사람이라 카메라 앞에서도 말할 수 있는 거라고 스스로 짚으며, 정말 주목받아야 할 건 자기가 아니라 방리유, 취약한 환경에 있는 학생들의 목소리라고 말했다. 이 글은 같은 목소리도 목소리로 취급받지 못하게 만드는 것들에 대해 생각하려는 것이다. 누구의 목소리를 듣는가. 무엇을 말하느냐보다 누가 말하느냐가 먼저 중요해지는 것에 대해.

       

      시위의 나라라고 불릴 수 있다는 것, 얼굴을 공개하고 마이크를 잡아도 신원에 문제가 생기지 않는다는 것은 하나의 특권이다. 권리를 위해 싸울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이미 어떤 안전에서 나온다. 식민 지배를 당하지 않은, 큰 키, 백인, 금발, 파란 눈의, 진보 성향의 시위에 나가는 프랑스인 친구. 그리고 식민 지배를 받은 나라 출신의, 작은 키의, 아시안의, 검은 머리와 검은 눈을 가진 사람. 둘이 같은 말을 해도, 한쪽은 가르치는 사람이 되고 한쪽은 배워야 하는 사람이 되는 씁쓸한 현실이 보인다.

       

      '피아노'의 배경도 식민지다. 스튜어트는 마오리족의 땅을 사들이려 하고, 영국에서 건너온 이주민들은 자기들이 가져온 질서를 이 땅에 심는다. 피아노도, 레슨도, 결혼도 모두 그 질서 안에서 거래된다. 『타인들의 땅』의 마틸드도 비슷한 자리에 서 있다. 프랑스에서 모로코 남자와 결혼해 남편의 땅으로 건너온 그녀는, 식민 지배를 하는 나라에서 왔으면서도 그 땅에서는 이방인이고, 집 안에서는 남편의 뜻을 따라야 하는 아내다. 에이다도 마찬가지다. 남의 땅에 들어온 이주민이면서, 남편의 땅에서 목소리를 빼앗긴 여자. 지배하는 쪽에 속해 있으면서도 그 안에서 다시 말할 자리를 잃는 사람들이다. 결국 이 이야기 속 모두가 타인의 땅 위에 서 있다. 말하지 않는 여자와 땅을 빼앗기는 사람들은 같은 자리에 서 있다. 둘 다 말을 하지만, 그 말을 들어주는 사람이 없다.

       


      images-35.jpeg

       

       

      에이다는 결국 베인스를 따라 가기로 한다. 피아노 건반 하나를 뽑아 그 위에 글을 새기고, 플로라에게 전해달라고 맡긴다. 그러나 플로라는 그 건반을 베인스가 아니라 스튜어트에게 가져간다. 엄마의 입이 되어주던 딸이, 엄마의 목소리를 엄마를 소유하려는 남자의 땅이 되어버린다. 엄마의 피아노를 더 이상 듣지 못하게 된 아이는, 엄마의 말을 옮기던 입마저 그 질서에 내주고 만다. 스튜어트는 도끼로 에이다의 손가락을 자른다. 피아노를 치는 손가락, 그녀가 말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을. 목소리를 잃은 사람이 겨우 찾은 땅마저 잘려 나간다.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 목소리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 소리를 내는 게 의미가 있기는 할까. 안 들리는 것만큼 비참한 일이 없다.

       

       

       

      물속에 잠긴 소리


       

      영화피아노결말,홀리헌터,하비케이틀,샘닐,안나파킨,골프치는고양이54.JPG

       

       

      에이다는 베인스와 함께 뉴질랜드를 떠나는 배 위에서 피아노를 바다에 버리라고 한다. 피아노가 물속으로 떨어지는 순간, 그녀는 피아노에 묶인 밧줄에 발을 넣고 함께 바다 밑으로 끌려 들어간다. 하나뿐이던 목소리를 잃은 사람이, 그 목소리와 함께 사라지기를 선택한다. 그런데 깊은 물속에서 에이다는 발을 빼낸다. 피아노만 바닥으로 가라앉고, 그녀는 물 위로 올라온다. 그리고 새로 만든 금속 손가락으로 다시 건반을 누르고, 조금씩 말을 배운다. 하나뿐이던 말하는 방법을 잃은 자리에서, 다른 방법으로 다시 말하기 시작한다.

       

       

      The-Piano-17.jpeg

       

       

       

      물밖의 목소리


       

      2020-08-18_04.58.24.jpg

       

       

      지금 우리의 목소리도 그 물속에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광장에서 낸 소리가 아무에게도 닿지 않을 때 물 속에서 소리치는 기분이 든다. 그래도 에이다가 물 위로 올라왔듯, 언젠가는 세상에 목소리가 들릴지도 모른다.

       

      시위 또한 그렇다. 시위의 본질은 결국 들어달라는 것이다. 너무 오래 들리지 않았던 목소리가 더 크게, 거칠게 터져 나오는 순간들이다. 지금 프랑스 시위에는 다양한 인종의, 다양한 배경을 가진 아이들이 함께 나와 있다. 그런데 일부 언론들은 시위를 이민자들의 폭동이라고 보도하는 극우 보도를  선택적으로 옮긴다. 사람은 나고 자란 곳에서 교육받을 권리가 있다. 그럼에도 같은 광장에서 같은 말을 해도, 누구의 얼굴은 칭찬받고 누구의 얼굴은 폭동이 된다. 우리가 촛불을 든 것도, 먼저 때리지 않으려고 이를 악문 것도, 응원봉을 흔들며 노래를 부른 것도, 모두 같은 말을 하기 위해서였다. 우리를 들어달라. 무엇을 말하는지를 들어달라.

       

      가르쳐주겠다는 말이 불편했던 건, 그 말이 내 목소리를 들으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미 정답을 가진 사람은 듣지 않는다. 피아노를 칠 때만 가르치는 사람이 될 수 있었던 에이다처럼, 우리도 소리를 낼 때만 겨우 사람이 된다. 그래도 난 살아있는 한 소리를 믿는다. 피아노가 물속에 가라앉아도, 손가락이 잘려 나가도, 금속 손가락으로 다시 건반을 누르는 에이다처럼 우리는 다른 방식으로 말하는 법을 찾아갈 것이다. 광장에서든, 그 바깥에서든. 그래서 계속 소리를 낸다. 들리지 않아도, 들릴 때까지.

       

       

      이 이야기는 어떠셨나요?

      서지민 에디터의 인기글

      많이 읽힌 글 3편
      1. 01 [Opinion] 청소년 관람불가 청소년 시리즈 '스킨스'와 '유포리아' [드라마/예능]
      2. 02 [Opinion] 거북이를 죽일 시간 [드라마/예능]
      3. 03 [Opinion] 키 재는 벽, 성장의 기록이자 경험의 완성 [공간]
      <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