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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pinion] 살가죽 아래, 매끄럽지 않아 아름다운 것들 [미술/전시]

: '스타티스 로고테티스' 전시와 함께 보는, 한병철 '매끄러움'의 미학

by 문경란 에디터
2026.07.19 14:25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
 

    

그것을 쉬이 정의할 수 있을까. 푸른 하늘을 아름답다고 하는 이도, 붉게 타오르는 불꽃을 아름답다고 하는 이도, 모두 틀린 이는 없다. 우리가 이 질문 앞에서 관대해지는 이유는, 그 기준을 정의하는 대상마다의 개인성 혹은 선호에 그 대답이 국한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아름다움'은 보편성의 시각에서 그것을 해석하는 것보다, 그것을 소화하여 정의하려는 주체의 '그 아름다움'이라고 칭하는 것이 더 유효할 것이다.

 

단, 우리는 세계와 무수히 부딪히고 접촉하며 이미 대다수의 선호에 대한 무의식적 파악을 진행해 왔다. 특히 '선호'와 '취향'이라는 것은 그것에 동조하는 집단의 수가 불어날수록 그 자체의 힘을 발한다. 그렇게 거대한 세력을 확보한 '선호'들은—다수의 옹호를 받을 확률이 높기에—우리가 '아름다움'이라고 부르기에 불편함이 적은' 존재들로 거듭난다. 이것이 다수에게 통용되는 아름다움이 만들어져 온 방식이다.


그렇다면 예술의 경우는 어떠한가. 어떠한 전시장에 들어섰을 때, 관람객들이 기대하는 바를 생각해 볼 수 있다. 대중이 기대하는 바를 감히 예측해 보자면 이렇다. 조화롭고, 경이롭고, 자유로운 '아름다움'. 하지만 그에 상응하지 못한 전시들도 분명히 존재한다. 거칠고, 반항적이고, 생경한 존재들을 담는 캔버스가 되고자 한 전시들이다. 이러한 전시들도 분명 선호되는 경우는 있다. 하지만 보는 즉시 그 시각적인 감각이 '아, 아름답다!'라는 탄사와 예술적 전율로 전환될 수 있을까?

 

이 의문을 전개하며 최근 방문하였던 '국립현대미술관 서울'「데이미언 허스트: 진실은 없어 그러나 모든 것은 가능하지」 전시를 떠올렸다. 잘린 소의 머리 주위로 파리 유충들이 득실대는 「천년, A Thousand Years (1990)」. 포름알데히드 용액이 담긴 거대한 유리 수조에 상어를 박제해 넣은 「살아 있는 자의 마음속에 있는 죽음의 물리적 불가능성, The Physical Impossibility of Death in the Mind of Someone Living (1991)」. 이 작품들을 보는 동안 뒤에서 들려온 것은 아름다움에 대한 탄성이 아니었다. 혼란스러운 탄식, 회의감, 불쾌감을 표현하는 목소리들이었다. "이게 미술이야?", "진짜 이건 아닌 것 같아.", "너무 잔인한 거 아니야?" 그런 반응들이 지배적이었던 현장의 감각을 되살리며 글을 이어간다.


다만 데미안 허스트의 작품들에는 생명윤리적인 논란으로 인한 불쾌함도 배제할 수 없다. 그래서 조금 더 조용히 말을 거는 작업으로 눈을 돌리고자 한다. 현재 '아테네국립현대미술관(EMST)'에서 진행 중인 「Stathis Logothetis — Earth to Earth」전시는 그리스 아방가르드 현대미술의 선구자인 '스타티스 로고테티스'의 작품들을 재조명한다. 전시되어 있는 작품들은 강렬한 인상을 가져왔다. 살가죽 아래의 벌건 조직을 연상시키는 작품들은 중력과 바람 같은 자연적 작용에 의해 속수무책으로 늘어지고 벌어져 있었다. 벌어진 상처를 겨우 바느질로 여민 자국들은 '수술 후 봉합된 신체'를 연상시켰다. 그의 작품들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주름, 비대칭, 흉터'의 잔상들은 그 거침없음에 눈살을 찌푸리게 만들기도 한다. 다만 주목해야 할 부분이 있다. 로고테티스는 그 무엇도 숨길 생각이 없다는 것이다. 그는 우리가 보편적으로 불쾌하고 결함적이라 여기는 요소들을 은폐하지 않는다. 오히려 화면 위에 당당히 드러낸다. 숨기지 않는 것, 그것이 이 작품들을 불편하게 만드는 동시에 어쩌면 가장 정직하게 만드는 지점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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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티스 로고테티스, 〈Earth to Earth〉 전시 중 작품, 아테네국립현대미술관(EMST), 직접 촬영.

 

 

그렇다면 이 거칠고 반항적인 작품들은 다수의 선호를 통과하지 못하였기에, '아름다움'의 범주 안에 소속될 기회를 박탈당할 것인가.

 

하지만 이러한 예술들에게도 기회는 있다. 철학자 '한병철'은 그의 저서 「아름다움의 구원」에서 '매끄러움'이라는 개념을 통해 이 질문에 답한다. 그에 따르면 "매끄러운 것은 상처를 입히지 않는다." 어떤 저항도 하지 않는 것, 그것이 매끄러움의 본질이다. 매끄러움은 단순한 미적 취향을 넘어 오늘날의 사회 전반을 관통하는 하나의 명령으로 작동하며, 오늘날의 긍정사회를 체현하는 표상이다. 매끄러운 대상은 자신에게 저항하는 일체의 부정성을 스스로에게서 제거한다. 그렇게 오직 즉각적인 동의—'좋아요'—만을 추구하게 된다.

 

그에게 '매끄러움'이란 가장 현대적이고 사회적인 '아름다움의 표본'이다. 매끄러움은 어떠한 저항도 반항도 하지 않는다. 이는 반사회성에 반하는 존재이며, 무엇보다 사회성에 부합한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매끄러움'이 완연한 '좋아요', 즉 '선호'가 되기 위하여 그에 부정하는 것들을 내부에서 축출하고 삭제해 왔기 때문이다. '매끄럽다'는 것은 '만지고 싶은 정도로 쾌적하다'는 것이다. 이는 어떠한 의미와 심오함과 결합되기보다는 '촉각 강박'을 유발하는 '긍정성'만을 가진다. 한병철은 이에 그치지 않는다. 릴케와 가다머, 바르트 등의 사유를 빌려 근현대에 부정당해 온 또 다른 '아름다움'에 대한 구원을 선언한다. 그는 이 부정성이야말로 아름다움을 구원할 열쇠라고 말한다. 그저 긍정성만을 내포하고 매끄러운 표면을 만지고 싶은 것이 아니다. 주체에 충격과 전율을 유발하며 의미를 찾아 나가는 성찰과 사유의 길로 안내해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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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티스 로고테티스, 〈Earth to Earth〉 전시 중 작품, 아테네국립현대미술관(EMST), 직접 촬영.

 

 

이러한 '매끄러움'의 미학을 통해 로고테티스의 상처들과 흉터들을 다시 보자. 벌겋고 쭈글쭈글하게 처져 있는 천들. 바늘 자국으로 엉성하게 다물어져 있는 '찢김'들. 이것들은 단지 흉측하지 않다. 신체의 고통과 한계를 폭로하는 작품들은 시각적 충격과 함께 의뭉스러운 고민거리를 가져온다. 그저 '와, 아름답군'이 아니다. '대체 무엇이지'라는 해석의 고충인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동요 속에서 자신의 사고와 지식의 한계에 부딪힌다. 이것이 로고테티스의 상처가 주는 '아름다움'이다. 더 이상 아름다움은 만족스러움과 쾌적함에 대한 욕망을 채우는 도구가 아니다. 이해할 수 없는 존재의 타자성을 인정하고, 그것을 회피하지 않는 것. 그것이 부정성의 핵심이다.

 

다시 돌아와, 이것은 예술뿐만이 아니다.

 

지금의 대한민국 사회는 유독 완벽한 신체를 갈망한다. 강남 성형외과 거리의 간판들, 인스타그램의 보정 필터, '인생 사진'을 위한 포토샵, 거리에 즐비한 에스테틱 피부숍—이 모든 것은 신체에서 발생한 흔적과 결점, 즉 시간과 우연이 남긴 자취를 지우려는 시도로 보인다. 상처의 미학들은 인간의 취약성—노화, 실패, 슬픔—자체를 '결함'으로 규정해 매끈하게 '성형'하려는 한국 사회에 하나의 실마리를 던진다. 부패와 재생에 대한 '자연적 순환', 그리고 '순응'이라는 태초의 권리를 인간의 신체와 삶에 어떻게 돌려줄 수 있을지, 그 비평적 대안을 모색해 나가는 실마리 말이다. 다수의 선호를 통과하지 못한 이 벌건 상처들이야말로, 어쩌면 우리가 잃어버린 또 다른 아름다움의 정의일지 모른다. 이제 우리는 로고테티스의 작품들과 함께, 상처받을 권리와 물질적 실존을 회복하는 방향을 찾아 나가는 여정에 함께 올라서 있다.

 

 

[참고 문헌]

한병철. (2016). 「아름다움의 구원」(이재영 역). 문학과지성사. (원서출판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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