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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pinion] 세계는 그래도, 그래도 세계는 [영화]

윤가은, <세계의 주인>(2025)

by 차승환 에디터
2026.06.11 15:14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남에게 받은 고통을 고통으로 갚을 수 있다면 세상은 얼마나 공정할까. 내 마음에 뚫린 구멍의 지름을 정확히 재서 딱 그만큼만,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정확하게 일치하는 구멍을 당신의 마음에 똑같이 뚫을 수 있다면. 만약 그러한 구멍이 뚫린다면 당신은 나만큼의 고통을 느낄까. 힘겹게 견디거나 도저히 견딜 수 없을 만큼 큰 통증, 혹은 구멍 아래 어두운 공간으로 떨어져 언제까지고 갇힐 것만 공포를 당신도 정확히 겪을까. 그렇게 된다면 아팠던 내 마음은 좀 나아질까.


고통의 정확한 계량은 가능하지 않다. 그럴 수 없음을 알기에 우리가 자꾸만 분별없이 서로를 할퀴게 된다는 것은 우리의 한계다. 현실에서 숨 막히는 공정과 오차 없는 구조는 성립할 수 없으므로 우리는 얼마간의 정형적 틀을 만들어 누군가 느낄 고통의 크기를 눈대중으로 재어보기 시작한다. 언젠가 자와 저울이 달린 틀 안에 상처받은 누군가를 밀어 넣고 우리는 묻는다, 아니 강요한다. 그러한 상처를 받았을 때 당신은 이만큼 아파야 한다고, 혹은 이렇게 아파해야 한다고. 물론 이것은 분명한 호의다. 무지보다 쓰라린 호의.


윤가은 감독의 영화 <세계의 주인>(2025)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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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가 꽤 긴 시간을 할애해서 보여주는 것은 주인(서수빈)의 일상이다. 영화 속 주인은 평범한 고등학생이다. 선생님과 상담하며 진로를 고민하고, 친구들과 삼삼오오 모여 웃고 떠들거나 춤을 추면서 논다. 남자친구와 제법 깊은 연애를 하고 이성 친구들과도 스스럼없이 어울린다. 영화는 주인의 일상을 통해 극적인 주인공성이 아니라 지극한 평범성을 의도적으로 그려낸다. 그 또래에서 가능한 모든 사회활동을 적극적으로 해내는 주인은 평범한, 혹은 보다 더 활발하고 유쾌한 학생처럼 보인다. 그리고 그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주인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그 사실이 지켜보는 우리를 끝내 당황하게 만든다는 것을 제외한다면.


문제는 주인이 속한 그녀의 세계다. 주인의 가까운 세계 여기저기에서 미세한 균열이 눈에 띈다. 알코올에 의존하며 살아가는 엄마 태선(장혜진), 누나에게 온 의문의 편지를 몰래 숨기기 급급한 동생 해인(이재희), 가족과 떨어져 홀로 산속에 살면서 연락조차 드물어진 아빠 기동(김석훈)까지. 그녀의 가족은 무언가 증상을 앓고 있는데 정작 주인만큼은 그 증상에서 벗어나 있으므로(혹은 참아내고 있으므로) 정확한 병명을 진단하기 어렵게 만든다. 온전한 것처럼 보이던 주인의 세계에도 분명한 균열이 있다. 이것은 누구에게나 있을 법한 평범한 일이다. 그러나 작은 균열처럼 보였던 일들이 사실은 거대한 붕괴의 흔적이었다는 것이 곧 드러나는데, 이는 지역사회에서 벌어진 하나의 사건 때문이다.


아동 성폭력으로 수감됐던 범죄자가 출소해 돌아온다는 소식에 주인의 학교에서 성범죄자 거주 반대 서명운동이 벌어지기 시작한다. 이 서명운동을 이끄는 것은 수호(김정식)다. 어린 여동생 누리(박지윤)를 끔찍이 돌보는 수호이기에 아동 성범죄는 자신에게도 아주 가까운 위협처럼 느껴졌을 테다. 전교생 서명을 앞두고 결의에 찬 수호가 주인을 찾아온다. 그러나 모두가 호응하는 서명운동에 대한 주인의 반응은 예상외로 냉담하다. 수호가 작성한 서명운동 내용 중 분명히 ‘틀린 말’이 있다는 것. “성폭력은 평생 씻지 못할 깊은 상처를 남기며, 한 사람의 인생과 영혼을 완전히 파괴하는 잔인한 범죄입니다.” 극단적인 언어로 성범죄의 심각성을 강조하는 수호와, 그 피해의 극단적 정의를 용납할 수 없는 주인의 대립은 쉽게 수습되지 않고 끝내 몸싸움까지 이어진다.


두 사람의 다툼은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이해와 오해의 문제다. 그리고 오해의 문장은 대체로 타인에게서 나온다. 우리가 작성해야 할 올바른 이해의 문장은 이렇다. 성범죄가 남기는 상처는 끔찍하지만 “평생 씻지 못할” 것은 아니며 그래서도 안 된다는 것. 성범죄는 피해자의 삶을 무너뜨리지만 “인생과 영혼을 완전히 파괴”해버리는 것은 아니며 그래서는 안 된다는 것. 법과 제도의 차원에서 가해에 대한 잣대는 굳건하고 엄격해야 하지만, 윤리와 삶의 차원에서 피해에 대한 잣대조차 함부로 뻣뻣해선 안 된다. 예컨대 성범죄 피해를 ‘영원한 상처와 영혼의 파괴’와 같이 “어디서 복붙한 것처럼” 너무 쉽게 정의하고 위로해버리는 순간, 그것은 호혜적인 이해가 아니라 호의적인 오해가 된다. 우리는 성급한 문장으로 짠 연민의 틀에 피해자를 밀어 넣고 누군가의 세계를 두 번 죽이고 있지는 않은가.


영화 내내 주인에게 은밀히 전해지는 누군가의 쪽지는 피해자에 대한 우리의 흔한 인식을 정확히 관통한다. 당신은 피해자이므로 아픈 게 정상이라고. 아무렇지 않다는 당신의 말은 분명히 거짓말이라고. 피해자가 아프지 않다고, 이젠 정말 괜찮다고 말했을 때, 그의 고통을 알 수 없는 우리의 무지는 불편함이 된다. 피해자 스스로 우리의 기계적 동정과 연민의 작동을 막는다면 우리의 내면에서 윤리적 통증이 발생하는 것.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마음이 편해지기 위하여, 자꾸만 불편하게 캐묻는 것이다. “아프면 아프다고 해야지. 거짓말하면 더 아프다고 했는데? 이래도 안 아파요?” (주인이 누리를 꼬집으며 추궁하는 CCTV 장면은 ‘피해자다움’에 대한 우리의 관성적 인식을 반영하는 거울의 시선이자, 어떤 피해자조차 다른 피해자를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또는 왜곡할 수밖에 없다는― 렌즈의 시선이기도 하다.)


그러나 영화는 타인의 고통이라는 영원한 무지의 문턱 앞에서 마냥 좌절하지 않는다. 우리는 우리의 한계로 평생 타인을 오해하면서 살지만, 어쩌면 오해를 통해 오해를 풀 기회를 얻기도 한다는 것. 주인이 자신의 입으로 끔찍한 성폭력의 피해자였음을 밝히는 순간 오해의 말문은 막히고, 주인의 모든 세계는 천천히 이해되어 버린다. 같은 상처를 입었던 피해자들과 모여 봉사활동을 하거나 필요하다면 미도(고민시)처럼 힘겨운 싸움을 계속하면서, 그렇게 오해되지 않은 정확한 상처를 마주하면서, 주인은 정말로 최선을 다해 자신의 세계를 회복하고 있다는 것. 세계는 여전히 끔찍한 일들 투성이지만 그래도 고민 끝에 주인이 적어낸 진로희망이 사랑일 때, 마침내 사랑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되길 원할 때, 우리는 슬픔 속에서 희망을 발견한다.  우리는 언제나 사랑을 해낼 수 있다는 희망. 뜨겁게 키스를 하면서, 섹스 앞에선 아직 머뭇거리면서, 그래도 세계는 사랑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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