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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ESS] 나무 살인 사건 보고서 – 오염된 잔 [도서]

판타지와 추리의 완벽한 조화

by 김혜원 에디터
2026.06.03 17:20

 

 

자연은 압도적이다. 자연은 자애롭다. 자연은 어머니이고, 자연은 모든 존재를 품는다.

 

사람의 힘이 더해지지 아니하고 세상에 스스로 존재하거나 저절로 생겨난 산, 바다, 식물 따위를 이르는 말 ‘자연(自然)’. 그들은 때로는 가히 압도적인 위용을 뽐내며 모든 것을 휩쓸어버리기도 하지만, 많은 경우 아름답고 무궁무진한, 가치중립적인 존재로 묘사되고 또 받아들여진다.

 

특히 나무나 풀, 꽃과 같은 식물들은 가장 사랑받는 자연 존재 중 하나다. 그들은 천천히 자라고, 위협적이지 않고, 심미적이면서, 인간을 비롯한 다양한 생명체들에게 수많은 혜택까지 안겨준다. 그래서 식물은 우리의 일상생활과 특히 밀접하다. 우리는 나무로 집을 짓고, 화초를 길러 공기를 정화하고, 농사를 지어 필요한 자원을 얻는다. 단순한 관상용으로 꽃을 기르는 일도 흔하다.

 

<오염된 잔> 속 카눔 제국 사람들의 생활도 이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어느 날 나무가 사람의 몸을 뚫고 자라는 살인 사건이 벌어지기 전까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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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눔 제국 다나트라 지역의 보조 수사관 디니오스 콜. 급여 사기 사건 정도만 줄곧 맡아오던 그의 앞으로, 정확히는 그의 상관인 수사관 아나고사 돌라브라 앞으로 갑작스러운 살인 사건이 떨어진다. 제국 최대 부호인 하자 가문의 저택에서 일어난 비밀스럽고도 기묘한 사건이었다.

   

 

하지만 그 방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중앙에서 자라는 잎이 무성한 나무였다. 사람 안에서 자라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니, 사람을 꿰뚫고 자라고 있다고 해야 할까.

침실 한가운데에 가느다란 나무 여러 그루에 꿰뚫린 시체가 매달려 있었지만, 오티리오스가 말했듯이 처음에는 그것이 시체라는 사실을 알기조차 어려웠다. 뒤얽힌 가지 속에서 몸통 조금, 그리고 왼쪽 다리 일부가 보였다. 내가 그걸 보고 파악할 수 있는 것은, 시신이 제국 엔지니어 이얄렛(본부)들이 입는 자주색 군복을 입은 중년 남자라는 사실이었다.

(......)

“궁금하실까 봐 말씀드립니다만 지붕 위로 2미터 넘게 솟아나 있습니다. 생선 기름이 튀듯이 지붕을 1미터나 뚫고 나갔어요. 꽤 크게 자란 셈이죠. 이런 건 처음 봅니다.”

“얼마나 걸렸습니까?” 오티리오스의 말에 나는 쉰 목소리로 되물었다.

“5분도 안 걸렸어요. 하인의 증언에 따르면 그렇습니다. 지진이 난 것처럼 집이 흔들렸답니다.”

 

 

갖가지 이식제와 보강제를 개발해내 한 달 만에 익는 밀이나 서너 배 크기로 자라는 과일 등을 길러내는 기술을 가진 제국에서도 단 몇 분 만에, 그것도 사람의 몸속에서 폭발적으로 자라날 수 있는 나무를 키워내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이야기였다.

 

이 전대미문의 사건 현장을 눈앞에 두고 딘은 가장 먼저 향이 담긴 유리병을 꺼낸다. 톡 쏘는 양잿물 냄새가 나는 병이다. 코르크를 따고, 코 밑에 대고, 눈을 감고, 숨을 깊이 들이쉰다. 이내 다시 눈을 뜨고, 냄새가 머릿속에 남아 있는 상태에서 현장의 모든 부분을 ‘기억한다.’

 

카눔 제국에는 인체 변형 기술이 있다. 단발적인 이식 혹은 침습적인 보강을 통해 제국은 일반적인 인간의 범주를 벗어난 강력한 군인 집단을 얻는다. 그중에서도 본부의 핵심적인 계획을 보조하게끔 두뇌를 보강한 사람들을 ‘서블라임’이라고 부른다. 종류는 다양하다. 초인적인 계산을 할 수 있는 악시옴, 무엇이든 읽고 쓰는 언어 능력을 가진 링구아, 한계 없는 공간 지각 능력을 보유한 스파티아스트, 경험하는 모든 것을 기억하는 인그레이버 등.

 

그리고 보조 수사관 딘은 인그레이버다. 그가 보고 듣는 것들은 모두 박제되어 그의 머릿속에 그대로 저장된다. 무언가를 외우기 위해 힘을 들일 필요도 없다. 대신 특별히 신경 써야 할 순간일 때는 향을 이용한다. 무한한 도서관 같은 머릿속에서 필요한 자료를 빠르게 찾아내기 위한 촉매제인 셈이다. 주요하게 기억해야 할 것들을 경험하기 전에 미리 특정한 향을 맡고, 기억한 뒤, 후에 해당 기억을 불러내야 할 때 같은 향을 다시 맡는다.

 

그것이 딘이 상관인 아나 수사관 앞에서 또다시 양잿물 향을 들이마신 이유다. 아나고사 돌라브라. 새하얀 머리칼을 가진 키 크고 마른 40대 후반 정도의 여성. 노란 눈을 가졌지만 지나치게 예민한 감각 때문에 거의 항상 붉은 천 안대를 둘러 생활하고 집 밖으로도 잘 나가지 않는 괴팍한 은둔형. 하지만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천재.

 

딘이 머릿속에 담아온 살인 사건 현장을 간접적으로 전해 듣는 것만으로도 아나는 거침없이 움직인다. 용의자를 추리고, 저택의 증인들을 불러 심문하고, 그들의 심리를 꿰뚫어 본다. 거의 안대를 쓰고 지내 앞을 잘 보지 못하는 아나에게 이런 사건은 어둠 속에서 맞추는 하나의 거대하고 재미있는 퍼즐과 같다. 딘의 현장 묘사, 사람들의 발걸음 소리와 숨소리, 손끝으로 읽는 글자들,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감정 등 초민감자인 아나에게는 세상의 신호 하나하나가 근거가 된다. 죽음 방식은 기묘했지만 사건 추리 과정은 특이할 것이 없었다. 아나는 손쉽게 범인을 지목했다.

 

사람들을 공포에 떨게 했던 전대미문의 나무 살인 사건은 그렇게 간단히 막이 내리는 듯했다.

 

그때까지는 말이다.

  

*

   

로버트 잭슨 베넷의 <오염된 잔(The Tainted Cup)>은 지난 5월 초 황금가지 출판사에서 국내 발간된 판타지 추리 신간이다. 판타지, SF 문학계에서 가장 권위 있는 상 중 하나인 휴고상과 세계환상문학상을 석권하고 <뉴욕 타임스>, , <북리스트> 등에서 ‘올해의 책’으로 선정된 화제의 작품이기도 하다. 동시에 영미권 최대 서평 사이트인 굿리즈에서 10만 개 가까운 리뷰를 기록하며 독자들의 압도적인 호평까지 얻었다.

 

마치 <셜록 홈즈> 시리즈를 떠올리게 하는 괴팍한 천재 탐정 아나와 초보 조수 딘은 단순한 사고인 줄 알았던 나무 살인 사건 속에 숨겨진 어두운 진실을 향해 조금씩 나아간다. 그런 그들을 향해 시시각각으로 닥쳐오는 위협에는 비단 권력이나 부패, 배신과 같은 ‘인간적인’ 위기만 있지 않다.

 

매번 우기가 되면 제국 동해에서는 ‘레비아탄’이라는 거대 괴수가 내륙을 향해 다가온다. 한 마리 한 마리가 작은 산과 같은 막강한 존재들. 그들을 막기 위해 제국은 가장 접전지인 동해 근처에 해벽을 세우고, 그곳에서부터 가장 내륙에 위치한 제국의 성소까지 순차적으로 총 3개에 걸친 거대한 장벽을 건설한다. 가장 안전하고 부유한 내륙, 낙원이라 불리는 제1륜 지역을 감싸는 제1벽. 그 바깥의 제2륜을 감싸는 제2벽. 더 바깥으로는 제3륜을 감싸는 제3벽과, 가장 외곽, 즉 동해와 가장 가까운 외륜을 보호하는 벽이자 제국의 첫 번째 방어선 해벽.

 

제국을 배경으로 구역을 나눠 거대 괴수를 막기 위한 장벽을 세운다는 점이나 계급과 지위가 명확히 나뉘어 있다는 점에서는 <진격의 거인>이나 <설국열차>의 매력을 품고 있기도 하다. 하지만 <오염된 잔>은 단순한 투쟁 플롯이나 영웅 서사만을 선보이는 작품이 아니다. 두려움의 일상화, 만연한 목숨에의 위협, 신분 계급, 제국 등 얼핏 파시즘적인 이야기로 흐를 수 있는 장치가 가득한 와중에도 작품은 끝내 ‘공동체’를 이야기한다. 톱니바퀴 모양을 닮았다는 이유로 ‘륜’이라 불리는 지역들. 하지만 바퀴에 관한 담론은 일차원적인 차원에서 끝나지 않는다. 수많은 사람이 발을 딛고 살아가는 제국이라는 공간 자체가 결국 또 하나의 거대한 톱니바퀴임을 작품은 이야기한다. 두려운 와중에도 각자의 위치에서 할 일을 해내는 자들만이 쟁취할 수 있는, 인간 개개인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아무리 거대한 위협이 닥쳐와도 끝내 물리치고야 마는 공동체의 힘을.

   

 

하지만 우기가 끝날 때마다 사람들은 한숨 돌리는 대신 이렇게 생각했다. 다음 우기는 어쩌지? 그때는 어떻게 할까?

카눔 제국 신민의 삶은 그랬다. 외륜에 사는 경우에는 더욱 그랬다. 끝없는 불안에 시달리며 늘 위기 상태에서 살았다.

그래서 솔직히 일상을 지켜 내기가 어렵기도 했다. 거대한 괴수가 벽을 뚫고 들어와 몇 시간 만에 나를 비롯한 수천 명을 죽여 버릴 수 있는데, 먹거리를 구하고 집을 수리하고 가족을 돌보는 것이 무슨 소용일까? 사실 뭘 한들 의미가 있겠는가?

하지만 황제가 그렇지 않다고 했기 때문에 제국은 살아남았다. 어딜 가나 보이는 그의 형상에는 센 세츠 임페리야라고 적혀 있었다. 이제 아무도 쓰지 않는 고대 언어, 카눔어로 쓴 글이지만 모두 그 뜻을 알고 있었다. 그대가 제국이다.

더욱 중요한 사실은, 우리가 그 의미를 이해한다는 것이었다. 우리 모두 맡은 일을 하기 때문에 우리 모두 여기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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