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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예술을 함축한 시선

끝을 모르고 도래하는 '바라봄'

by 유민 에디터
2026.11.02 14: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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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학과지성 시인선 R의 열세 번째 시집 『마라나, 포르노 만화의 여주인공』은 시인 박상순의 산문으로 끝을 맺는다. 이때 그의 산문 「그림 카드와 종이 놀이」는 시인이 자신의 시세계에 덧붙이는 부언임과 동시에 그 너머 어딘가에 또 하나의 열린 세계가 매섭게 도래하고 있음을 알리는 단초로서 기능한다.

          


      모든 예술가에게 한 가지 의무가 있다. 그것은 자신에 대한 의무이다. 예술은 철저히 자기 자신으로부터 출발하는 것이다. 스스로가 잃어버린 것과 얻은 것들을 다시 버리고, 또 버리면서 마침내 최후의 결사처럼 남겨진 것들을 통해 그 누구도 풀 수 없는 자신의 문제를 최초의 바탕으로 삼아야 한다.
       

         

      그러나 세계는 예술가 자신조차 그와 같은 문제를 풀 수 없으리라는 비정한 선고로부터 열린다. 해체 이후의 재구성을 해체하는 작업이 기호의 해방을 지시하지 않듯이, 다만 무엇을 반복해서 내다버릴 뿐이다. 그러한 이유로 최초의 바탕이란, 시작부터 어긋난 길이라기보다는 가능성과 불가능성의 잠재적 공명에 가깝다.

       

      나는 근래 예술을 바라보는 시선에 대해 에세이를 작성할 일이 있어서 그와 관련된 책을 이것저것 들춰보며 퍽 오랜 시간 망상을 했다. 망상을 거꾸로 뒤집으면 상망, 상망에는 '서로 바라보다'라는 뜻과 '일이 이루어지기를 기대하다'라는 뜻이 있다. 나는 두 가지 의미를 번갈아가며 보다가 문득 엉뚱하게도 망상과 상망을 동의어처럼 느꼈다. 서로가 은밀하게 맞닿아있는 지점으로부터 한쪽이 벗어나려고 하면 다른 한쪽이 상대를 붙잡아 끌어당김으로써 둘 사이의 교집합을 이루는 움직임을 떠올렸다. 끝없이 자리를 이탈하고 다시 제자리로 회귀하는 움직임을 거듭하며 역설적이게도 동일한 범주 속에 자리하게 되는 관계.

       

      나는 분명 에세이에서 작품과 감상자 사이의 관계를 비대칭적으로 상정했지만, 글을 쓰는 와중에도 논지를 벗어난 여타의 관계들을 나도 모르게 상망하고 있었던 듯하다. 모리스 블랑쇼가 일찍이 예거했던 오르페우스의 시선을 끌고 들어와 예술을 논했던 나의 에세이는 빛바랜채 다시 버려지고 있다. 아직도 버릴 것이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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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용자가 어떤 구조적 관점에 놓일 때, 작품은 항상 배타성을 지닌다. 배타성 내에서 예술적 대상은 비로소 이타화될 수 있다. 여기에 의지가 개입한다. 그러나 의지의 개입을 자의적으로 차단할 때 한편으로 예술은 고유성(최소 단위의 정체성)을 성취한다. 고유성은 의지의 발동을 호소한다.
       

       

      여전히 불가능한 교집합이며 여전히 시선이 개입한다. 시선이 예술을 함축한다. 왜 우리는 '예술하기'를 멈추지 못할까? 시선을 거둘 수가 없기 때문이다. 열린 세계가 도래하는 곳에 시선이 가닿는 것이 아니라 시선이 머무는 곳에 세계가 비로소 열리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세계는 또한 여전히 배타적이다.

       


      바람이 지나갈 때마다 지형이 바뀐다. 어제 읽은 이 모래의 책의 내용은 잊은 지 오래다. 오늘은 오늘 나름의 일용할 고통이 있다. 넘어야 할 모래 산맥이 가없다. 모래 벌판이 가없다. 아래쪽이 고요할 때도 위는 언제나 흩날린다. 조용히 미끄러져 내린다. 물집이 부푼다.

       

      - 박혜순, 『여자짐승아시아하기』, p.165
       

       

      날마다 바뀌는 지형이 나를 시선의 감옥에 가두었다가 어느새 슬그머니 해방한다. 어차피 내일이면 다시 수감될 신세이기에 모래 벌판의 지평선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고통이 되는 것이다.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은 바뀌지 않는데 고통은 오늘 나름의 고통으로 도래한다. '한쪽'과 '다른 한쪽'의 대당 관계가 지형을 따라 바뀌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부푼 물집에 함축된 고통이다.

       

      아직도 예술을 더 바라보고 싶다. 글쓰기가 고통이 된다. 시선에는 의지가 개입한다. 하지만 무엇인지도 모를 예술의 고유성이 글쓰기의 중지를 호소하는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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