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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비밀통로>는 삶과 죽음 사이 어딘가에 놓인 공간을 무대로 삼는다. 기억을 잃은 두 남자 서진과 동재가 설명되지 않는 공간, 비밀통로에서 조우하며 이야기는 출발한다.

 

이 곳이 마냥 혼란스러운 서진, 반면 오랜 시간 머무르며 누군가를 기다려온 동재가 상반된 감정으로 서로를 대한다. 동재는 서진에게 가장 옆 방에 있는 우리가 전생에 아주 가까운 인연이였을 것이라 알려주며, 비밀통로를 나가는 방법은 서로의 기억을 계속 확인하는 것 뿐이라 말한다. 무대에 쌓여있는 책들은 그들의 과거, 즉 전생을 호출하는 장치다. 책을 함께 만지는 순간 과거의 장면으로 이동하며 두 인물은 여러 생을 거치며 얽혀온 자신들의 인연을 확인하게된다.

 

이 작품은 ‘죽음 이후’라는 설정을 전면에 내세우기보다는, 삶이 완전히 소멸되지 않았을 때의 어떤 경계 상태를 상상하게 한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사람이 죽으면 정말 끝일까, 아니면 어딘가에 잠시 들러 자신이 지나온 시간을 정리하는 구간이 있을까. 비밀통로는 바로 그 ‘잠시’에 대한 상상에서 출발하는 작품처럼 보였다.


무대는 일본 신사 입구를 떠올리게 하는 간결한 구조물들과 시작된다. 도리이를 연상시키는 프레임과 뒤편에 놓인 책장. 장식은 많지 않고, 여백이 있는 미니멀한 구성이 오히려 공간과 초현실적인 설정을 상상하게 만든다. 인물들이 서 있는 곳은 현실과 단절된 세계라기보다, 아직 정리되지 않은 기록들이 잠시 보관되는 장소처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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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조명과 영상 효과의 활용이 인상적이다. 붉은빛이 스미면 무대는 현실과 단절된 영역처럼 느껴지고, 차분한 조명이 내려앉을 때는 초현실적 설정과 더불어 극의 분위기를 편안하게 이어간다.

 

뒤편의 책장은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삶과 죽음 사이에 놓인 서가처럼 역할하며, 한 칸 한 칸에 축적된 기억들이 꽂혀 있는 장소적인 세계관을 확장한다. 인물들이 그 앞에 서 있을 때, 그들조차 아직 정리되지 않은 삶의 기록들 사이에 잠시 보관된 존재처럼 보인다는 점에서 무대 미술에 대한 부분이 더욱 부각된다. 이야기가 진행되며 인물들을 설명하는 물건들이 조금씩 더해지는 점도 흥미롭다. 그들의 과거를 상징하는 물건들이 쌓이면서, 비어 있던 무대는 점차 구체적인 기억의 장소로 변한다.


연극 <비밀통로>는 삶과 죽음을 극적으로 대립시키지 않는다. 벌을 받지도, 구원을 얻지도 않는다. 대신 지나온 시간을 들춰보게 하며, 삶과 삶을 무수히 대립시킨다. 두 인물은 서로의 과거를 계속 알아가며 아직 시작하지 않은 새로운 인연을 준비한다. 그리고 그 정리가 끝나면 그들은 다음 관계를 정리하러, 혹은 새로운 생을 살아가려 떠나는 준비를 마친다. 우리는 살아있을 때조차 누군가와의 관계, 마음을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한다. 그렇기에 삶과 삶 사이 어딘가에서 다시 그 장면을 들춰보는 작품 속 상황들이 작고 큰 위로를 준다.


가장 흥미로웠던 건 감정이 되살아나는 방식이다.

 

두 사람이 동시에 책을 만지면, 이미 끝난 과거가 현재처럼 펼쳐진다. 문제는 그들이 그 장면을 ‘다시 겪는다’라는 점이다. 부자 관계였던 시절의 갈등, 친구로 지내던 때의 감정이 그대로 살아난다. 분명 지난 일인데, 분노가 올라오고 서운함이 스친다. 그런데 곧 “이미 지나간 일”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화가 나 있지만, 애써 감정을 누르려 한다. 죽음 이후의 공간에서도 이들의 감정이 여전히 동요하는 사실이 인간적으로 느껴진다. 망각은 신의 축복이라는 말처럼 지난 감정을 다시 겪는 것이 그들에게 버겁게 작용하면서도, 전생에서 미처 마무리하지 못한 감정을 추스리는 기회가 되어주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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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은 관객을 마구 몰아붙이지는 않지만, 대신 같은 질문을 여러 각도에서 천천히 반복한다. 삶이 끝난 뒤에도 관계는 남는가. 이미 지나간 감정은 완전히 사라지는가. 공연을 보고 나오며, 누군가와의 오래된 갈등을 떠올렸다. 이미 지나간 일이라고 생각했던 순간들이, 사실은 아직 정리되지 않았던 건 아닐까 하는 생각. 이 작품은 답을 주지 않는다. 대신 우리가 미처 마무리하지 못한 감정들을 조용히 꺼내 놓게 한다.


연극 <비밀통로>는 자극 없이 관계의 변화를 차분히 따라가는 작품이다. 두 사람이 책을 만지며 과거로 돌아가듯, 관객도 자신의 시간을 잠깐 들춰보게 만든다. 그리고 그 감정을 어떻게 정리할지는 각자의 몫으로 남겨 둔다.

 

연극 ‘비밀통로’는 NOL 씨어터 대학로 우리투자증권홀에서 성황리에 공연 중이며, NOL티켓과 티켓링크를 통해 예매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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