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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iew] 고전의 빈칸을 다시 채우다 - 로테/운수 [공연]

죽은 남자들과 살아남은 여자들

by 김현진 에디터
2026.06.10 17:47

 

 

작년 11월, 세계 고전문학 도장 깨기를 하며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읽었다. 당시 책을 읽고 남겨두었던 메모를 다시 찾아보니 이런 내용이었다.

   

 
통찰력 있는 문장들이 많다. 애인이 있는 여자를 사랑한 일이 도화선이 되었을 뿐 보편적인 희망과 절망, 자살 심리에 관한 소설이라고 보면 어찌저찌 이해는 될 수 있겠으나... 사상이 좀 위험하다. 집착과 이기적인 폭력을 소중한 감정으로 포장하지 않았으면... 뒤로 갈수록 한마디 한마디가 끔찍하게 읽히고 미친 사람 같아서 소름 돋았다.
 

 

그래서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과 <운수 좋은 날>을 재해석했다는 연극 <로테/운수>에 관심이 가지 않을 수 없었다. 문학을 좋아하는 관객으로서 흥미로웠고, 매년 서울연극제를 다니는 만큼 자유경연작 특유의 강렬함이 기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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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테/운수>는 제목에서도 드러나듯 전반부는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후반부는 <운수 좋은 날> 관련 내용으로 이루어졌다. 전반부는 대학생 베르테르에게 스토킹을 당하는 교수 김로테의 이야기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단연 연출이다. 로테의 공포가 심화할수록 무대 바닥에 검은 페인트가 한 줄씩 칠해지는 것을 보며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또, 로테의 엄마, 남자 친구, 경찰 등 주변 인물들의 대사는 벽면에 빔프로젝터로 투사해 처리되는데, 후기를 검색해 보던 중 이것이 벽에 대고 말하는 느낌을 주려는 연출가의 의도였음을 알고 놀라웠다. 스토킹 범죄를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고 오히려 로테의 책임으로 몰리는 답답한 상황들이 와닿았다.


원작은 베르테르의 시점이었지만, 이 연극을 통해서는 로테의 시점에서 그것이 어떻게 다가왔을지를 선명히 느껴볼 수 있다. 소설을 읽으며 은은히 무서웠던 요소들이 잘 구현되어 있어 공감이 갔다. 베르테르가 당신을 위해 목숨도 바칠 수 있다는 등 거창하고 극단적인 말을 남발하는 것이 결코 사랑 표현으로 들리지 않았다.


스토킹 범죄는 지금도 일어나고 있다. 불과 지난 5월 일어난 광주 여고생 살해 사건도 동료를 향한 범인의 스토킹에서 비롯된 것이었으며, 3월에도 남양주 스토킹 보복살인 사건이 있었다. 스토킹은 더 큰 범죄로 이어지기 쉽고, 이어지지 않더라도 그 자체로 큰 공포와 피해를 주는 범죄라는 경각심이 여전히 부족하다. <로테/운수>와 같은 연극이 더 의미 있는 이유는 이러한 우리의 현실에 있다.


또, 이 연극은 원작 소설에서 더 나아가, 베르테르의 자살 이후 로테에게 더욱 심하게 가해졌을 압박감까지 조명한다는 점이 좋았다. 베르테르가 홀로 비통해하며 자살한 것과 별개로, 로테가 더 분명한 피해자라는 사실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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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반부는 남편을 살해한 죄로 법정에 서 있는 여자 이운수의 이야기다.

 

두 여자의 이야기가 연결되지는 않지만, 검게 변한 바닥에 배우가 하얀 스프레이로 남편의 시신 실루엣을 그리며 작품이 전환되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로테는 세상으로부터 점점 검은 칠을 당해가는 과정에 있었다면, 운수는 이미 그 잿더미 위에 서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이 역시도 원작 <운수 좋은 날>은 남편 김 첨지의 시점에서 보낸 하루였지만, 이 연극에서는 운수의 시점으로 가정폭력에 시달려온 지난날과 그녀의 내면을 표현한다. 특히 김태은 배우의 연기가 대단했다. 운수의 오랜, 질긴 괴로움이 절절하게 느껴져서 저절로 눈물이 났다.

 

너무나 답답했다. 그녀가 피해를 받아올 동안에는 외면하다 그 한 번의 가해에만 집중하고 죄를 묻는 세상이. 신고도 이혼도 불가능하다는 걸 점차 깨달아갔을, 살인이 유일한 탈출구였을 운수의 절박함을 좀 더 고려해 줄 수는 없는 것인지.


오늘은 운수가 좋은 날이라고, 원작 속 김첨지의 대사를 운수가 읊조릴 때 마음 깊이 슬픔을 느꼈다. 원작과 달리 남편을 죽인 것만으로 큰 변화가 아닐까 생각하고 싶었다. 지난해 공개된, 가정폭력을 당한 여성이 주인공인 드라마 <당신이 죽였다> 같은 창작물들이 떠오르기도 했다. 죽임을 당하느니, 죽이고 감옥에 가는 게 더 해피엔딩 아닐까... 사회적 시선 탓에 쉽지 않겠지만 운수가 어찌 됐든 더 나은 삶을 살게 되기를 기도해 주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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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은 인류의 보편적인 가치를 담고 있기도 하지만, 그 시대 특유의 그릇된 가치관이 담겨 있기도 하다. 그렇기에 단순히 옛날 작품이니 괜찮다고만 생각하며 계속 읽기보다, 문제적인 내용에 관해서는 이야기할 필요도 있다. 그간 침묵 당해야 했던 인물들의 목소리도 다시 들어보자는 것이다.


이 연극은 그 시도의 일환으로, 매우 유의미한 주제 의식을 전달했다고 생각된다. 이 극을 올린 이들에게, 그리고 로테와 운수에게 박수를 보내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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