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걔는 원래 그런 사람이잖아.”
이 한 마디가 이토록 폭력적일 수 있을까? ‘원래’라는 것은 도대체 누가 정하는 것일까?
영화 <세계의 주인>은 밝고 활기찬 열여덟 살 소녀 ‘이주인’을 중심으로 펼쳐진다. 주인은 사랑이 하고 싶다. 비록 짧은 주기로 남자친구가 바뀌더라도, 언젠가는 진짜 사랑을 할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연애도, 우정도, 공부도, 운동도 — 주인은 무엇이든 열심히 한다.
친구들과 해맑게 장난치는 주인, 아무도 없는 도장에서 땀을 흘리는 주인, 남동생 해인의 마술쇼를 지켜보는 주인, 엄마의 어린이집에서 아이들을 돌보는 주인. 주인은 영락없이 활기차고 똑부러진 아이다. 마치 삶에 힘든 일 따위 없는 사람처럼.
그런데 어떤 이들은 그런 주인을 향해 ‘헤프다’고 말한다. 너는 이 모든 게 장난 같냐고 묻는다. 글쎄, 과연 그들은 주인에 대해서 얼마나 잘 알까?
우리는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에게 저마다의 이야기가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아무리 가까운 사람이라도, 내가 아는 모습이 그 사람의 전부가 될 수는 없다.
‘피해자’ 하면 흔히 떠올리는 이미지가 있다. 늘 울고 있을 것 같고, 세상과 단절된 채 상처 속에 머무를 것 같다. 그래서 그렇지 않은 사람이 나타나면 그 사람이 피해자가 맞는지 의심한다. “피해자가 어떻게 그렇게 밝을 수가 있어?”, “진짜 괜찮은 거 맞아?” 하고 묻는다. 그건 어쩌면 우리가 ‘극적인 피해자상’을 원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세상에 정해진 ‘원래’의 모습이란 없다. 모든 사람은 각자의 방식으로, 저마다의 사연 속에서 살아간다. 어떤 날은 아무리 악을 써도 새어 나가지 않을 정도의 큰 소음이 필요할 수도 있고, 어떤 날은 초등학생의 마술로 걱정을 사라지게 만들고 싶을 수도 있다. 혹은 누군가 아픔을 숨기지 않은 채 솔직히 말해주길 바랄 수도 있다.
이토록 다양한 세계 속에서, 저마다의 주인이 되어, 서로의 이야기를 함부로 단정하지 말고, 그저 함께 웃으며 살아가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