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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pinion] 그럼에도 네 시간을 다시 한 번 살 수 있다면, ‘컨택트’ [영화]

모든 것을 알면서도 다시금 내리는 선택이란

by 김그린 에디터
2026.05.10 1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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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라는 단어는 세상에서 가장 복잡한 부사어 중 하나일 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말을 알면서도 무엇인가를 감행할 마음을 먹는 것.

 

그것은 뻔한 결말이 예견되어 있는데도 몸을 부딪히는 만용일 수도 있고, 모두가 말리는데도 기어이 자신의 생각을 고치지 않는 아집일 수도 있으며, 역경을 딛고 무언가를 이루고야 마는 도전일 수도 있다.


수많은 SF는 저마다의 수식어를 지닌다. ‘아버지의 우주’라는 평을 들었던 인터스텔라, 이와 대구를 이루어 ‘어머니의 우주’라는 묘사를 받아들었던 그래비티, ‘차갑고 우아한 디스토피아’라는 이야기를 듣던 가타카가 그러하듯이.

 

그리고 여기, ‘그럼에도’라는 하나의 복잡다단한 부사어로 완벽히 설명되는 SF 영화가 있다. 드니 빌뇌브 감독의 SF ‘컨택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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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컨택트’, 원제로는 ‘Arrival’이라 불리는 이 영화는 테드 창의 SF 단편집 ‘당신 인생의 이야기’에 수록된 표제작 ‘네 인생의 이야기’를 원작으로 삼고 있다. 영화의 큰 줄기는 외계 비행선의 도착, 미지의 외계 생명체와의 조우, 그리고 그에 뒤따르는 인간들의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

 

대개 외계와의 접촉을 다루는 SF라면 그로 인한 갈등, 혼란, 목숨의 위협과 재앙 등을 다루는 것이 상례이나, ‘컨택트’의 이야기는 이와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간다. ‘컨택트’는 시간에 관한 이야기이다. 외계 생명체의 시간, 그와 접촉하며 조금씩 변화하는 한 인간의 시간, 그리고 그로 인하여 변하는 인류의 시간.


통상적 인지 속에서 우리 인류의 시간은 일직선으로 흐른다. 시간은 앞에서 뒤로 흐른다. 시곗바늘은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돈다. 외계 생명체 헵타포드와의 조우 이전까지, 영화 속의 모든 장면은 이러한 시간의 정방향을 따른다.

 

주인공 루이스가 딸과 술래잡기를 할 때 모녀는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원을 그리며 시계 방향으로 달린다. 학교로 향하는 수많은 학생들은 저마다 시계 방향으로 걸음을 옮긴다. 루이스는 주차장을, 캠퍼스를, 자신이 강의를 진행하는 원형의 강의실을 시계 방향으로 가로지른다. 모든 인물은 인간의 시간에 종속되어 있다.


그러나 인류가 시간을 받아들이는 것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시간을 이해하는 외계 생명체 헵타포드의 비행선이 지구와 처음으로 ‘접촉’한 이후, 루이스의 모든 시선과 동선은 시계 반대 방향으로 뒤바뀌게 된다. 루이스를 태운 헬기는 시계 반대 방향으로 회전한다. 루이스의 뒤를 좇는 카메라워킹은 시계 반대 방향을 따른다. 더 이상 루이스는 인간의 시간에 종속되어 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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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지는 언어를 형성하고, 언어는 인지를 규정한다. 헵타포드는 시간을 원형으로 인지하며, 그들의 언어는 원형의 구조를 띤다. 그들의 시간 그리고 언어에는 앞과 뒤의 개념이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순간과 대상은 동시에 존재할 수 있으며 동시에 인식될 수 있다. 헵타포드와 만나 그들의 언어를 조금씩 알아 가게 되며, 루이스는 일직선의 시간에서 벗어나 원형의 시간을 이해하는 데에 한 걸음씩 가까워진다.


영화의 구성은 인류의 시간이 아닌 헵타포드의 시간으로 배열되어 있다. 모든 사건과 장면은 일직선으로 배치되어 있지 않으며, 그리하여 일직선의 시간을 사는 관객들에게 영화의 흐름은 여러 순간들이 중구난방으로 뒤섞여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꼭 헵타포드의 시간과 언어가 그러하듯, 제멋대로 뻗어 나가나 싶던 모든 산발적인 순간들은 작품의 특정 지점에 이르러 비로소 하나로 완벽히 수렴된다.

 

중심점으로부터 일정한 거리에 놓인 모든 서로 다른 점을 연결했을 때 마침내 가장 완벽한 형태의 원이 그려지는 것처럼, 그 ‘수렴’의 지점에서 비로소 지난했던 갈등과, 고조되었던 부당함과, 인류를 둘러싼 패착과 난관은 놀라우리만치 서로와 맞물리며 한 단계 높은 상태로 해소된다.

 

그러나 이 수렴의 지점이 전하는 가장 큰 울림은 국제적 갈등의 해결도, 외계 문명의 신비도, 인류 역사의 도약도 아니다. 수렴의 순간 관객 모두는 ‘그럼에도’라는 부사어를 여실히 체감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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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의 선택이 어떤 결말로 끝을 맺을지 알면서도 그 선택을 내리는 마음. 이 결정 뒤에 무엇이 뒤따를지 너무도 잘 알면서 다시 한 번 그 결정을 내리는 마음. 요컨대, 예견된 상실을 이미 뼈저리게 잘 알고 있으면서도 기어이 다시 시작하기를 택하는 마음. ‘그럼에도’ 택하는 사랑.

 

때로는 만용이고 때로는 아집이며 때로는 도전인 ‘그럼에도'라는 말은, 이 수렴의 지점에 이르러 마침내 ‘사랑’이라는 단어의 완벽한 동의어로 거듭난다.


선후관계가 분명한 일직선의 시간은 오직 인류의 시간에만 적용되는 말이겠으나, 적어도 ‘컨택트’를 본 순간을 기점으로는 시간이 명확히 앞과 뒤로 나뉠 수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택하는 사랑’을 마주하기 전의 우리와 마주한 이후의 우리는 결코 같지 않을 것이므로.

 

그러니 우리 앞에 놓인 일직선의 시간 중 일부를 할애해 고요하며 역동적인 원형의 시간을 다룬 작품을 마주해 보는 것은 어떨까. 어디에나 있으며 언제나 있는 이 한 줄기 무모하고 대견한 사랑의 감각이 우리를 영영 바꿔 놓을지도 모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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