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공간의 별칭은 '대혐오의 시대'이다. 혐오는 상대를 나로부터 구분짓는 타자화를, 상대와 가까이 하고 싶지 않다는 거부감을 전제로 한다. 혐오는 거리로 헤아릴 수 있는 감정이다.
자기혐오는 이 전제들을 배반한다. 타자화할 수 있는 대상의 부재, 평생 조금의 간격을 둘 수 없는 자기 자신과의 악연이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거니와 자기 혐오가 없는 사람이 있을까?
연극 <플리백>과 주인공 플리백은 생경한 대사와 소재로 풀리는 극이며,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인간 군상은 아니지만 훤히 들여다보이는 속은 마냥 낯선 감정은 아니었다.
성적 관계에서 자신의 존재 이유를 찾는 것은 혐오로부터 도망치는 와중 극단으로 치달은 방식이었지만, 누군가 나를 원하고 있다는 느낌을 바라는 심리는 정중앙에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플리백〉은 피비 월러-브리지가 직접 쓰고 직접 무대에 선 1인극이다.
2013년 에든버러 프린지 초연 당시 신작상과 1인 공연상을 받으며 곧장 화제작이 되었고, 이듬해 런던 소호 시어터 앙코르 공연으로 영국 비평가협회와 오프 웨스트엔드 어워드의 주요 부문을 휩쓸었다. 2019년에는 오프 브로드웨이와 웨스트엔드까지 올라가 매진 행렬을 이어갔다. 일부 관객에게는 2016년 BBC 드라마판으로 더 익숙할지도 모르겠다. 에미상과 골든글로브를 여러 부문 가져간 그 시리즈의 원형이 바로 이 연극이다. 국내에서는 2024년 국립극장 상영으로 먼저 소개되었고, 이번이 세계 최초 공식 라이선스 초연이다.
'플리백(Fleabag)'은 영어권에서 오래 쓰여온 말로 지저분한 사람, 문제투성이, 혹은 누추한 곳을 뜻한다. 제목이 곧 인물의 진단서인 셈이다. 런던 뒷골목에서 기니피그 카페를 간신히 굴리며 사는 플리백은 충동과 실수를 연달아 저지른다. 면접 자리에서 뜻하지 않게 상의를 벗어버리고, 성공한 언니와는 사사건건 부딪히고, 아버지는 새어머니의 눈치만 본다. 겉으로는 자유롭고 무심해 보이지만 그 안에는 친구의 죽음, 가족과의 단절, 관계 속의 공허가 쌓여 있다.
성적 농담과 냉소가 쉴 새 없이 쏟아지고 객석은 계속 웃는데, 극은 그 반대급부의 감정들이 한 사람의 자기 인식을 어떻게 무너뜨리는지를 집요하게 따라간다.
형식도 못지않게 발칙하다. 화려한 무대 장치도, 장면을 정리해주는 암전도 거의 없이, 배우의 몸짓과 목소리만으로 극 중의 인물과 런던의 골목이 만들어진다. 텅 빈 무대에서 플리백은 관객에게 직접 말을 건다. 농담을 주고 받는 듯 하다 어느 순간 가장 깊은 고백으로 끌어들인다.

이번 초연에는 김히어라, 김주연, 김규남이 번갈아 무대에 오른다. 원작자가 직접 쓰고 연기한 작품인 만큼 캐릭터의 개성이 강한데, 이번 라이선스 초연은 그 점을 오히려 밀고 나가 배우의 해석에 따라 톤은 물론 연출까지 다르게 구성했다. 김히어라는 원작의 스탠딩 코미디 형식에 가까운 플리백을, 김주연은 다양한 소품을 활용해 드라마성을 강화한 플리백을, 김규남은 그 중간 지점의 플리백을 그린다.
나의 플리백은 판단을 후회하거나 순간의 선택을 자책한 적은 있어도, 그게 결국 나라는 사실은 인정하고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나 역시 정도의 차이는 있겠거니와 '자기 혐오가 없는 사람' 일 수는 없었다. 특히 나는 차선으로 기우는 삶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과 목표를 향해 달려가는 데만 치중해서 순간을 방치하고 몰입하지 못하는 내가 두고두고 싫다. 관객을 공범으로 만드는 이 연극의 방식은, 결국 관객 각자가 자기 안의 플리백을 자백하게 만드는 장치였던 것 같다.
한가지 아쉬웠던 점은 규모 있는 홀이었다. 1인극은 결국 배우 한 사람에게 모든 것이 달려 있는데, 웬만큼 가까운 자리가 아니라면 배우의 표정이 잘 보이지 않았다. 이 작품처럼 관객과 눈을 맞추고 공범으로 끌어들이는 구조에서는 치명적이다. 극의 막바지 스크린에 배우의 얼굴이 비칠 때 몰입감이 확연히 달라졌던 것이, 조금 더 작은 공연장에서 조금 더 가까이 배우의 연기를 보면 좋았을 것이라는 아쉬움을 키운다.
결국 혐오는 필연적이고 화살의 안팎을 결정하는 것만이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일인가에 대해 혼란스러움을 느낀다. 화살을 안으로 돌리면 자기혐오가 되고, 밖으로 돌리면 자기연민이 된다. 밖으로 나간 화살은 애초에 타인 혐오를 겨냥한 것은 아니었으며, 딱한 나를 위한 알량한 안식처가 목적이었을 것이다. 이 처럼 플리백의 고백처럼 시작된 이야기는 결국 우리 모두의 외로움과 결핍을 비춘다. 엉망인 삶 속에서도 사랑과 이해를 갈구하는 것이 인간됨인 것 같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