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예술로 산책] #9. 아무튼, 예술로 산책

어쩌다, 우연히 마주친 예술조각들로 아무튼, 즐거운 산책길이 되길 바라며.
글 입력 2022.01.31 1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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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릉역 포스코 센터에서

 

 

연말을 무사히 보내고 다시 연초가 시작되면 자연스럽게 모든 일의 시작을 떠올리게 된다. <어쩌다, 예술로 산책>글을 시작할 때 즈음 예술이라는 다양하고 불완전한 경계에서 ‘삶의 자극제’ 같은 알 수 없는 긍정적인 힘을 느낀 나는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졌다. ‘예술의 쓸모란 무엇인가.’ 그 질문에 나는 ‘오히려 예술이 없는 삶을 떠올리기 힘들다’라고 답했다.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이어지다 보니 자연스레 삶이 예술이 되고, 예술이 삶이 되기를 꿈꾸었다. 경계 없이 예술을 향유하고 싶었다. 시간과 공간의 경계 없이, 향유하는 예술의 장르나 형식의 구분 없이. 일상에서 접하는 작고 무용한 것들이 예술적으로 느껴지는 순간을 겪는다면 기꺼이 작은 예술의 스파크라도 전하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스쳐 지나갈 수도 있는 작은 것들에도 ‘예술적’인 시선을 곤두세워야 했는데, 이는 무수한 경험으로 축적되는 감각이라 생각했다. 많이 보고, 듣고, 느끼고, 사유하며 쌓이는 감각. 안에서만 머물 것이 아니라 바깥으로 향해야 했다. 걷고 또 걸었다.

 

부지런히 걷다 보면 하루에 2만 보는 그냥 넘겼다. 예상치 못한 길목에서 발견한 벽화를 따라 걸은 걸음, 무작정 걷고 싶은 동네를 딱 짚어내어 하루 내내 작정하고 걸은 걸음, 그리고 꼭 보고 싶었던 전시를 향유하며 뜻밖의 발견으로 즐겁게 걸은 걸음도 있었다. 평소에 자주 가던 카페에서 그날 유독 전등이 눈에 띄었고, 우연히 들른 갤러리에서 만난 미술 작품과 작가님은 멋졌다. 모두 스리 스치듯 우연히 맞닿은 크고 작은 ‘예술 조각’들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조각들이 펼쳐진 거리가, 모인 공간이, 그리고 갤러리들이 한데 모여 이루는 동네 자체가 또다시 하나의 큰 ‘예술 집합체’를 만들어냈다.

 

그러나 막연하게 즐거웠던 것만은 아니었다. 때로는 부담스럽고 지칠 때도 있었다. 특히 어느 순간부터 특정한 동네에 한정하여 어쩌다 우연히 마주하는 예술 조각을 찾아내기 위해 애쓰는 모습을 보며 더이상은 안되겠다 싶었다. 애초에 목적 없이 떠난 길 위에서 우연히 예술과 맞닿는 순간이 좋아서 나 홀로 시작한 산책길이었기에, 다시금 초심을 다잡는 마음으로 우연한 예술로 산책길의 즐거움을 되찾고 싶었다.

 

그래서 이번 아홉 번째 이야기부터는 변주를 주기로 했다. 어느 특정한 동네의 예술 조각을 탐색하는 것이 아닌, 한 달을 부지런히 걸어오며 생각지도 못한 순간에 시선을 사로잡은 그날의 특별한 사연이 담긴 예술 조각을 소개한다. 어쩌면 한 달 끝에 모인 예술 조각들이 위치한 곳은 다양할지도 모르겠다.

 

모든 여정의 시작은 ‘어쩌다’, 예술로 산책길을 걷기 시작하였으나 그 끝은 ‘아무튼’ 예술로 산책길로 마무리 지으며 즐겁기를 바란다. 당연하게 스쳐 지나왔던 길을, 곳곳에 놓인 예술 조각들로 인해 새로운 시선과 마음으로 걷게 된다면 그것만큼 즐거운 일은 없겠다. 더 많은 사람들이 아무튼 예술로 산책길을 걷기를 바라며 앞으로 산책자의 걸음은 계속된다.

 

뚜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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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예술로 산책》은 한 달간 부지런히 걷다 우연히 마주쳐서 좋았던 일상 속 예술 조각 또는 흔적들을 모아 소개하는 월간 예술 에세이입니다. 예술 조각에는 필자의 시선을 사로잡은 어떤 날의 특별한 사연이 담겨있습니다.

 

어쩌다, 우연히 마주친 예술조각들로

아무튼, 즐거운 산책길이 되길 바라며.

 

*감상 포인트: 계획된 산책로는 없습니다. 정해진 목적지도 없습니다. 뜬금없이 걷기 시작할 수도, 눈에 띄는 것이 있다면 잠시 발걸음을 멈추기도, 도중에 지쳐 집으로 돌아갈 수도 있습니다.

 

 
*
 

 

어쩌다, 예술로 산책 #9.

 

◈ 이주승, <플라스틱 백신>

◈ 작가 미상의 그래피티

◈ 김성복 <바람이 불어도 가야 한다>

 

 

 

◈ 예술 조각 1: DDP 계단을 수놓은 하트 벤치

- 이주승, <플라스틱 백신>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에서 진행하는 <살바도르 달리전>으로 향하던 길이었다. 회색빛의 건물로 둘러싸인 바닥을 보며 걷는 와중에 유일하게 강렬한 색채의 뚜렷한 모양새로 존재감을 뽐내는 것이 있었으니. 바로 계단 위에 수놓은 빨간 하트 모양의 설치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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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lastic vaccine(이주승)

 

 

정면으로 보았을 때는 그냥 설치물인가 했는데, 조금 옆으로 비껴 살펴보니 파이프 형태의 의자였다. ‘서울의 밤, 서울의 빛’을 주제로 진행된 ‘2021 공공디자인 공모전’ 수상작인 ‘플라스틱 백신'(Plasic Vaccine)이다. 해당 설치물은 이주승씨가 재활용 플라스틱을 소재로 디자인한 작품으로, 빨간색 하트 모양의 바닥 그림과 벤치 10개로 구성되어 있다.

 

코로나19로 배달음식이 증가하면서 함께 늘어난 1회용 플라스틱을 재활용해 환경오염을 저감시키자는 취지로 탄생되었다. 파이프 형태로 나누어진 벤치는 DDP 방문자들의 시선과 동선을 차단하지 않으며, 계단 높이에 따라 사람들의 신체 조건에 관계없이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다.

 

강렬한 색으로 존재감만큼은 확실한 듯 보였다. 많은 사람들이 바쁜 발걸음을 옮기면서도 동시에 이 강렬한 하트를 향해 시선을 던졌기에. 사진을 찍는 사람도 있었다. 나처럼. 그러나 아쉽게도 벤치에 실제로 앉는 사람은 보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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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lastic vaccine(이주승) ©서울시

 

 

부지런히 <살바도르 달리전>을 보고 나오니 어두워져 있었다. 밤이 되면 의자뿐만 아니라 계단 전체에 조명이 들어온다. 낮의 칙칙하고 차가웠던 회색빛 계단이 훨씬 화려하고 따뜻한 분위기 속에서 밝게 빛나는 순간이다. 다만, 전시실 안 어두운 실내에 오래 머물러 있어서인지  무방비로 쏘아대는 빛의 폭격기에 몸 둘 바를 모르는 듯 연신 눈을 깜빡였다.

 

눈이 즐거운 건 좋지만 과할 만큼 눈부신 탓에 찰나의 순간 ‘이 모든 계단을 반짝이기 위해 얼마나 오래, 많은 전력을 소비하는 걸까’하는 현실적인 질문이 훅 떠올랐다. 이내 발걸음을 옮겨 지하철을 향했다.

 

참고로, 해당 작품은 12월 10일에 설치되어 그로부터 6개월간 전시된다고 하니 혹여나 <살바도르 달리전> 관람을 위해 DDP에 들른다면 낮과 밤의 <플라스틱 백신> 모습을 확인해 보길 바란다.

 

 

 

◈ 예술 조각 2: "자 이쪽입니다" 낯선 눈동자와의 조우

탈영역우정국 앞 작가 미상의 그래피티



복합문화공간 탈영역우정국에서 열리는 전시를 보러 가던 길이었다. 6호선 광흥창역과 상수역의 중간지점에 위치한 탈영역우정국. 둘 중 하나를 택해야 했다. 평소대로라면 합정역에서 한 정거장만 더 가면 되는 상수역을 택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날은 지나치기로 했다. 아무래도 오래간만에 외출이라 들떴나 보다. 작지만 새로운 모험을 떠났다.

 

처음 발걸음을 내디뎌 보는, 광흥창역. 곧장 6번 출구로 나와 지도가 알려주는 대로 걸었다. 큰 길로 걸어도 되었지만 일부러 좁게 길나있는 골목길을 따라 걸었다. 예스러움이 묻어나는 작은 단독 주택들이 많았고 마치 어렸을 적 추억의 골목길을 연상시켰다. '이쯤이면 도착하지 않았을까...'하는 마음으로 마주한 갈림길에서 오른쪽 방향으로 몸을 돌려 마저 길을 올라서는데 흠칫. 어떤 이의 낯선 눈과 시선이 마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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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가발을 쓴 것 마냥 정갈하게 말려있는 머리, 이마와 입가에 선명히 파인 주름, 두껍게 내려앉은 눈꺼풀, 뾰족하게 솟아오른 콧대, 그리고 인중 위에 살짝 나 있는 콧수염을 따라 살짝 내려간 입꼬리는 사뭇 진지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가만 보니 눈동자의 색이 다르다. 왼쪽 눈은 검은색, 오른쪽 눈은 선명히 빛나는 노란색. 두 눈이 향하는 방향도 다르다. 눈으로 무언가를 말하고 싶은 것 마냥. 시선을 따라가 보자.

 

오른쪽 눈부터. 참으로 우연찮게 그의 노란 눈동자는 바로 아래서 입을 피자 조각만큼 벌리고 있는 이모지와 시선이 맞닿아있다. 한 장면으로 놓고 보니 살짝 시선이 아래를 향해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착시 효과일지도 모른다. 분명히 같은 시점에서 그린 그림이 아닐 텐데 말이다. (왼쪽에 그려진 사람의 얼굴이 이모지 그림보다 빛바랜 흔적으로 보아, 이모지 그림보다 먼저 그려졌음을 알 수 있다.) 어쩌면 나중에 누군가 그의 시선 끝에 맞추어 그려 넣은 것일지도.

 

그럼 왼쪽 눈을 따라가 볼까? 왼쪽 눈동자는 오른쪽보다는 조금 더 눈가의 끝 쪽으로 향해있다. 조금 더 멀리 있는 곳을 가리키는 것 마냥. 그 시선을 따라 올라서니 바로 ‘탈영역우체국’이다. 무사히 도착.

 

광흥창역으로 오는 길이 아니었으면 절대 마주하지 못했을, 이 낯선 눈동자와의 만남을 아주 오래 기억하게 될 것 같다.

 

 

 

◈ 예술 조각 3: 대형마트 앞 사시사철 비행 중인 세 사람

- 김성복 <바람이 불어도 가야 한다>



오랜만에 빈 가방을 메고 엄마와 산책길을 나섰다. 목적지는 홈플러스 금천점. 대형마트는 장을 보러 가는 곳이기도 하지만 엄마와 나에겐 조금 특별한 장소이기도 하다. 배부른 배를 소화시킬 겸 엄마와 함께 산책 삼아 자주 걷는 단골 목적지이기 때문. 차디찬 겨울바람을 가르며 부지런히 마트를 향해 걸었다. 한 30분쯤 지났을까. 목적지에 도착하기 직전, 건물 바로 건너편 횡단보도에서 뜬금없이 공중에 떠 있는 ‘이것’에 시선이 꽂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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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복의 <바람이 불어도 가야 한다>. 작품 바로 아래에는 작은 비석이 세워져 있었고 바로 그 위에는 작가와 작품 이름 그리고 작품 제작 연도가 적혀있었다. 살짝 희미하게 남아있는 글씨는 시간의 흐름을 실감 나게 해주었다. 2003년. 2003년 장이라니. 분명 어렸을 때부터 종종 들리던 마트였는데도 이제껏 존재조차 모른 채 해당 작품을 지나쳐왔다는 사실에 적잖이 당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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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불어도 가야 한다 (김성복)

 

 

구도를 바꾸어 정면으로 그들의 얼굴을 들여다보니 업은 사람과 업혀있는 두 사람의 상반된 표정이 눈에 띈다. 업혀있는 두 사람은 살짝 긴장한 듯한 경직된 느낌이 얼굴에 가득하다. 정면만을 응시한 채 입을 굳게 앙 다물고 있다. 그 와중에 앞에 앉은 이는 머리를 잡고, 그 뒤에 앉은 이는 바로 앞사람을 꼭 안고 있다. 반면, 그런 두 사람을 업은 사람은 온화한 미소를 띠고 있다. 심지어 편안해 보이기까지 한다.

 

제법 작품 제목이 잘 어울린다 싶었다. 그날따라 매서운 바람이 불어서인지 ‘바람이 불어도’라는 상황 설정은 딱 적절했고, 일자로 길게 뻗은 몸으로 두 사람을 업은 채 꽉 쥔 두 주먹에는 ‘그럼에도 가야 한다’는 굳건한 결의가 느껴진다.

 

뜬금없이 대형 마트 건물 바로 앞 구석에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이것의 정체가 궁금할 법도 한데 있는 듯 없는 듯 존재감이 희미했다. 그나마 해당 작품 앞에서 여러 구도로 사진을 찍고 있으니 그제서야 ‘뭐가 있길래 사진을 찍는 거지?’하는 의아한 눈빛들이 공중 비행 중인 세 사람을 향하기 시작했다. 그 순간만큼은 외롭지 않았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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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송희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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