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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타고난 본성은 '선'인가 '악'인가. 명확하게 정해진 답이 없어 끊임없이 대두되는 이 질문은 성선설과 성악설의 대립으로도 이어진다. 결국 인간을 만드는 것은 환경일까, 본성일까. 아니면 또 다른 요소가 존재하는가. 어느 것 하나 콕 집어 '이거다'라고 대답할 수는 없지만, 그 인간을 둘러싼 환경 또는 그 밖의 무수한 조건들이 본성에 영향을 미치는 건 아닐까 하는 조심스러운 예측만 가능할 뿐이다.

 

 

[돌파구] 구미식(26-0612)_ⓒShin-joong Kim_031.jpg

극단 돌파구 제공 ⓒ김신중(만나 사진작업실)

 

 

극단 돌파구의 연극 <구미식>(이홍도 작, 전인철 연출, 씨어터 쿰, 2026.6.13.~6.21.)은 '가상의' 지방도시 구미시를 배경으로 하는 작품이다. 극 중 구미시에는 오스카 와일드의 동화  「행복한 왕자」에 등장하는 행복한 왕자의 동상이 떡하니 버티고 서 있다. 그 동상은 '가상의' 국가지도자의 위대한 업적을 기리기 위한 동상이다. 그리고 주인공 '톰'이 그 동상 앞에 설 때, 본격적으로 이야기가 시작된다.

 

 

 

누군가에게는 가상할 가상의 세계


 

가상의 공간과 존재를 전면에 내세운 이 작품은 역설적이게도 우리가 발 딛고 선 현실을 더욱 강렬하게 환기한다. 연극 <구미식> 역시 고전을 패러디한 블랙코미디를 통해 동시대 한국의 부조리를 수면 위로 끌어올린다. 극이 전개될수록 '구미시'는 단순한 특정 지역을 넘어, 한국 사회의 모순이 얽히고설킨 총체적인 상징 공간으로 확장된다.

 

톰은 구미시에서 자란 클로짓 게이이자 약물 중독자다. 공원 화장실에서 약에 취해 비틀거리던 그가 '행복한 동상'과 마주보는 순간 이야기가 시작된다. 동상은 구미시 곳곳을 굽어보며 따뜻한 마음을 베푼다. 자신의 몸과 눈에 박힌 보석을 가난하고 헐벗은 이들에게 나누어 주라는 동상의 자애로운 부탁은, 역설적이게도 톰에게 제공될 보상인 '마약'을 담보로 성립된다. 톰은 기꺼이 제비가 되어 보석을 배달하고 마약을 취하며 이상한 공생 관계를 구축한다. 겉보기엔 이타적인 동상의 선의는, 실상 자신을 숭배하는 이들과 결속을 다지기 위한 프로파간다에 가깝다. 그 맹목적인 사랑과 보답의 굴레는 시간을 타고 흘러 2026년 현재의 대한민국으로 고스란히 이어진다.

 

산업화를 이끈 가상의 국가 지도자는 절대 죽지 않는 동상이 되어 구미시를 영원히 지배한다. 시간이 흐르고 신화가 덧입혀질수록 그는 범접할 수 없는 거대한 이데올로기 그 자체가 된다. 반면, 그의 제비로 전락한 톰은 이 거대 서사와는 동떨어진 파편화된 개인에 불과하다. 테네시 윌리엄스의 희곡 <유리동물원>의 주인공 톰을 모티프로 삼은 이 인물은 퀴어라는 정체성과 약물 중독이라는 위태로운 상황을 지니고 있다. 그는 동상이 외치는 대의명분이나 구미시 주민들의 칭송과는 관련이 없어 보인다. 약물이 주는 눈앞의 쾌락에 몰두할 뿐.

 


[돌파구] 구미식(26-0612)_ⓒShin-joong Kim_170.jpg

극단 돌파구 제공 ⓒ김신중(만나 사진작업실)

 

 

하지만 그가 이 견고하고 보수적인 '구미시'에서 자라났다는 사실은, 그를 도시의 분위기와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게 만든다. 톰의 정체성과 일탈은 시스템이 규정하는 정상성에서 철저히 빗나가 있다. 약물에 취한 톰이 시간을 건너 마주한 고등학교 시절 교감 선생님의 환상이 이를 방증한다. 톰은 제게 가해진 폭력을 선명히 기억하고 있지만, 가해자인 교감은 일말의 반성 없이 굳건한 태도를 유지한다. 고통받은 피해자가 존재하는 상황에도 누구 하나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신념만을 폭력적으로 밀어붙이는 공간. 그곳이 가상의 도시 구미시이며, 이는 동시대 한국 사회를 비추는 거울이다. 그리고 바로 그 진실에 가닿을 무렵, 관객의 몰입을 의도적으로 깨뜨리는 순간이 찾아온다. 그건 바로 연극 <구미식>만의 광고 타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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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구미식>은 의도적으로 몰입을 방해하는 장치로서 광고와 찌라시의 형식을 빌려와 연극에서의 놀이 양식으로 탈바꿈한다. 무대 뒤편 중앙에 배치된 좁고 긴 스크린에는 중간중간 '광고 타임'이 끼어들며, 마치 스마트폰의 숏폼 영상처럼 다양한 주제를 가진 광고를 재생한다. 또한, 배우가 직접 스마트폰을 들고 라이브 영상을 찍는 장면에도 이 스크린이 적극적으로 활용된다. 실시간으로 송출되는 영상은 배우들의 얼굴뿐만 아니라 객석의 관객들까지 고스란히 무대 위로 소환한다.

 

이토록 노골적인 방식으로 관객의 몰입을 깨는 이유는 무엇일까. 첫째는 이 연극이 단순히 가상의 도시 '구미시'에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을 환기하기 위함이다. 극 자체에 몰입하다 보면, 어느새 눈앞에 펼쳐지는 무대가 비현실적인 상상의 세계처럼 여겨질 때가 있다. 배우들이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와 커튼콜을 한 뒤 막이 내리면, 관객은 가상의 극장에서 느꼈던 찝찝한 감정들을 훌훌 털어버리고 다시 평온한 일상에 복귀한다. 그러나 제4의 벽을 깬 연극 <구미식>은 거듭 극의 몰입을 방해하고, 그때마다 관객은 자신이 속한 현실 세계를 거울처럼 비추어 보게 된다. '이것은 허구다'라는 사실을 인식하는 동시에, '그렇다면 내가 살아가는 현실은 이 허구와 얼마나 다른가?'라고 반문하게 되는 것이다.

 

 

[돌파구] 구미식(26-0612)_ⓒShin-joong Kim_213.jpg

극단 돌파구 제공 ⓒ김신중(만나 사진작업실)



두 번째 이유는 <구미식>에 참여한 전강희 드라마터그의 말에서 찾을 수 있다. 그는 장면의 의도를 다음과 같이 밝혔다.

 

 

"<구미식>은 진짜 이야기와 가짜 이야기를 오가며, 광고에 둘러싸인 채로 자본주의에 침식당한 '오늘'을 보여준다. (...) 인터넷 세상에서 알고리즘의 연상작용은 과거의 나에 대한 구체적인 정보 값들을 근거로 일어난다. (...) 어떤 것은 여전히 정보로서 제값을 다하고 있지만, 어떤 것들은 그저 노이즈일 뿐이다. (...) 손가락 하나로 화면을 가볍게 스치는 행위를 반복한다. 목적 없이 계속되는 반복은 정보와 노이즈의 경중을 없앤다. 검은 화면 속에서 두 세계는 차이가 없다."

 

 

무분별하게 쏟아진 대량의 이미지들은 정보의 더미 속에 갇혀 사는 현대의 우리들을 돌아보게 만든다. 우리는 진실과 거짓이 교묘하게 뒤섞여 무엇이 진짜인지 분간할 수 없는, 이미 너무 멀리 가버린 세계에서 살고 있다. 극 중 구미시의 주민들 역시 그런 세계를 살아간다. 광고와 찌라시가 범람하고, 누군가의 프로파간다가 도시를 지배하는 세계. 이 구미시는 행복한 동상의 영웅담과 함께 어떤 가치관을 심어 주민들을 철저히 '구미식'으로 개조하려 든다. 이 지점에 이르면, 블랙코미디와 패러디로 객석의 웃음을 유발하던 연극은 점차 공포스러운 면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나는 죽어도, 죽어도 계속 살아난다"


 

극 말미에 이르러 긴 독백을 시작한 행복한 동상은 선언한다. "나는 죽어도 죽어도 계속 살아난다"고. 사람들의 믿음과 사랑, 그리고 이야기 속에서 끊임없이 부활할 것이라고. 이렇게 동상으로까지 만들어진 이상, 그의 신화와 역사는 주민들의 삶에 뿌리 깊게 남아 절대 잊히지 않고 죽지도 않는 DNA로 각인된다. 거대한 이데올로기를 발화하는 독백에 이어, 제비가 되어 다량의 약을 얻게 된 톰의 환상과 현실이 어지러이 교차한다. 결국 구미대교 위에 선 톰은 낙동강에 뛰어내리고, 그 순간 다시 제비로 변한 그가 목도하는 환상은 동시에 수많은 결말로 분해되어 관객에게 제시된다. 

 

 

[돌파구] 구미식(26-0612)_ⓒShin-joong Kim_139.jpg

극단 돌파구 제공 ⓒ김신중(만나 사진작업실)

 

 

그렇게 모든 장면이 끝나고 차분한 분위기에서 진행되는 엔딩 장면은 그간의 광기 어린 <구미식>답지 않게 낯선 감각을 안긴다. 배우들은 나란히 앉아 누군가의 외할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다. '그분' 덕에 이렇게 사는 거라고 말했던 작은 할머니. 작은 할머니는 엄마의 친엄마인데도, 서류상으로는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다. 분명 기억 속에서는 생생한 할머니가 서류상으로는 없는 사람이라는 모순. 기억과 서류 중 무엇이 진짜인지 알 수 없다는 이 짤막한 일화는 곧 동상으로 박제된 누군가를 향한 질문으로 확장된다. 동상이 진실인가, 그를 둘러싼 소문이 진실인가. 그를 맹신하는 사람들의 기억이 진짜인가, 아니면 활자로 남은 역사가 진실인가. 이 혼란스러운 현실 속 배우들은 우리에게 왜 연극이, 극장이 필요한지 이야기한다.

 

 

연극의 마지막에 이르러 우리는 마침내 도착합니다.

바로 이곳, 극장에.

사실이 허구를 만나는 곳, 현실이 이야기와 뒤섞이는 곳,

바로 극장에.

세상 모두가 말합니다, 현실은 그대로라고.

사실을 바꿀 수 없고, 현실이 언제나 거기에 있다고.

그래서 극장이 필요하고

그래서 이야기가 필요한 건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작품 속에 적극적으로 등장했던 숏폼이나 광고, 찌라시와 가장 거리가 먼 매체가 바로 연극일 것이다. 그 두 분야를 충돌시킨 이유도 바로 이 대사에 있는 것 같다. 현실과 이야기가 뒤섞이는 곳, 현실은 결코 바뀔 수 없다고 모두가 말할 때 '그렇지 않다'고 반문할 수 있는 곳. 가짜 뉴스가 만연한 현실을 패러디하며, 그 속에서 반짝이는 진실을 건져 올릴 수 있는 곳이 바로 극장인 것이다. 연극 <구미식>은 허구와 진실이 뒤엉키는 가상의 공간 '구미시'를 통해 진실과 가짜의 치열한 대립을 그려낸다. 그리고 그 대립의 장인 극장과 이야기가 존재하는 한, 우리는 여전히 희망을 긍정하고 변화를 도모할 수 있다고 선언한다.

 

그러니 구미시에서 자란 누군가도 결국 그 억압을 벗어던지고 전혀 다른 길을 걸어갈 수 있다. 그를 둘러싼 환경이 그를 구미식으로 순응하게 만들 수도 있지만, 치열하게 맞서게 하는 원동력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결국 본성과 환경이 인간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해도, 우리에게는 그 이분법을 뛰어넘는 '또 다른 요소', 즉 극장과 이야기가 존재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꺼이 현실의 문제를 의심하며 새로운 길을 상상할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연극 <구미식>이 전하고자 했던 위로의 메시지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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