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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iew] 뱅크시, 벽 위에서 아이러니의 예술을 하다 - 뱅크시: Still Here [전시]

전시 <뱅크시: Still Here>에 대한 개인적 단상

by 문경란 에디터
2026.08.17 15:04

 

지금부터 하나의 치밀한 계획을 세워보고자 한다. 원치 않는 곳에 세워진 벽 하나를 허무는 일이다. 무엇을 가장 먼저 해야 할까.

 

일단 벽을 망치로 부숴 본다. 그러자 그 자리에 새로운 벽이 지어진다. 설상가상으로 이전보다 견고한 보호벽까지 생긴다.

 

이번에는 다른 전략을 써 본다. 이 벽이 통행에 불편을 준다는 은밀한 소문을 퍼뜨리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그 소문은 너무도 빠르게 사라져 버린다. 말이란 확산력이 강한 만큼 휘발성도 강한 법이다. 소문은 많은 사람을 감응시키기도 전에 공중으로 흩어져 버린다.

 

마지막으로 남은 방법은 벽 위에 그림을 그리는 것이다. 누군가 원치 않았던 것을 새겨 넣는 일은 생각보다 훨씬 치명적일 수 있기 때문이다. 벽 위의 낙서가 망치보다 강력하고, 소문보다 끈질길 수 있을까.

 

그것은 누구도 확신할 수 없다. 다만 이 정체 모를 그림으로 인해 앞으로 아주 흥미로운 일들이 벌어지리라는 것만은 분명하다.

 

    

 

파격적인 퍼포먼스: 예술을 도구로 삼다


 

뱅크시의 그림이 세간의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은 2000년대 초반 런던에서였다. 경찰의 추적을 피하기 위해 빠르게 완성할 수 있는 스텐실 기법으로 그려진 크고 작은 낙서들이, 거리를 오가던 대중들의 눈에 하나둘 포착되기 시작한 것이다. 2000년대 초중반의 뱅크시는 거침없는 돌발 행동과 기습적인 퍼포먼스로 세계를 놀라게 하며 논란의 한복판에서 도약했다. 그가 예술가뿐만 아닌 사회운동가라는 호칭까지 얻게 된 데에는, 그의 관심이 미술계 내부의 논쟁에 머무르지 않고 점차 사회적·세계적 이슈로 확장되어 나간 이유가 크다.

 

그는 미술관과 협력하는 동시에 경찰을 피해 벽에 그림을 그린다. 언뜻 모순된 행보처럼 보이지만, 실은 제도와 불법 사이를 오가는 그 행동 방식 자체가 하나의 메시지가 될 수 있다. 그가 영국박물관 로만 브리튼 갤러리에 《페컴 록》을 몰래 설치하고, 가짜 소장번호까지 정교하게 꾸며 박물관이 며칠 동안 이를 알아차리지 못하게 만든 사건이나, 고향 브리스틀 박물관 한복판에 다수의 작품을 들여놓아 수많은 무료 관람객을 끌어모은 "뱅크시 vs 브리스틀 박물관" 전시는, 제도 밖에서 제도에 저항해 온 거리 예술가가 제도권 공간을 스스로의 무대로 전환해버린 사건들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결과물로서의 이미지뿐만 아니라, 침투하고 발각되고 전유되는 과정 그 자체라 볼 수 있다. 뱅크시가 벽에 그래피티를 그리는 행위 자체가 이미 체제와 정부에 저항하는 하나의 사회 실험이자 ‘수행(performance)’이며, 그런 의미에서 그는 화가이기 이전에 행위예술가에 가깝다.

 

 


현대적 벽화의 시작: 저항을 염원하다


 

"벽은 아주 거대한 무기다. 사람을 때릴 수 있는 것들 가운데 가장 잔인한 것 중 하나다."

 

뱅크시의 이 말은 그가 왜 하필 벽을 캔버스로 선택했는지를 압축적으로 설명한다. 현대의 예술가에게 어떠한 것을 작품의 캔버스로 삼을지 고민하는 일은 흥미로운 일이지만 동시에 번거로운 일이 될 수도 있겠다. 자신의 예술적 사유를 구현해낼 수 있는 매체들의 선택지는 전보다 훨씬 넓어졌지만, 넓어진 만큼 그 선택은 까다로운 과정으로 다가온다.

 

인간이 벽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것은 아주 오래전부터다. 미술사의 시초를 흔히 동굴 벽화로 꼽을 만큼, 벽에 무언가를 새기는 행위는 인류의 가장 오래된 표현 방식 중 하나였다. 옛 선조들은 벽에 새긴 그림을 단지 미적인 용도로만 사용하지 않았다. 사냥이 잘 되기를, 날씨가 좋기를 바라는 주술적 염원을 담아 머릿속에 그리던 이상적인 이미지를 시각화한 것이었다. 뱅크시가 반복적으로 등장시키는 소재들__사랑과 배신을 동시에 암시하는 쥐, 손을 뻗어도 닿지 않는 하트 풍선, 순종적이면서도 도발적인 원숭이__역시 같은 맥락에 있다. 상징적 이미지를 반족함으로써 지금 당장 이룰 수 없는 어떤 이상적 상태를 향한 주술에 가깝다.

 

 

Laugh Now_Banksy.jpg

 

 

이 지점에서 분명히 해 두어야 할 것이 있다. 뱅크시의 작품에는 ‘완전한 저항’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애초에 완전한 저항이라는 것 자체가 존재할 수 없다. 그는 다만 계속해서 저항을 염원할 뿐이다. 그 염원이 향하는 공간은 브리스틀 골목의 작은 벽에서 시작해 철도 아래 콘크리트 벽, 공공시설의 담벼락, 검문소, 그리고 마침내 분쟁 지역의 장벽으로까지 점차 확장되어 갔다. 팔레스타인 분리 장벽 위의 작업들과 《월드 오프 호텔》__’세상에서 전망이 가장 나쁜 호텔’이라는 역설적 문구를 내건 이 공간__은 예술의 개입이 가장 무력해 보이는 자리에서, 오히려 그 무력함 자체를 증언의 형식으로 바꾸어낸 사례다. 그러나 증언은 장벽을 무너뜨리지 못한다. 그림이 아무리 벽을 뒤덮어도, 벽은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다.




경계 위의 화가: 안과 밖을 넘나들다


 

뱅크시의 작품들을 사회와 단순히 대립하는 대상으로 보기는 어렵다. 그것은 사회 안에서 끊임없이 상호작용하는 무언가에 가깝다. 뱅크시를 '경계 위의 화가'라 부를 수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는 제도 안에서 밖을 바라보기도 하고, 제도 밖에서 안을 들여다보기도 한다. 그에게 안과 밖이라는 경계는 명확히 특정될 수 없다. 이를테면 그는 현대의 소비문화와 자본주의에 저항하면서도, 동시에 스스로 그 체계 안에 종속되는 순간을 맞이하기도 한다.

 

 

Girl with Balloon_Banksy.jpg

 

 

이 경계의 불안정함은 곧 저항이 브랜드가 되어 버리는 순간들로 드러난다. '자본주의를 파괴하라'는 문구가 적힌 티셔츠를 사기 위해 펑크와 고스, 히피 스타일의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서는 《페스티벌(자본주의를 파괴하라)》은, 저항의 구호가 상품으로 판매되고 반자본주의 하위문화가 그것을 기꺼이 소비하는 역설을 정확히 포착한다. 2018년 소더비 경매에서 《풍선과 소녀》가 낙찰 직후 파쇄되며 미술 시장의 상품화를 비판했던 퍼포먼스가, 아이러니하게도 몇 년 뒤 같은 작품을 뱅크시 개인 최고 경매가로 팔리게 만든 사건도 마찬가지다. 앞선 장에서 언급한 월드 오프 호텔 역시 국제적 관심을 환기했다는 평가와 더불어, 분쟁의 현실을 관광 자원으로 소비하게 만든다는 '다크 투어리즘' 비판을 동시에 받는다. 세 사례 모두 같은 구조를 반복한다: 비판이 정확할수록 그 비판은 더 값비싼 상품이 되어 돌아온다는 것. 이러한 지점들은 분명 그의 작업 의도와 상충한다.

 

뱅크시가 예술적 저항을 극적인 사회 변혁으로까지 이끌어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그것이 그를 단지 무모한 낙서가로 정의할 근거가 되지도 않는다. 많은 개념과 이론이 '발명'된 것이 아니라 '발견'되어 온 것처럼__이미 존재하던 현상을 철학자와 학자들이 유심히 들여다보고 개념화해 온 것처럼__우리는 그 발견의 몫을 무모함으로 폄하하지 않는다. 뱅크시 또한 마찬가지다. 그는 우리가 맞서 나가야 할 사회적 현상들을 발굴하고 시각화했다는 점에서 그만의 고유한 가치를 가진다. 그 저항의 목소리를 우리가 눈으로 보고 몸으로 느낄 수 있는 지점까지 수면 위로 끌어올렸다는 사실만큼은 주목할 만하다.




누구도 알 수 없지만, 누구나 될 수 있는 것


 

안과 밖의 경계가 불분명한 것은 그의 작업 방식만이 아니다. 그의 정체 역시 오래전부터 수차례 논란의 대상이 되어 왔다. 개인인가, 집단인가. 어쩌면 그는 존재하지만 동시에 존재하지 않는 존재이다. 결국, 또 하나의 경계 위에 놓인 존재인 셈이다.

 

흥미로운 점은 그의 예술이 결코 '예술가의 삶'까지는 끌어오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 그에게는 서사가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예술적 행적만 존재할 뿐, 삶의 행적은 추적할 수 없다. 우리가 ‘반 고흐전’이나 ‘뭉크전’ 같은 대형 회고전을 찾을 때는 작가가 살아온 삶의 궤적을 따라가며 그 안에서 작품과 감응하는 체험을 하기 마련이다. 뱅크시는 이러한 감각으로부터 완전히 분리되어 있다는 점에서 유일무이하다.

 

 

Paparazzi Rat _Banksy.jpg

 

 

이러한 무형성과 유동성으로 미루어 보건대, 어쩌면 누구나 뱅크시가 될 수 있다. 이는 예술의 본질과도 정확히 맞닿아 있다. 우리는 누구를 뱅크시라 불러야 할지 알지 못하면서도 끊임없이 그의 정체를 좇으며, 누군가를 그리 부르고자 한다. 사회와 대중, 언론이 집요하게 그의 정체를 규명하려 드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우리는 무엇을 예술이라 정의해야 할지 정확히 알지 못하지만, 그 끝없는 재정의의 과정만은 결코 멈출 수 없기 때문이다. 누군가 스스로를 뱅크시라 칭하고, 자신의 작품을 뱅크시의 작품이라 칭하는 순간 뱅크시가 될 수 있듯이, 예술 역시 누군가 자신의 창조물을 예술이라 칭하는 순간 예술이 될 수 있다.

 



뱅크시: 지금 여기에 있다


 

뱅크시_Still Here_포스터_260619.jpg

 

 

《Banksy: Still Here》, 뱅크시는 여기에 있다. 이 전시의 제목은 여러 겹의 의미로 풀어볼 수 있다. 그리고 이 말은 언제 다시 마주하더라도 늘 유효할 것이다.


뱅크시는 '언제나' 있다, 살아 있다. 누구나 뱅크시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를 대체할 또 다른 누군가가 존재하는 한, 뱅크시라는 이름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리고 뱅크시는 '어디에나' 있다. 제도의 밖에도, 안에도 그는 닿을 수 있다. 마지막으로 뱅크시는 지금 '보고' 있다. 누구보다 먼저 사회를 직시할 준비가 되어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다시, 벽 위에 그림을 그려 볼 것이다. 누군가 원치 않았던 것을 새겨 넣는 일은 생각보다 훨씬 치명적일 수 있기 때문이다. 벽 위의 낙서가 망치보다 강력하고, 소문보다 끈질길 수 있을까. 그것은 여전히 누구도 확신할 수 없다. 다만 이 정체 모를 그림으로 인해, 앞으로도 아주 흥미로운 일들이 계속해서 벌어지리라는 것만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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