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변인들로부터 <세계의 주인>을 추천하는 연락이 잇따라 왔다. 사실 표면적인 정보만 봐도 이 영화가 내 취향일 거란 확신이 있었다.
무려 ‘우리들’의 윤가은 감독 작품이니까.
괜히 아껴보고 싶은 마음에 관람을 미루다가, 한편으로 상영이 끝날까 걱정돼 서둘러 예매했다.
그리고 영화가 끝난 직후, 나는 다시 예매 버튼을 눌렀다.
영화의 가장 놀라운 점은 세밀한 연출이다.
이야기는 열여덟 살 소녀 이주인을 중심으로 펼쳐진다. 자칫 어수선해 보일 수 있는 여러 이야기들이 이주인을 매개로 하나로 정돈되며, 그를 통해 하나의 세계가 만들어지고 확장되는 순간이 그려진다. 세계는 이주인의 개인적 세계에 국한되지 않는다. 각 인물들의 세계 또한 포함하며 점차 커져가는 세계를 헤아리게 된다. 이는 모두가 ‘세계의 주인’이라는 메시지를 전하고자 한 감독의 섬세한 의도가 연출에 고스란히 담긴 결과라 할 수 있다.
<세계의 주인>에는 각 인물의 아픔이 등장한다. 대놓고 드러난 상처이든, 깊숙이 감춰둔 상처이든, 바늘로 살짝 찌르는 듯한 통증이 관객에게 전해진다. 너무 깊지도, 그렇다고 가볍지도 않은 — 딱 ‘견딜 수 있을 만큼’의 아픔이다.
어릴 적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주인, 친구의 비밀을 이제야 알게 된 유라, 죄책감으로 텀블러에 술을 숨겨 마시는 엄마, 누군가의 편지를 몰래 모으는 동생 해인—모두 각자의 상처를 품은 채, 자신만의 방식으로 살아간다.
“어디부터가 괜찮고, 어디부터가 안 괜찮은 건데요.”
이 대사는 주인의 친구 수호가 동생 누리가 상처를 입었을 때 유치원 선생님에게 건넨 말이다. 그저 스쳐 지나갈 수 없는 대사였다. 괜찮음의 정도는 사람마다 다 다르다. 상처의 크기와 깊이는 결국 상처를 입은 당사자만이 판단할 수 있는 것이다. 영화는 타인의 상처를 치유하려는 선의조차 때로는 또 다른 폭력이 될 수 있음을 조용히 일깨운다.
윤가은 감독은 이들의 아픔이 극적으로 사라지는 기적을 바라지 않는다. 대신, 그들의 방식을 존중하고 묵묵히 지켜봐주길 바란다. 마치 해인의 마술쇼에서 상자가 사라지지 않더라도 괜찮다고 외치는 사람들처럼 말이다.
우리의 세계 또한 그런 세계이길, 누군가의 불완전함을 괜찮다고 말해줄 수 있는 세계이길 소망한다.
“나는 너를 영원히 기억할 거야.
고마워, 이주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