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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pinion] '이어도'와 '위커맨', 섬이 남자를 먹는 방식 [영화]

'이어도'와 '위커맨'(1973/2006)이 외부인을 소화하는 논리에 관하여

by 서지민 에디터
2026.05.07 13:36

 

 

섬은 남자를 죽이지 않는다. 단지 소화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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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영의 '이어도' (1977)를 관람한 뒤 우리 세대에게 익숙한 아리 애스터의 '미드소마'(2019)를 자연스럽게 떠올릴 수 있었다. 이 기묘한 인상의 기원을 따라 로빈 하디의 '위커맨'(1973)과 닐 라뷰트의 '위커맨'(2006)을 찾아보게 되었다. 전혀 다른 문화권에서 탄생한 이야기들임에도, 위커맨과 이어도는 다른 언어로 쓰인 같은 문장 같은 인상을 준다. 외부에서 온 남성이 자연의 논리로 운영되는 폐쇄적 신앙 집단에 진입하고, 그 원초적이고 기이한 번식의 욕구에 포획되며, 법과 이성으로는 끝내 빠져나가지 못한다. 토속 신앙이든 기독교든 자본주의든, 결국 모두 자신의 생존에 가장 효율적인 서사를 필요로 한다. 세 영화가 공통으로 던지는 공포는 바로 그 서사 아래 깔린 질문이다. 자연과 원초의 힘 앞에서 인간이 구축한 체제와 윤리는 과연 얼마나 버틸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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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수와 씨앗 — 근대가 자연에 저지른 것


 

이어도가 제작된 1977년, 공장 폐수가 연안 어장을 오염시키고 산업화가 전통적인 삶의 방식을 해체하던 때였다. 그러나 김기영은 이 파괴의 현실을 배경으로 삼으면서도 파랑도를 패배하는 공간으로 그리지 않는다. 영화 속 파랑도는 외부의 오염에 무너지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그 오염마저 섬의 순환 논리 안으로 흡수한다. 폐수가 흘러들어 바다를 썩게 하고, 전복이 빨갛게 죽어 나가는 장면은 단순한 환경 파괴의 기록이 아니다. 근대가 자연에 뿌리는 부정한 씨앗이, 자연 본래의 생식 논리와 충돌하고 있다는 선언이다. '異魚島', 이상한 물고기의 섬이라는 제목은 처음부터 이곳이 외부의 언어로는 해독되지 않는 자생적 유기체임을 선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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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편의 위커맨도 각자의 방식으로 이 긴장을 구축한다. 1973년 작의 서머아일은 빅토리아 시대 과학과 켈트 이교 신앙이 결합한 기묘한 섬으로, 사과 과수원의 수확이 신앙의 정당성을 뒷받침한다. 기독교가 에덴에서 추방의 매개물로 삼은 바로 그 과일이, 이곳에서는 이교도 풍요의 상징으로 뒤집혀 있다. 2006년 작의 섬머사일은 세일럼 마녀재판의 박해를 피해 정착한 여성 조상들의 후예로 이루어진 신앙 집단이다. 시스터 섬머사일(엘런 버스틴)은 남성의 역할을 담담하게 정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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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성은 우리 집단의 중요한 일원입니다. 번식을 위해서요."
 

 

자연의 작동 원리를 체제의 근거로 삼고, 그 위에서 인간의 윤리를 역으로 전복시키는 것. 세 영화가 공유하는 출발점이다.

 

 

 

번식의 오브제 — 전복, 사과, 꿀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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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영화는 번식에 대한 집착을 구체적인 오브제를 통해 표현한다. 〈이어도〉에서 전복은 어업 자원 이전에 형태 자체가 여성의 성기를 직접 연상시키는 오브제다. 생식과 자연과 여성성이 하나로 묶이는 물질적 지점이다. 천남석이 전복을 번식시키기 위해 빛을 비추는 장면이 이어서 불임인 박여인에게도 같은 빛을 비추는 장면으로 이어질 때, 영화는 이 등치를 숨기지 않고 직접 시각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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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년 작의 사과는 수확의 성패가 곧 신앙의 증거다. 흉년은 단순한 자연재해가 아니라 신이 돌아섰다는 신호이며, 그 신호에 답하는 방식이 인신 제의다. 2006년작에서 꿀벌 군집의 구조 — 여왕벌, 일벌, 번식 후 폐기되는 수벌 — 는 이 섬의 권력 체계를 직접 은유한다. 결말에서 군중이 외치는 구호 '드론은 죽어야 한다(The drone must die!)'는 그 은유의 완성이다.

 

오브제의 위기가 제의의 원인이 된다는 구조는 세 영화에서 평행하게 작동한다. 전복 양식장의 전멸, 사과의 흉년, 꿀 생산의 감소. 자연의 생식 기반이 위협받는 순간 외부 남성의 생명이 요구된다. 이것이 세 영화가 외지인 남성을 필요로 하는 이유다. 그들은 구제자가 아니라 소모품이다. 자본주의가 인간을 희생양으로 삼는 방식이나, 기독교가 예수의 죽음을 구원의 제의로 설계하는 방식과 근본적으로 다를 것이 있는가. 익숙하지 않아서 불쾌할 뿐, 이 컬트 집단과 남성들이 속해 있던 본토의 질서는 작동 메커니즘 자체가 다르지 않다.

 

 

 

저주의 색 — 푸른빛과 붉은빛 사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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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도에서 색채는 단순한 미장센이 아니라 저주와 생식의 언어다. 영화 안에서 푸른빛이 들 때, 그것은 이어도의 저주가 가까워지고 있다는 신호다. 독성 남성성의 색, 바다로 끌려 들어가는 죽음의 색. 반면 적색은 민자와 무당에게 집중된다. 생식의 색, 의지의 색, 끝내 소멸하지 않는 것들의 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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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색채의 긴장이 가장 극단적으로 충돌하는 장면이 시체와의 정사다. 무당의 빨간 방 안에서 죽은 천남석의 몸을 민자가 끌어안는 이 장면은, 정충 은행 의사가 앞서 언급한 히말라야 시체에서도 살아있는 정충을 발견했다는 복선과 맞닿는다. 몸은 썩어도 씨앗은 남아 있다. 자연의 번식 논리는 죽음을 멈추지 않는다. 죽은 채로 꼼짝도 못하는 남성을 둘러싼 여성들의 이 장면은, 미드소마에서 외부 남성을 둘러싸고 집단으로 의식을 수행하는 장면과 겹쳐 보인다. ‘birth’ & ‘death’의 이분법과 윤리는 이들에게 다르게 작동한다.

 

정사 장면임에도 단순한 도착이 아니라 근원적인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이유는, 영화가 그것을 이어도의 저주가 완성되는 의식으로 설계하기 때문일 것이다. 시어머니에서 며느리에게로 이어지는 맹세, 한 사람이 죽으면 한 사람을 만들어야 한다는 순환의 서약. 이것이 이어도가 가지는 한국적인 특징이다. 한과 가족 간에 이어지는 저주 같은 약속이 오컬트와 접합되는 그 지점, 귀신의 토속적인 음악과 정사의 배경이 가족공동체가 되는 순간이 다른 나라의 포크 호러와 구별되는 이어도만의 질감이다.

 

 

 

속임과 포획 — 합리적 임무의 함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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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영화에서 외지인 남성이 섬에 진입하는 경로는 동일하다. 실종자를 찾겠다는 정의롭고 합리적인 임무다. 선우현은 천남석의 죽음을 추적하고, 하위 경사와 에드워드 말러스는 각각 실종된 소녀 로완을 찾아 섬으로 향한다. 그러나 두 편의 위커맨에서 로완의 실종은 처음부터 외지인을 유인하기 위한 허구였다. 하위는 동정이며 법의 집행자이고 스스로의 의지로 섬에 온 자라는 조건을 충족했기에 제물로 선택되었다. 2006년작에서는 윌로우가 10년 전 섬을 떠나 말러스와 교제하고 아이를 낳은 것조차 설계의 일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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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도의 파랑도에서 속임은 더 교묘한 방식으로 작동한다. 선우현을 끌어들인 것은 편지가 아니라 이어도의 자연적인 논리 자체다. '한 사람 없애면 한 사람 만들어야 한다'는 섬의 원리가 천남석의 자리에 선우현을 불러들인다. 여자들이 의도적으로 설계한 함정이 아니라, 더 큰 운명론적, 자연적 담론으로 인해 그는 처음부터 그 자리를 위해 존재했다. 속임과 구조적 흡수의 차이가 있을 뿐, 결과는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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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당은 종잣값과 해녀 열 명을 교환 조건으로 내걸며 생식 계약을 성사시킨다. 암내 나는 암퇘지에게 수퇘지 씨를 붙여달라는 민자의 대사는 이 관계를 정확히 정의한다. 1973년작 위커맨에서 나신으로 카메라를 정면으로 응시하며 제3의 벽을 넘어 관객까지 유혹의 대상으로 끌어들이는 윌로우의 모습을 담은 연출은, 이어도에서 무당들이 굿을 하며 스크린 너머를 바라보는 장면과 동일한 문법을 공유한다. 단순히 유혹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몸을 가누지 못한 채 저주에 걸린 듯 끌려가는 남성들. 번식이라는 원초적 욕망 앞에서 윤리와 체제는 제기능을 세우지 못한다.

 

 

 

총도, 신앙도, 카메라도 — 이성의 무기가 부서지는 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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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영화의 외지인 남성은 모두 근대적 질서의 체현자다. 1973년작의 하위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이자 경찰로, 섬의 모든 것을 미신이자 불법으로 규정한다. 2006년작의 말러스는 법의 집행자로 총을 들고 진입한다. 이어도의 선우현은 카메라와 취재 수첩을 든 언론인으로, 사건을 기록하고 진실을 밝히겠다는 사명감으로 파랑도에 발을 들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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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무기들은 하나도 작동할 수 없다. 1973년작에서 하위의 총은 쓸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는다. 법정도, 본서도, 지원도 없다. 그의 마지막 절규 — 찬송가 구절과 신의 이름 — 는 섬 주민들의 명랑한 민요 소리에 삼켜진다. 기독교의 신이 켈트 이교도의 자연 앞에서 무력하다. 2006년작에서 말러스는 총을 꺼내고 자전거를 빼앗고 아이들을 위협하지만 섬의 논리는 흔들리지 않는다. 오히려 그의 조급함이 그를 더 완벽한 제물로 만든다. 이어도에서 선우현의 취재는 끝내 실패하고, 그의 몸은 이미 섬의 재생산에 복무했다. 합리적 추론이 쌓일수록 진실은 더 멀어진다.

 

1973년작에서 토속 민요 '대지주의 딸(The Landlord's Daughter)'의 경쾌한 곡조와 음란한 가사의 간극이 만드는 공포, 섬의 아이들까지 모두 같은 노래를 부르는 순간 완성되는 하위의 고립은, 이어도에서 물거품 소리가 모든 플래시백 전환을 매개하며 이어도의 중력장 안에서만 서사가 진행되는 방식과 같은 논리다. 음악이 몸에 먼저 침투하고, 이성은 손쓸 틈 없이 무기력화 된다.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손 — 클로즈업과 롱샷 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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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도에서 가장 인간적인 이미지는 손이다. 천남석을 붙잡으려다 끝내 미끄러지는 여자의 손, 그리고 결말에서 선우현이 아이의 손을 놓지 못하는 장면. 자연의 논리는 남성을 간절히 붙잡다 필요가 끝나면 놓아버리고, 남성은 떠나려 발버둥치지만 항상 먼저 손을 내미는 처지가 된다. 이 두 손은 닿지 못한 채 대칭을 이루고, 그러한 클로즈업 다음에는 광활한 자연의 롱샷이 온다. 인물들이 결연히 다짐을 하고 나면 그것을 압도하는 바다와 섬의 광경이 뒤따른다. 인간은 넓은 하늘을 바라보면서 죽는데, 멋있게 죽을 수도 없다. 자연은 그 다짐의 전제 자체를 부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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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년작 위커맨의 결말도 이 문법으로 완성된다. 위커맨이 타오르는 동안 카메라는 서서히 물러나 불타는 인형과 수평선 너머로 지는 태양을 한 프레임에 담는다. 자연은 무심하게 이 모든 것을 받아 삼킨다. 세 영화 모두 밝음의 공포를 공유한다. 파랑도는 눈부신 햇빛과 바다 위에 펼쳐져 있고, 서머아일과 섬머사일은 각각 메이데이 축제와 하지 의식의 화창한 풍경 속에 있다. 공포는 어둠 속에 있지 않다. 그것은 아름다운 자연 안에서, 웃으며 노래하는 무리 안에서, 관객이 망각하도록 유도되는 바로 그 순간 안에 말 그대로 ‘자연스럽게’ 존재한다.

 

 

 

끝나지 않는 소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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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도의 결말이 모호한 것은 이 때문에 자연스럽다. 민자의 아이가 누구의 핏줄인지 — 살아있을 때의 천남석인지, 선우현인지, 혹은 시체의 정충인지 — 영화는 밝힐 필요가 없다. 그 불확실성은 이성으로 끝내 해독하지 못한 이어도의 , 자연의 섭리다. 두 편의 〈위커맨〉도 각자의 방식으로 답을 유보한다. 하위의 죽음이 수확을 회복시킬지, 말러스의 희생이 꿀 생산을 되살릴지는 인간의 사유일 뿐이다. 2006년작의 마지막 장면에서 윌로우와 시스터 허니가 본토 술집에서 또 다른 남성 경찰들에게 접근하는 것은 이를 코미디처럼 묘사한다. 이 자연의 순환은 단순히 한 남성으로 끝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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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영화는 서로 다른 방식으로 외지인을 소화하지만, 소화 이후에도 자연의 논리가 지속된다는 점에서, 그리고 그 지속이 외부인의 소멸을 전제로 한다는 점에서 동일하다. 체제와 윤리와 이성은 그 앞에서 번번이 부서진다. 섬은 남자를 죽이지 않는다. 섬(Mother nature)이 그를 다음 계절의 일부로 소화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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